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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차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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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    
글쓴이 : 차성기    21-09-14 09:14    조회 : 4,687

차성기

 고속버스터미널 상가에 가기 위해 서둘러 나섰다. 희뿌연 하늘 아래 건너편 백화점 유리창이 볕뉘에 순간 반짝였다. 거리두기가 강화되었어도 거리엔 사람이 붐빈다. 뿌연 허공에 하얀 얼굴 복면이 여기저기 떠다닌다. 검정도 있고 예쁜 무늬도 가끔은 눈에 들어온다.

 아내는 뒤늦게 백화점에 성탄 트리를 찾아 나섰으나 때를 지나서인지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매년 연말이면 밀라노에 사는 딸아이를 만나려니 트리를 장만할 겨를이 없었다. 올해는 이웃에 사는 손녀가 커서 부쩍 트리를 찾았다. 귀여운 손녀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어 주려는 할미의 자애로운 마음이 철 지났지만,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트리를 찾아 나서게 했다. 넓은 터미널상가를 휘저어 뒤진 끝에 다리가 아플 무렵에야 간신히 찾았다. 호들갑스러운 주인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두 개 남은 커다란 트리를 모두 주문했다. 저녁 늦게야 도착한 트리를 거실에 들여놓으니 아연 집안 분위기가 화려해진다. 조금 더 큰 트리는 가까이 사는 아들네 집에 먼저 보냈다. 해맑은 손녀의 환한 얼굴을 떠올리며 서둘러 확인하고픈 아내의 동동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가볍다.

 모듬살이 살다 보면 때를 놓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친구 상가에 차일피일 미루다 발인 날 뒤늦은 문상으로 위로하느라 머쓱해질 때도 있다. 경사는 놓쳐도 나중 회복이 쉬운데 애사는 때를 놓치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때맞추어 승진해야 보기도 좋고, 축하해 주는 데 부담이 없다. 하지만 때늦을 때 진급은 축하해 주려는 단어 선택에 애로를 겪기도 해서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돌아서면 삼라만상이 모두 나름 때를 가지고 있다. 꽃도 때맞추어 봉오리를 열고 피워야 제격인데 철 지나면 아무래도 사람들의 관심이 덜하다. 그렇다 해도 이따금 북새바람 늦겨울 눈보라에 개나리가 핀다거나, 초겨울 서릿발에 뜬금없는 호박꽃은 안타까움이 더한다. 나름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인데 지구온난화로 생체시계 부조화가 더 많아 질듯하다. 한편 설중매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어 좋긴 하다.

 수년 전 아내, 딸아이와 함께 하와이에 가려던 씁쓸한 기억이 다가온다. 모처럼 딸아이의 여름휴가에 맞추어 두어 달 전부터 부푼 기대와 함께 준비해왔다. 막상 보름도 안 남았는데 아내의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자세한 이유는 모른 채 모처럼 기회가 무산되었다. 때가 안 맞았는지 그 후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곳은 돌아보았건만 아직도 하와이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요즘 백세시대를 드높이 외쳐보지만, 공사 수주를 위해 입찰장에 가보면 젊은이들이 주 무대를 차지한다. 경험이 많고 실적이 풍부하면 수주에 유리한 점은 있다. 하지만 수주한 다음 대면으로 업무를 협의하다 보면 상대방이 마음에 부담을 느껴 꺼리게 된다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발표회에선 좋은 평을 받아도 나중 회신에는 다음 기회를 기대한다는 문구를 보면 냉정한 현실에 씁쓸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이래저래 때가 지나간다. 취업시장도 마찬가지여서 드러내 놓고 말하진 않지만 얼마 전에 갓 은퇴한 후배의 이야기가 실감 나게 다가온다. 나이가 많으면 면접관 눈빛이 달라진다고. 하긴 요즘 같은 취업 한파에는 젊은이도 어렵다는데. 걱정스러운 건 이들 젊은이가 제때 취업을 못 해 사회에 초기 적응할 때를 놓칠 수 있다는 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때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가 보다. 내가 생각하는 때와 상대방이 느끼는 때가 꼭 일치하진 않는다. 이를테면 나는 투자에 나설 때는 아니라고 보는데 친구는 지금 나서야 한다는 식이다. 그래선가 뉴스에 떠들썩한 주린이 등 재테크 열풍에도 끼이지 못한 게 아쉽긴 하다. 하긴 이렇게 저마다 보는 시각이 달라야 경제활동이 건강하게 유지된다고 에둘러 강변해본다.

 내게도 때가 있었다. 제 눈에 안경이라지만 단아한 아내를 만나 가슴설렜다. 수많은 동기생 중 먼저 과장으로 승진해서 부러움을 사던 때도 있었다. 요즘은 돌봄으로 어린이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노는 해맑은 손주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아가들 아빠에겐 내가 함께해준 기억이 많지 않았음을 깨닫곤 한다. 아내는 훨씬 많은 추억이 있나 본데 나는 어쩐지 따듯함을 공유한 기억이 희미할 뿐이다. 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대 후반, 밤늦게 돌아오면 포근하게 잠자는 아가의 천사 같은 얼굴을 흘낏 보는 게 유일한 기쁨이었다. 중화학공업 육성시책에 이바지한다는 명분으로 휴일도 마다하지 않고 회사에 나가던 게 우리 세대의 자랑스럽고도 슬픈 기억이다. 사랑을 쏟아 보지 못하고 때를 놓친 거다.

 운때가 맞다, 안 맞다 하는 이야기도 자주 회자하고 있다. 운은 때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닐까. 매스컴에서 해난사고 전날 감기로 배를 타지 못해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부터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직전 연결교통편을 놓치는 바람에 비극 현장에서 비껴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숱한 사례로 들려 온다.

 세상 모든 사람은 때가 있다. 그럼 때가 사람을 만나는지 사람이 때에 맞춰야 하는지 아니면 서로 맞아야 하는지. 그러니 때를 판단하는 기준이 더욱 중요하리라. 이른 나이에 노후 대비랍시고 은마아파트를 팔고(나중 열 배 오름) 동대문 상가를 산 건(열 배 내림) 평생의 실수였다. 일본에 자주 가면서 단카이세대*에 해당한다고 나의 때를 잘못 판단한 결과다. 지금까지 아내에 큰소리 못 치는 이유다.

 

*일본의 전후세대(베이비붐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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