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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찌기미    
글쓴이 : 이기식    21-08-29 05:46    조회 : 5,195


 찌기미

이기식(don320@naver.com) 

《한국산문 2021.9 v185》

 

어렸을 적 별명이 ‘찌기미’였다. 동네 어른들은 지나가는 나를 보고 ‘어이, 찌기미, 어디 가?’ 라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을 거신다. “저 녀석 크면 술 좀 먹을 거야” 동네 녀석들도 덩달아 나를 그렇게 불렀다.

한동네에 사는 친구네 집이 술도가였다. 그 집에 갈 때마다 물에 부푼 떡 같은 것을 친구와 같이 부엌에서 먹었다. 약간 시큼한 맛이지만 항상 배고픈 시절이라 맛있게 먹었다. 밖에 나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얼굴이 뜨겁기도 하고 기분도 좀 이상해졌으나 왜 그런지 잘 몰랐다. 어른들은 다 아셨다. 꼬마들이 누룩과 고두밥으로 술을 거르고 남은 찌꺼기인 찌기미를 먹었다는 것을. 우리 동네에서는 지게미, 술지게미를 찌기미라고 했다. 충청도 사투리인 것 같다. 왜 남들이 그렇게 놀리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자 더 먹지 않게 되었다. 그 별명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다시 이 별명이 살아났다. 이번엔 남이 붙여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밝히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 나이 때의 영웅 심리였음이 틀림없다. 이 나이에 나는 이미 술도 마셔봤고, 담배도 피울 줄 알고, 또 뭐 뭐도 다 해봤다는 허세를 부릴 때가 종종 있다. ‘술찌기미부터 시작한 나야!’라고 으스대면서부터 다시 찌기미로 귀환했다. 쏘주, 빼갈을 어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숨어서 마실 때였다. 즐겁고 스릴도 있었다. 졸업이 가까워져 오면 서로를 추억하기 위해 서로 앙케트를 교환했다. ‘취미’를 묻는 말에 ‘술 마시는 것’이라고 대답한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후인, 70년대 후반은 우리나라 경기가 한창 좋을 때였다. 회사에서의 위치나 직책 탓으로 술자리가 자주 생긴다. 그런 생활에 점차 익숙해지자, 술자리가 없는 날이 오히려 불안할 정도였다.

만만한 거래처에 모르는 척 전화를 건다. 예상대로 감칠 맛 나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 형님. 오늘 금요일인데 나오시죠. 아주 물 좋은 데를 찾아 놨습니다”

당나라 주선(酒仙) 이 태백은 하늘에 있는 달을 술잔에 넣고 마셨지만, 나는 룸살롱에서 분홍색 샨데리아가 떠 있는 술잔을 들고 토 할 때까지 마신다. “갔구만, 갔어!. 공짜 술이라고 마셔 대드만...”하고 저희들 끼리 토하고 있는 내 등을 두드리면서 중얼거리는 소릴 들을 때도 있었다.

술이 정말 맛있다고 느낀 것은 오히려 퇴직 후였다. 매일 출퇴근 하던 생활을 끝내고 집에만 있다가 보니 할 일이 없는,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새벽까지 잠을 설칠 때가 많아졌다. 한잔하고 잠을 자면 되겠다 싶어, 새벽에 집 근처의 24시간 해장국집에 가보았다. 새벽인데도 소주를 반주로 시켜 한 잔씩 홀짝홀짝 맛있게 마시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어쩔까 싶어 나도 술을 시키고 빈속에 한 잔 마셔보았다. 목으로 넘어가는 첫 잔의 맛이란.

새벽 술맛까지 안건 좋았는데, 일 년쯤 지나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니 고혈압, 심장질환, 만성 신장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무모하게 마신 술 경력이 40 여년.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까지도 뚜렷한 삶의 이유나 목적도 없이 그저 남의 눈치를 보며 소인배처럼 살아 온 것이 큰 원인이다. 남이 돈 버는 것을 보면 돈 벌야 할 것 같았고, 직위가 올라가면 나도 올라가야 한다는, 그것도 되도록 쉽고 편한 방법만 궁리했다. 그러다 보면 뭔가 공허하고 불안하여 항상 다시 술에 의지하곤 했다.

술을 영어로 ‘스피릿(spirits)’이라고도 한다. 정신이나 영혼을 나타내는 ‘spirit’의 복수다. 그렇게 술에 의지하면서도 왜 정신이나 영혼을 통하여 나를 찾아볼 생각은 털끝만큼도 안 했는지. 내 정신세계는 그 사이 폐광(廢鑛)처럼 삭막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술도가에서는 술을 채반으로 거른다. 거르고 남는 것은 쓸모없는 찌기미다. 광산에 가면 그와 반대다. 채반에 남는 것이 쓸모있는 금이나 은이다. 늦었더라도 내 광산을 다시 움직일 때다. 그리고 다른 찌기미가 되어야겠다.

 

‘나는 찌기미다’

‘광산에서는, 찌기미가 금이다’

‘고로 나는 금이다’

 

[2021/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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