너는 사자구나. 정확히 너는, 사자의 영혼이다. 사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영혼일 뿐인데, 사자라 말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주 오래전, 너는 아프리카 초원을 거닐었던 것 같다. 한때는 그랬던 것 같다. ‘한때는 초원을 거닐었지’라고 말하고 보니, ‘한때’라는 말이 빈 소라껍데기 같다. 귀에다 대면 ‘윙’ 하고 휑한 공간을 울리는 소리가 날 것 같다.
너는 그림 속에 있다. 그림 속 사막 가운데 서 있다. 네 앞에는 집시 여인이 누워 있고, 여인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맹수인 네가 옆에 있어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들었다. 좋은 꿈을 꾸고 있나 보다. 그녀는 입을 살짝 벌리고 옅게 웃고 있다.
사막의 너와 잠자는 집시 여인이 있는 밤의 풍경은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Henri Rousseau)의 그림,?잠자는 집시(The Sleeping Gypsy, 1897, 뉴욕 현대미술관)?이다. 앙리 루소는 그림에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은 망설인다’라는 부제를 붙였다.
부제는 네가 사나운 육식동물이라 말한다. 여인은 지쳐 잠들었다고 한다. 사막의 밤, 찬 바닥에 누워 단잠을 자는 여인의 낮은 분명 고단했으리라. ‘사나운’ 너는 그런 여인의 얼굴에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여인의 힘든 낮을 읽었겠지? 그녀의 지친 삶을 알게 된 너는, 이제 더 이상 사나운 동물이 아니다.
나는 그림 속 너의 옆모습을 보고 있다. 너는 가만히 멈춘 채, 눈동자만 기이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어린아이가 그린 동그라미 같은 눈으로, 그림 밖의 나를 바라본다.
순간, 나는 너의 눈에서 여인의 꿈을 본다. 여인은 꿈속에서 사자가 되어 사막을 거닐고 있다. 서걱거리는 모래바람 속에서 위풍당당 걷고 있는 사자. 그녀의 비루한 일상은 바람에 날아가 사라지고, 생채기로 가득한 감정들은 휘발된다. 현실을 벗은 그녀는 순백의 자아로만 남아, 사자가 되어 사막을 걸어간다. 그 뒤를 보름달과 몇 개의 별들이 따른다. 너는 그녀에게 네 육체를 빌려주었구나. 너의 몸을 그녀의 맑은 영혼으로 채웠구나.
문득, 남진우의 시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가 떠오른다. 어쩐지 네가 익숙하다 했다. 나는 이미 시에서 너를 만났었다.
아득히 먼 사막의 길을 걸어 사자 한 마리/내 방문 앞까지 왔다/내 가슴의 샘에 머리를 처박고/긴 밤 물을 마시기 위해 (…중략…) 타오르는 사자의 커다란 눈이 내 눈에 가득 차고/사나운 사자의 앞발이 내 목줄기를 짓누를 때/천둥처럼 전신에 와 부딪는 시계 똑딱거리는 소리//문을 열고 나가보면 어두운 복도 저편/막 사라지는 사자의 꼬리가 보인다.
- 남진우,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중에서
사막을 떠나 너는 시인의 방으로 갔다. 새벽 세 시, 너의 앞발은 시인의 목줄기를 짓눌렀고, 너의 눈은 간절한 목마름으로 타올랐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갈증이었을까? 너의 갈증은, 시인의 갈증이었다.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렸다는 것을 모르는 시인. 그가 느껴야 할 갈증.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샘을 다시 채우라고, 마모되기 전의 순수했던 문학적 욕구와 본능을 다시 깨워 오라고, 너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시인의 새벽을 물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사라졌다.
앙리 루소 그림 속 너는 집시 여인의 잠을 지켜주고 있지만, 시인의 방에서는 그의 잠을 잡아채어 가져갔다. 네가 떠난 자리엔 날카로운 시계 소리만 남았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는 빈방을 조각조각 잘라내며 시인의 자각을 재촉했을 거다. 어서 깨어나라고, 끓어오르는 듯 시(時)가 태동하던 처음 그때로 돌아가라고.
그리고 지금 나는, 너와 나를 생각한다. 사자, 너는 내게 오지 않겠지. 나는 안다. 너는 앙리 루소의 그림과 남진우의 시 속에서 나를 바라볼 뿐이다. 예술이라는 수수께끼의 암호 같은 눈빛으로…. 나는 그것을 풀어야 하는 관객일 뿐이다. 곤궁한 현실을 맨발로 걷고 있는 집시의 소박하고도 천진난만한 영혼? 매너리즘에 빠진 시인이 다시 찾아야 할 시작(時作)의 기원, 그 원형이 되는 본성? 내게는 먼 이야기이다. 내겐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게 오지 않는다. 나는 자격 미달, 나를 바라보는 너의 동그란 눈이 차갑다.
창밖을 바라본다. 봄비가 내린다. 내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사자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