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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NO-3( 동인지 『목요일 오후 』6호)    
글쓴이 : 김주선    22-06-19 12:42    조회 : 14,002

노트- NO. 3

김주선

 

그동안 강산이 변해도 네 번은 변했을 텐데, 기억도 가뭇한 노트가 택배로 왔다. 좀 벌레가 오줌을 지린 듯 얼룩이 많은 사륙배판 크기의 대학 노트였다. 나의 청춘에 묻은 얼룩인 양 창피해서 얼른 감추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났을까. 모처럼 마음먹고 책상에 앉아 자물쇠가 걸린 일기장을 열듯 내 청춘 노트를 다시 펼쳤다.


서러운 장구 소리 / 육신의 뼈마디가 결리는 / 애달픈 몸짓 // 피의 아픔이 터져 / 넋 잃은 수천 개의 눈동자가 / 집시의 얼굴을 뒤진다 // 타오르는 젊음의 / 흩어진 머리채 // 휘젓는 한삼 속에 / 칼을 높이 올리고 / 바꿀 수 없는 양심을 찌른다 // 하늘이 터지는 / 박수갈채 // 한 사발의 냉수를 마시고 / 또 얼굴을 지운다 //

- 80년 학창 시절에 쓴 졸시 탈춤


첫 페이지에는 각시 탈 형상의 삽화가 그려져 있고 탈춤이라는 시가 쓰여있었다. 19807월이라는 날짜와 낙관까지 새겨넣은 걸 보니 아마도 자필 문집인 모양이었다. 78년부터 80년까지 중·고등학교 시절에 쓴 시, 산문, 그리고 영화 감상문이나 독후감 같은 잡기(雜記)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기억의 골편들이 퍼즐 조각처럼 하나하나 짜 맞추어지는 기분이랄까. 읽으면 읽을수록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두에 생일 선물이라고 밝힌 것을 보니 좋아하는 마음을 선물로 보냈나 싶어 앙큼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글을 다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노트의 기록이 어느 소녀의 성장통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목차에서 유추되는 키워드는 염세, (), 방종 같은 불안정한 단어였다. 오락가락하는 감정과 해 질 녘의 쓸쓸함이 많이 느껴졌다.

택배를 보내온 이는 내 고향 친구 C였다.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적잖이 당황했었다. 되돌려준다길래 선물로 준 것이면 너의 것인데 네가 알아서 버려도 되지 않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이사 다니면서 여러 번 버릴까 말까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내가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생각났다며 귀한 자료로 쓰일 것이니 일단 받아보라고 했다. 친구는 네 엄마 얘기가 많아.”라며 내가 덥석 물 만한 미끼를 던졌다. 갈고리처럼 그 말이 종일 목구멍에 걸려 친구에게 집 주소를 적어 보낸 것이다.

내가 너 좋아했니? 세월의 강을 건너 내게 되돌아온 노트 한 권에 설렌다기보다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어서 내가 물었다. 아니라고 그가 말했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이런 걸 주다니,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졸업 앨범 독사진도 오려낼 만큼 청소년기의 기억을 도려내고 싶어 했던 나에게 그 시절의 생생한 증거물을 보내온 친구가 처음에는 야속했다. 기억이 안 난다고 발뺌하다가 글을 보니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게 소름이 돋았다.


우리 부모님은 주말부부였다. 원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조카, 그러니까 막내딸인 나와 동갑인 장손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주말부부가 되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장손인 조카는 떨어지고 나는 합격했다. 기뻐야 할 합격자 발표 날의 분위기는 초상집처럼 침통했다. 조카는 재수하는 대신 후기 고등학교인 미션 스쿨에 입학하였다. 귀한 장손자를 하숙집에 보내는 대신 할머니인 엄마가 보살피러 따라나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큰오빠 내외가 나를 보살피게 되었다. 큰오빠의 아들인 조카는 말썽을 많이 피웠다. 그럴 적마다 속상해진 오빠는 엄마를 탓했다. 엄마가 제대로 건사 못 해 제 자식이 어긋난 줄 아는지 큰소리를 냈다. 그런 오빠가 괘씸하다고 생각한 아버지까지 나서자 집안에 분란이 잦았다.

어른들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지만 나는 묵묵히 공부만 했다.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중간고사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집에 온 조카 녀석은 쌀 한 가마니를 팔아야 살 수 있는 브랜드 운동화를 사달라고 생떼를 썼다. 현금이 돌지 않는 농번기라 어르고 달랬더니 놈이 집을 뛰쳐나갔다. 그 난리 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루에 앉아 시험공부 중이던 막냇동생인 내가 미웠던지 오빠는 내 책가방을 아궁이에 던져버렸다. 큰 불씨가 꺼지고 열기만 남은 잔불이었지만, 가방이 쪼그라들고 삐져나온 책이 그슬렸다. 그 사건 이후로 오랜 세월 집안의 대소사에 불참할 정도로 나는 오빠와 틀어진 사이로 지냈다.

타다가 만 공책처럼 얼룩이 진 삶을 지고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인생을 저주한 쇼펜하우어 같은 옛 철학자의 책을 탐독하며 엄마를 조카에게 빼앗긴 서러운 밤을 노트에 끄적거렸다. 그 무렵에 내가 쓰던 총 세 권의 노트가 있었다. 작문을 지도하던 교사가 나의 산문집이 보고 싶다길래 한 권을 건넸는데 깜빡 잊었는지 되돌려주지 않고 전근 갔다. 또 한 권은 아궁이에서 황망하게 소실되었고 나머지 한 권을 그 친구에게 생일 선물이라며 주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학창 시절 내게 유일하게 위로가 되어준 친구에게 전하는 감사의 표시였나 보다.

어쨌든 그 시절에 쓴 글이야말로 박박 찢어버리고 싶은 것 중의 하나였는데, 제법 보존이 잘된 유물이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글을 다 읽고 나니 버리지 않고 보관해 준 친구가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 남은 장손은 할아버지가 되어 인생을 관조하는 나이가 되었고, 올해로 여든다섯 살이 된 오빠는 돌아가실 무렵의 아버지처럼 늙고 병들어 있다. 돈독한 우애를 자랑할 정도는 아니어도 웃으며 옛말하는 형제간인지라 그 또한 따스한 추억이 되었다.

결혼을 앞두고 시한폭탄이 될지도 모르는 일기장을 스스로 검열해 태운 적이 있었다. 헤어진 연인의 사진이나 연애편지도 아닌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만큼 아까운 게 없다. 별것 아니어도 친정집 다락에 두는 것조차 말렸던 엄마를 생각하면 불살라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젊은 날, 상처 부위를 호호 불어가며 다친 마음을 치유해 주었던 것은 잡기였다. 신변의 이야기를 쓰면서 상처가 아무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비록 두 권은 소실되거나 분실되었지만, 마지막 노트 한 권은 남았다. 이 노트가 내 수필 인생에 어떻게 쓰일지는 모르겠다. 집안의 대들보라고 여겨진 장조카의 그늘에 묻혀 당연하게 포기했던 어린 날의 꿈과 마주할 때면 나는 매번 울었다. 우는 나를 달래고 다독이던 수많은 위로의 인사가 시가 되고 산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친구에게 선물로 주지 않았더라면 영영 묻힐 뻔한 노트가 지금, 바탕화면 새 이름 폴더 안에서 날개돋이를 하는 중인가 보다. 어깻죽지가 가렵다.

 

   동인지 『목요일 오후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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