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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새들 (재미 수필 23)    
글쓴이 : 국화리    24-09-21 13:42    조회 : 2,098



                                                                                     벌새들

                                                                                                                                                     국화리

   딸 집 현관 앞에는 대형 화분이 몇 개 있다. 그곳에는 빨강과 노란색 무궁화꽃이 거의 사철 핀다.
 가끔 그 꽃 주위로 날개를 떨며 서 있는 벌새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주로 꽃의 꿀을 빨아 먹거나 거미 같은 작은 벌레를 잡아먹는다.
 딸 윤정은 그 새의 날갯짓을 좋아했다. 그녀는 집 뒤뜰 꽃가지에도 오는 벌새를 자기가 보고 싶어 찾아온다고 했다가 또 행운을 가져온다며 벌새처럼 웃었다.
손가락에 검은 털을 두른 것 같은 새가 앵앵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벌새>가 생각났다.
 팔팔 떨림 같은 사춘기 벌새 시절. 내 딸들에게도 주인공 은희 목에 생겼던 혹 같은 시절이 있어서 때때로 내 가슴이 저린다.
<벌새>는 2018년도에 김보라 감독이 각본을 쓰고 만든 저예산 독립영화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60여 차례 수상을 하였다. 영화는 사춘기 은희의 일렁이는 일상의 파도를 그렸다. 영화의 시점은 1994년 서울의 성수대교 참사가 일어났던 전후를 배경으로 하였다. 그해는 로스앤젤레스의 놀스리지 지진(6.7도)의 참사가 있어 우울한 기운이 두 도시에 가득했던 때였다.

   우리 가족은 그보다 수년 전에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산타모니카로 이주해서 살았다. 이곳은 비치가 가까워 공기가 맑고 주거환경이 좋은 곳이었다. 먼저 이곳에
정착한 남편은 위기를 넘기며 집 근처 바닷가에 한방병원을 열어 성업 중이었다.
 그는 집 뒤에 아파트가 5유닛이 있고 앞채는 방 두 개가 있는 건물에 살고 있었다.우리 가족은 앞채의 작은 집에 살게 되었지만, 그때는 아이들이 어려서 별문제가 없었다.
나는 건물주로 뿌듯했고 내 아이들은 사립학교 부럽지 않은 초중등학교에 다녔다.

 수년 후 아이들 학년이 올라가면서 변화가 생겼다. 친구들 집에 놀러 다니면서 그들은 바비큐 파티하는 넓은 뒷마당을 가진 저택을 비교했다. 내 아이들도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을 것이다. 한날은 딸의 친구와 엄마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나는 그들의 방문으로 인사만 나누고 당황해서 서 있기만 했다. 귀부인은 집안을 둘러보고 딸 방을 보더니 딸을 데리고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날 아이들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도 그 금발 엄마의 표정이 떠나지 않아 질렸던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우아한 카우치와 흔들의자가 있는 거실이 아니라 한약방에서 약 냄새가 풍겼고 큰 테이블 위에는 약 종이와 봉투, 저울 한쪽에는 남편이 쓰는 붓글씨의 먹과 벼루 화선지가 널려있는 시골 한약방 같았다.
미국 부인의 눈엔 아이들이 놀 공간이 없는 아세안의 너절한 집안 분위기였을 것이다.
 “딸아, 네가 놀 방이 좁으니 우리 집으로 친구 윤정이를 데리고 와서 놀아라.”
 그녀는 딸을 데리고 가며 이렇게 말했을까.

 어미인 나는 아이들보다 영어도 서툴러서 학교 방문도 두렵기만 했었다. 딸은 그 후 친구들을 데려오지 않았다.
 이층침대에서 동생과 함께 지내는 방벽에 구멍을 내며 큰딸은 오랜 기간 울부짖었다. 친구들 집에서 놀다 집에 오는 날은 입이 튀어나와 내 몸의 힘도 빠졌다.
 부촌 동네에 겁 없이 끼어 살다가 이민자의 빈곤을 아이들에게 노출한 셈이다.

   은희네 5식구가 강남부촌의 낡고 좁은 아파트에 살면서 그들도 내 딸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를 부르며 현관문이 부서지게 두드리던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 은희는 내 딸과 다르지 않았다. 친구 사이에 틈이 생겼는지 뿔난 앵무새 같은 날도 있었다. 딸들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는 뒷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프롬에 간다며 남자 친구가 리무진을 타고 우리 집 앞에서 딸을 기다렸다. 그녀는
어깨가 드러나고 구슬 소리가 들리는 까만 드레스를 입고 차에 올랐다.
은희도 목의 혹 수술이 성공하면서 가족의 관심 그리고 빗나갔던 남자 친구와 절친 지숙도 돌아오지 않았던가.

 1994년을 통과한 벌새 은희와 큰딸 윤정의 수채화에는 지금은 꽃도 피고 벌 나비도 날고 있을 것이다. 그림 한쪽을 차지하는 수묵화는 그 시절의 걸쭉한 핏덩어리들의 자국처럼 보인다.

 <벌새>는 김보라 감독의 소녀 시절을 담았다 했다. 그녀의 엄마뻘인 나의 벌새 시절은 없었겠는가. 서울역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 집에서 걸어 내려와 덕수궁 광화문을 거쳐서 수송동에 있던 학교를 매일 걸어 다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길을 6년을 걸었다.
그 길 위에서 내 벌새 시절은 비와 눈과 바람 그리고 태양 빛으로 영글었다.
 너와 나의 벌새 시절은 서로 만나며 아프지만 그만큼 색채는 다양하다.
 벌새 시절은 누구에게나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시절의 결핍과 아픔은 까만 밤에 떠 있던 초승달이라 말할까.

  

                                                                                  2022,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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