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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달사지 <선수필> 2019, 겨울호 발표    
글쓴이 : 최선자    21-09-22 02:52    조회 : 1,882
                                        고달사지
                                                               최선자

  환청인가. 은은한 범종 소리가 들려온다. 이천 산수유 마을에서 꽃향기에 취해 천방지축 들떠 있던 마음이 놀라 다소곳해진다. 목을 빼고 휘휘 둘러봐도 황량한 벌판이다. 실꼬리를 아직 거두지 않은 겨울이 찬바람 보따리를 풀어 놓고 간다. 폐사지가 더 쓸쓸해지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지다.
  고달사는 고려 역대 왕들의 비호를 받으며 번창했다. 사방 삼십 리가 절터였다고 한다. 절을 드나들던 스님들이 신발을 털 때 떨어진 흙이 산등성이처럼 쌓였다는 말이 있다. 고달사의 잃어버린 명성을 대변하듯 폐사지로 드는 길이 좁다. 일주문은 어디쯤이었을까? 평평해진 풀밭과 돌 부스러기에서 가늠할 수 없다. 고달사의 빈 마음을 훔쳐보는 것 같아서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찬바람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석조대좌가 나를 맞아준다. 폐가의 대문처럼 그 모습이 처량하다. 중생들의 염원을 담았을 불상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어디선가 별을 보며 고향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간다. 원종대사탑비귀부와 이수가 있다. 수많은 날의 고독이 톱날이 되었는지 비신은 무너져버리고 없다. 
  발걸음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한때 나라 안 제일의 대사찰이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춧돌 사이에 파릇파릇한 쑥들이 다보록하다. 그러고 보니 절터 곳곳에 쑥이 지천이다. 가꾸지 못한 밭은 쑥대밭이 된다고 했다. 어디 밭뿐이겠는가. 절 마당에 낙엽 하나 구르지 않도록 손질하며 스님들이 기거했을 이곳도 그러했고, 마을에 사는 중생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리라. 나는 땅에 이마를 대고 목 놓아 울고 싶어졌다. 
  지난가을, 남편이 내 곁을 떠나버린 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깨에 떨어진 죽비 소리에 마음을 가다듬고 선정에 들었을 스님들처럼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억울했는지 모른다. 말없이 가버린 그가 원망스러웠고 지나온 날들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의 잘못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다 내 잘못 같았다. 그가 떠나버린 일도 복이 없는 내 탓인 듯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쑥 뿌리처럼 급속도로 뻗어 나갔다. 가슴을 열고 용서하지 않은 동안 힘들었을 그를 생각하며 날마다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번뇌에 사로잡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마음은 점점 쑥대밭이 되어갔다. 다행히 내 곁에는 자식 셋이 있었다. 부모에게 자식만 한 죽비가 또 있을까. 쑥대밭이 되어가는 마음이 자식들을 생각하면 몹시 쓰라렸다. 부친상에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내색하지 않았다.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함께 여행을 가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살펴주었다.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들이 가장 힘들었을 때 감싸주지 못하고 짐이 됐다고 생각하자 한없이 미안했다. 아이들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이 쑥대밭이 되지 않게 가꾸리라 생각하고 일어섰다. 가슴이 절터처럼 황량하지만 이제 더는 쑥 뿌리 같은 마음을 키우지 않는다.
  아련히 목탁 소리가 들린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일행은 저 멀리 앞서가고 있다. 어디선가 새소리도 들려온다. 새소리를 따라 혼자서 천천히 올라간다.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석탑이 있다. 원종대사 탑이다. 귀부의 거북이가 특이하게 몸은 앞으로 머리는 오른쪽 옆을 향하고 있다. 무슨 뜻인가. 속세를 외면한다는 것인가. 선을 배우고 도를 깨달았다는 원종대사는 속세를 어떻게 보았을까? 탑에서 폐사지의 깊은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은 수십 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생을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올라가라는 스님의 법문처럼 보인다. 시끄럽게 일어서던 욕심이 고개를 숙인다. 
  고달사지는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 안은 혜목산 자락에 있다. 혜목산은 남한강이 흘러가는 여주의 북쪽에 위치한다. 스님들은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 군주들이 부처님과 같은 자비로 백성들을 안고 선정을 베풀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고달사는 나라 안 최고의 수행 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다. 격에 걸맞게 원종대사 같은 큰 스님이 머물기도 했다. 선방 댓돌에는 늘 스님들의 신발이 졸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몇몇 석조 유물들만 쓸쓸히 옛 명성을 지키고 있다. 
  고달사가 어떤 이유로 허물렸는지 모른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전쟁의 폐해였을 수 있고, 조선 불교 천대와 박해 탓일 수도 있다. 흐르는 세월은 아무도 막을 수 없듯이 시대의 변화도 막을 수 없다. 고달사는 만개한 꽃이었다가 지는 꽃의 운명을 밟았다. 세상에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한 생이 나고 이우는 건 어쩔 수 없다. 
  상처는 가까운 사람에게 받았을 때 더 쓰라리고 아픈 법이다. 멀고도 아득한 길을 걷는 동안 그는 보이지 않았다. 달빛도 없는 밤길을 혼자서 터벅터벅 걸었다. 가끔 담벼락에 기대고 싶었지만, 무너질 것 같아서 차마 기댈 수 없었다. 막다른 골목이 아니기만 빌었다. 이정표 없는 거리를 반딧불을 등대 삼아 걸어온 긴 여정이었다. 
  그는 항상 내 곁에 있었지만 멀리 있었다. 늘 비바람을 몰고 오는 태풍이었다. 발자국마다 떨어졌던 사랑의 조각들을 주워 모아 퍼즐처럼 맞추자 사랑이 속삭인다. 때늦은 마음은 그에게 가졌던 원망과 미움을 다 떠나보냈다. 애달픈 마음도 그리움도 허공을 떠돌고 있다. 상처뿐인 빈 가슴에 모래바람이 분다.
  아련히 들리던 목탁 소리가 기계의 음계를 타고 사라진다. 사지에서는 문화재 발굴이 한창이다. 여기저기 유물들이 묻혔을 만한 곳에 말뚝을 박고 줄을 쳐놓았다. 저 줄의 안과 밖은 천년의 세월보다 더 먼 거리 같다. 사랑으로 벅찬 가슴과 메마른 가슴의 거리다. 천년 전 장인들의 작품들이 햇빛 속으로 당당히 걸어 나오기를 기대한다.
  신뢰라는 단단한 믿음이 없는 동아줄로 꽁꽁 묶인 사랑은 향기가 없다. 때로 그 허허로운 사랑에 목이 졸린다. 사랑만으로도 짧았을 세월. 그는 안타깝게도 사랑의 시체를 껴안고 몸부림쳤다. 결국, 쑥대밭이 되어버린 가슴을 안고 떠났다. 때늦은 연민에 한없이 가슴이 아리다. 
  솔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이 사찰 처마에 걸린 풍경을 만진다. 풍경 소리가 산수유 꽃나무에 가 앉는다.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꽃을 피운 산수유나무처럼 고달사지에도 부처님의 자비가 꽃피어 은은하게 봄이 왔다. 뒤돌아서는 우리를 향해 합장하는 스님의 환영이 보인다. 빈 절터에 내 묵은 슬픔을 가만히 부려 놓고 온 날이다. 

                                           <선수필>  2019,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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