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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베리아에 보낸다    
글쓴이 : 박진희    21-08-09 17:26    조회 : 5,017

시베리아에 보낸다

박진희

 1945년 8월 어느 새벽, 그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군복 상의에 폭탄을 매달고 러시아 탱크에 뛰어들어 자폭하기로 한 날이 오늘인가 내일인가. 일본 군복 차림으로 온몸이 찢겨 죽느니 차라리 지금 죽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던 함경도 차호 출신 스무 살 청년, 나의 시아버지 이야기다.

 바로 그날, 중국 관동군을 궤멸시키고 만주 등지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 60만명이 포로가 되어 러시아군에 역류되었다. 거기에 그도 있었고 하얼빈과 베이안을 거쳐 쑨우까지 이동했다. 6일 후에 일본의 항복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가리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부서졌다. 당시 일본군에 징발되어 함께 있던 한국인 청년들도 시베리아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스탈린의 지시로 시베리아를 개척하는 러시아 경제계획에 동원된 전쟁 포로들은 수년간 강제 노역을 해야만 했다. 그는 블라고베센스크에 수용되었고, 영하 40도의 추위는 둘째 치고 무엇보다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는 일은 일상이었다. 말 그대로 뱃가죽이 등가죽에 달라붙은 앙상한 몰골로,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여기서 살아남아 조국으로 돌아가게 해주소서!" 겨울엔 공장에서 양조 중인 보리, 수수등을 몰래 빨대로 빨아먹고, 얼어붙은 음식찌꺼기나 생선뼈마저 먹어 치웠다. 들판에 나와서 노동을 하던 날이면 어쩌다 마주치는 러시아 여인들에게 손짓발짓으로 책을 얻어 러시아어를 배웠다. 그리고 1947년 초, 와자예프카에 수용 당시, 국제 적십자사 명의의 엽서를 한국 가족에게 보내고 1948년 하바롭스크로 이송되었다.

... 시베리아의 광산 저 깊숙한 곳에서 / 의연히 견디어주게 / 참혹한 그대들의 노동도 / 드높은 사색의 노격도 헛되지 않을 것이네 // 불우하지만 지고 높은 애인도 / 어두운 지하에 숨어 있는 희망도 /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나니/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은 오게 될 것이네... 

푸쉬킨 <시베리아에 보낸다> 중 일부 발췌  

 시베리아에서의 3년 반, 춥고 배고프고 밀집된 최악의 공간에서, 간절하게 주님께 생존을 구걸하던 시간이었다. 기도의 응답이었을까. 한국인 포로들의 엽서 중에 유일하게 그에게 답장의 편지가 전달됐다. 그 결과로 당시 조만식 선생이 책임자로 있던 조선민주당 지구당에 몸담은 그의 부친의 도움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1950년 12월에 월남해 부산 피난민 생활을 하던 그는 달덩이 같은 얼굴을 가진 여인을 만났다. 군정장관의 비서 출신으로, 실향의 아픔을 공유한 함경남도 원산 출신의 그 여인과 결혼했다. 그는 미군부대에서의 러시아어 통역 일을 시작으로, 이후 항공 여행사에 35년간 있으며 사장으로 퇴직했다. 

 러시아의 66%, 미국의 1.5배인 광활한 시베리아는 고대 터키어로 '아름다운' 혹은 '잠자는 땅 (Sleeping land)'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아버지에게 시베리아는 결코 아름답지도, 잠자는 듯 평화롭지도 않은 곳이었다. 그는 한국이라는 '자유의 땅'에서도 '잠자는 땅'에서 겪은 트라우마에 빠진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내일은 음식을 못 볼 것처럼 오늘 마구 먹어버리는 습관 때문에 당뇨병과 심장병까지 얻었다. 하지만 시베리아에 있던 경험을 되살려 은퇴 후, 몇 년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동양어 학교와 하바롭스크의 국립공과대학 관광학과에서도 유창한 러시아로 한국어와 일어를 가르칠 수 있었다. 그는 전쟁 포로들의 모임 '시베리아 삭풍회'에서 옛 전우들과 추억과 위로를 나누기도 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여행할 기회가 있었지만 예전의 포로수용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국에 돌아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들어 주신 주님의 축복에 늘 감사하며, 하모니카로 한국 가요 보다는 "머나먼 길"이나 "카츄샤" 등 러시아 민요를 자주 즐기던 시아버지의 모습은 늘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를 통해 처음으로 러시아 노래를 접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주를 청하곤 했다. 아흔을 앞둔 시어머니가 갑자기 뇌색전증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시베리아에서도 흘리지 않았다던 눈물을 이년 반 동안 흘리며 힘겹게 아흔 중반을 맞았다. "에미야, 우리 집안에 와줘서 고맙다. 나의 후손들을 잘 부탁한다." 병상을 지키던 외며느리에게 남긴 마지막 한마디. 나는 고역의 벌판에서 힘겨워 했던 시아버지의 은발을 쓸어내리고 오래전에 자유를 찾은 노병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의 차가워진 손을 잡고 있었다.

 북녘 땅이 가까운 곳에 위치한 그의 무덤은 그의 아내 곁이여도 춥고 쓸쓸해 보였다. 흐느끼는 나의 어깨를, 한줄기 바람이 다독이듯 스치며 아득히 날아갔다.

<퓨전수필 2021, 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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