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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    
글쓴이 : 봉혜선    22-08-30 15:58    조회 : 3,712

뿌리

 

봉혜선

 

 뿌리 내릴 수 있는 공간이 없다. 흙도 없다. 허공이다. 양분으로 삼을 만한 것이라곤 없는 뿌리는 하얗게 질렸다. 빽빽이 들어차 틈이 없는 자루 속에서 양파 뿌리가 온몸을 감싸며 몸통 방향으로 뻗었다.

 어디엔가 있을 양분을 찾으며 뻗는 뿌리 길이만큼 싹이 오른다. 양파는 얇은 껍질 속 제 몸을 빨아들여 싹을 올렸다. 양파 속을 열어보니 몸속이 비었고 썩는 듯 말라가고 있다. 제 몸을 내주어서라도 싹을 피워야 하는 것이 생명 가진 것들의 숙명인가보다. 싹이 난 양파를 하나씩 물을 채운 유리병에 꽂아두었다. 끝이 노랗던 싹에 물이 올라 생기가 돈다. 식물이 가지를 뻗거나 땅위로 몸체를 밀어 올리려면 그만큼의 뿌리가 뻗는다는 사실을 수경재배에서 확인한다.

 매년 양파김치가 무안에서 올라온다. 김치가 된 양파는 장에서나 마트에서 봐온 알이 굵은 양파와 달리 알이 작은 대신 잎 부분이 대파만큼 풍성하다. 외국 만화영화에서 본 잎 달린 홍당무처럼 모양이 신기해 주말 농장에 양파를 심었다. 묻힌 부분 쪽이 보이지 않을 때 잎은 대파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익힌 양파처럼 부드럽고 생으로 먹거나 곰삭아도 맛있는 양파김치를 재현하려면 수확해야 할 때다. 알이 굵은 양파로도 자라려나, 좀 더 지켜보기로 한다. 잎이 하늘로 치뻗거나 옆으로 쓰러진 채여도 뿌리는 땅을 놓치지 않는다. 무게에 짓눌린 뿌리가 땅 속에서 끌려나와 탈색된 채로도 몸체 크기를 불린다.

 싹이나 높이 솟은 나무보다 뿌리에 관심을 둔 것은 우연이다. 등산로에서 땅위로 울뚝불뚝 팔에 솟은 핏줄만큼 도드라진 뿌리에 걸려 넘어져 주저앉은 적이 있다. 뿌리는 차라리 나를 밟지 가지와 잎을 건드리지 말라고 발을 걸었다. 나무와 풀은 위로 뻗는 만큼의 뿌리를 내는가 보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다른 나무뿌리에 걸리고 돌을 들먹이느라 제 길을 잃어가면서, 때로 본디 자리인 땅 속을 벗어나 땅위로 몸을 치뻗으며 양분을 올린다. 어찌 나무에 한정되는 것이랴.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 입으로 늘 뇌고 있는 어구였지만 더 나은 자손을 만들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은 막연하기만 했다. 이론과 현실과의 차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어느 결에 엄마가 되어있는 내 모습에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으니. 세대를 잇는 일이 생명 가진 것들의 본능이자 숭고한 자세가 아니던가. 뿌리만 든든하다면 새 잎은 나듯 엄마 된 자리의 정성이 아이를 올곧은 길로 이끌 수 있지 않을까.

 바위틈에서 솟은 듯한 풀은 어찌나 여린지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교육1번지인 강남으로 이사를 하자고 어렵사리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 남편은 일상이 그랬듯 또 간단히 무시했다.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일반적인 현상이 아닐지 모르겠다. 교육 장소를 옮겨야 하는 이유를 편지지 앞뒤로 3장에 써서 남편에게 건넸다. 서울은, 한국은, 세상은 그리 좁지 않다고 큰 아이를 설득해 강남에 있는 고등학교에 보냈다.

 반장이 된 아이 입에서 1학년이 지나자 다니기 힘들다는 말이 나왔다. 체육시간에 땀이 너무 나서 목욕탕에 갔는데 나와서는 땀에 전 옷을 다시 입어야 했다고 했다. 이끄는 대로 새벽부터 한 시간 넘게 전철에 시달리면서도 한마디 불평하지 않던 아이의 말에 답이 필요했다. 2학년이 되기 전 냄비 몇 개와 아이의 책상을 들고 강남 행을 결행했다남은 텅 빈 집에 돌아올 남편을 위해 집단속에 더 신경이 쓰였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남편은 큰 아이를 명문대학에 보내지 못하면 다시 들어오지 말라는 말로 두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아이 둘과 2년간 강남에서 단칸 셋방살이를 했다. 가출을 묵인한 남편은 옮길 데를 알아봐 주고는 생활비를 한 푼도 더 내놓지 않았다. 교육을 하려고 같은 서울에서 떠나왔으니 아이의 학원비를 줄일 수는 없었으므로 월세 얻은 방값을 벌어야 하는 당면 과제에 처했다.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을 줄이지도 말아야 했다. 엉겁결에 잘 다니던 초등학교를 옮긴 7년 터울인 막내가 학교에 간 후부터 하교 전까지의 시간에 할 수 있는 일, 주말에는 집에 돌아가 남편의 주중 생활을 준비해 놓을 수 있는 시간이 나는 일이어야 했다방세 외의 돈은 엄두내지 않았다비록 양 갈래로 갈라졌으나 한쪽만으로는 어디로든 뻗어나가려는 가지를 온전하게 지탱하지 못하리라는 염려에 억눌렸다. 아이들의 앞날이 좋아질 수 있다면 치러야 할 대가가 나여야 했다

 원하는 시간 동안 원하는 만큼의 급료를 제공하는 데는 거의 육체노동을 하는 곳뿐이었다. 처음에는 밤 11시부터 다음 날 7시까지 하는 음식점 야간 주방 일을, 다음에는 학교 급식실 조리 일을 찾을 수 있었다노동에 인이 박힌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 하는 일은 서툴고 거칠어 미움을 받았다 거대 도시 강남을 먹이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존재도 따로 있었다

 막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과학 실험 중 손가락에 피가 났다고 연락을 내게 했는데, 받지 못하자 남편에게 소식이 갔다. 수습하고 돌아오며 남편이 내가 일하는 데로 왔다.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긴 비닐 앞치마 차림으로 나가니 평소 같았으면 크게 혼냈을 남편이 막내 소식을 간단히 전해 주었다. 다 처리했으니 걱정마라, 큰일은 아니더라, 몸조심해라 등등 낯선 위로의 말이었다. 잠깐 놀란 가슴이 진정된 이유는 막내의 상처가 작다는 소식이었는지 남편의 내 모습을 본 걱정 섞인 표정 때문이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간절한 속내는 건강과 맞바꾸어졌다. 난생처음 접하는 막노동에 집에 오면 드러눕기가 일상이 되었고 강철처럼 단단하다고 자부했던 몸이 무너져갔다. 중노동을 하고 앓으면서 몸이 망가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앞날이 좋아질 수 있다면 치러야 할 대가가 나여야 했다. 아이들이 그만큼 잘 자라기 때문이라고 자위했다.

 희성이어서 자랄 때 받던 놀림을 생각하고 친정 조카들과 만나면 동병상련을 나누었다. “우리가 의기소침해서야 되겠어. 우리가 ()’인데, 우릴 잡으면 봉() 잡은 건데 그런 것도 모르고 말이야.” 하며 기운을 북돋웠다. 스스로에게 건 주문이기도 했던 이 말을 설 자리가 없던 때에 더 크게 말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외할아버지가 교육자니까 너희들도 모범을 보이며 자라야 한다.’고 하니 엄마는 아빠가 교육자지만 우리는 아니라고 했을 때 해준 말이기도 하다. 뿌리 있는 자식, 뿌리를 아는 자손으로 커야 한다고 답해주었다.

 사람 사는 일 거기서 거기다라거나 동서양이 비슷하다거나 옛말 틀린 것 없다고도 한다. 옛날로 돌아가자는 열풍이 르네상스니 복고니 레트로 라는 말로 불현듯 살아나곤 한다. 뿌리만 있다면 음지에서도 새 잎은 난다. 내가 썩는 만큼 아이들이 잘 자란다는 보장만 있다면 선 자리에서 썩으며 늙어져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잎 부분을 뭉텅 잘린 거리의 가로수가 눈에 밟힌다. 모양이나 키를 맞춘다고 자라나온 새 잎 부분을 다듬어 놓은 조경수도 보인다.

 몸이 축나는 줄도 모르는 채 껍질로 감추고 싹을 틔운 양파의 길고 뽀얀 뿌리가 길쭉한 유리컵 안에서 굵어지고 있다. 뿌리란 무엇일까. 밭에 옮겨 심으면 어두운 흙으로 숨어 씨를 만들리라.

 

봉혜선 ajbongs60318@hanmail.net

2019 <<한국산문>>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선수필 2022 가을>>  <<선수필 20주년 기념선집, 선수필 현대수필 105인선집 >>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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