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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박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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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더 레스토랑    
글쓴이 : 박영화    20-08-21 00:25    조회 : 5,786

인 더 레스토랑

박영화

 

미국에 들어가기 위해 입국심사대를 통과할 때였다.

하우 올드 아 유? 아 유 메리드?”

잔뜩 겁을 먹은 아이가 귀여웠는지 이민국 직원이 장난을 걸었다. 열 살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엄마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 제 이름조차 답하지 못했던 작은 딸은 새 학교에 들어간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외국 친구들과 폭풍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이들이란 참으로 경이로운 존재였다.

 

영어 잘하지? 그렇게 오래 살았으니.”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었다. 모두 내 영어 수준을 동시통역사급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십 년을 넘게 살았으니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그동안 경험에 의하면 시간과 언어의 습득은 비례하지 않았다.

시애틀에 도착한 지 두 달쯤 되었을까. 내 영어의 한계와 그것을 넘어가야 하는 도전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지역 신문에서 샌드위치 식당 보조 구함이라는 광고를 발견하고 단숨에 달려갔다. 한인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주인아줌마를 도와 음식을 포장하고 내어주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서너 시간이니 반찬값은 나올 듯싶었다. 보조역할이라 영어는 그다지 중요치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놓았다. 당시 나는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아무리 혼신의 노력을 다 해도 언어의 장벽을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지인과 대화는커녕 온종일 “Hello”를 혓바닥에 올려놓고 차마 뱉지도 못한 시절이었다. 웅성거리는 그들의 말소리는 마치 수억 광년 떨어진 외계행성의 말처럼 빠르고 낯설었다. 갑작스러운 이주로 미처 공부할 시간도 없었지만, 준비했더라도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샌드위치라면 식빵에 계란을 얹어 설탕을 뿌려 먹는 것밖에 몰랐는데 이들에게는 우리의 밥과 같은 주식이었다. 빵과 치즈의 종류가 수십 가지가 넘어 다 외우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특정 물질에 알레르기를 가진 이들이 많아 이거 빼라, 저거 넣어라는 요청이 많았다. 능숙하게 손님을 대하는 주인아저씨가 위대해 보였다.

출근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피터, 디스 이즈 포 유?”

주문지에 적혀있는 대로 이름을 불렀다.

피터, 유어스 레디?”

나는 다시 피터를 불렀지만 나서는 이가 없었다. 갑자기 팔다리가 저리고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안절부절 어찌해야 할지 몰라 주춤거렸는데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주인아저씨가 다시 피터를 불렀다. 그러자 출입구 쪽에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와 주문한 음식을 받아들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자신이 여간 창피한 것이 아니었다.

미세스 박, 여기 사람들은 또박또박 말하면 오히려 못 알아들어요.”

그는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하지 말고 능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듯 흘리라고 했다. 그의 말은 즉, ‘’, ‘라고 하지 말고 피이러?’라고 하되, ‘에 악센트를 주고 뒤따라오는 음절은 흐리멍덩하게 굴리라는 것이다. 잘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그나마 잡은 일자리를 놓칠 것 같아 불안했다. 말이야 쉽지. 눈만 마주쳐도 입술에 쥐가 날 지경인데 얼굴에 철판을 깔고 굴리라니 생각만 해도 목덜미가 오그라들었다.

 

현지인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이들은 주로 주방에서 허드렛일밖에 얻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무거운 식기를 닦거나 재료를 옮기는 일, 그야말로 몸으로 때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체력도 부실했고 무엇보다 현지 적응이 절실했다. 언젠가는 직접 사업을 하려는 목표가 있었기에 혓바닥 굴리기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날부터 입 운동이 시작되었다. 혀와 입술은 말랑말랑한 조직인데도 영어 한마디 할라치면 깁스를 한 것처럼 빳빳하게 굳었다. 나는 틈만 나면 거울 앞에서 혀를 이리저리 굴려보고 길게 꺼내는 연습을 했다. 아이들 몰래 화장실에 들어가 버터 한 조각을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기도 했다. 운전하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피이러, 세바스챤, 제인, 니콜라스를 불러댔다. 그렇게 1년 동안 부른 이름의 종류가 수백 가지가 넘었다.

다행스럽게도 혓바닥은 점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실수할까 전전긍긍해 툭하면 벌겋게 달아올랐던 양 볼도 침착해졌다. 어설픈 영어는 몇 년 후, 내 가게를 차리고부터 기량을 발휘했다. 혀가 잘 돌아갈수록 말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립 서비스가 늘어났다.

당신 다 알아듣는 거야? 누가 보면 엄청 영어 잘하는 줄 알겠는데?”

유럽 여행을 다녀온 단골과 한참 동안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본 남편이 놀리듯 말했다. 이 수준으로 손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

사실, 나의 영어는 오직 일터에서만 최적화된 생계형이었다. 밥 한 접시 파는 식당에서 정치나 경제를 논할 것도 아니니 레벨이 높을 필요가 없었다. 배고파 찾아온 이들이 선택한 음식이 무엇이며, 그것이 그들의 위장에 만족을 주면 성공 아닌가. 그저 눈치껏 추임새를 넣으면 될 일이었다. 내 귀와 입은 식당 운영에 적절한 수준이었고 스스로 만족했다. 더 바랄 것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성인이 된 후, 건너온 사람들의 언어 문제는 초기 정규교육에 따라 달랐다. 회화를 가르쳐 주는 지역 센터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주로 단과대학 ESL 과정을 이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2~3년 동안 작문과 회화에 대한 기초가 다져지면 최소한의 사회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닐뿐더러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매일 밤 드라마 시리즈를 보는 것이 유일한 공부였다.

엄마 뒤에서 눈물을 글썽이던 작은 딸은 내 발음을 들으면 박장대소했지만, 남편은 손님 앞에서만큼은 최고라며 추켜세웠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놀리기도 한다. 다시 갈 계획이 없으니 버터를 입에 넣을 일도 없겠지만, 돌아간들 혀가 다시 돌아가지도 않을 것 같다.

명품배우 윤여정은 이혼 후, 생계를 짊어져야 하는 극한 상황이 자신의 연기를 거듭나게 했다고 말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절실함 앞에 그녀의 선택지는 하나였다. 나 역시도 두 딸을 교육해야 하는 절박함이 생계형 혓바닥 굴리기라도 가능하게 했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말이 나온 김에 친애하는 나의 지인들에게 한마디 건네자면, 제발 해외여행을 함께 가자거나, 통역해 달라거나, 발음도 못 하는 단어를 들이대지 말기를 바란다. 나의 잉글리쉬는 인 더 레스토랑만 가능하니까.

 

2020. 2 한국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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