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에는 흑인 선생 ‘마크 테커리’가 나온다. 테커리 교사는 권위를 내려놓고 학생과 서로 동등한 관계로 지내고자 설득력 있게 다가서지 못하는 교과서 대신 진솔한 이야기로 사제 간 불신의 벽을 무너뜨린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의 태양을 떠올렸다.
여고 시절 국어담당이셨던 최순열 선생님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선생님은 한여름을 빼놓고는 일 년 내내 곤색 양복만 입으셨다.
"선생님은 왜 그 양복만 입으세요?"
하며 아이들이 짓궂게 물으면
"난 똑같은 양복이 여러 벌이거든."
하시며 부드럽게 넘기셨다. 항상 친근한 미소와 말투로 우리들의 이름을 정겹게 불러 주시는 선생님을 학생들은 무척 따랐다. 그 당시에는 한 반에 거의 65명 가까이 있었으니 여섯 반만 수업에 들어간다고 해도 390명인데 그 이름을 어찌 다 외우셨을까?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선생님이 잘못 불렀다고 말한 친구가 없을 만큼 이름 한 번 틀리지 않고 불러 주셨다. 게다가 학생들의 작은 변화도 빠르게 알아채곤 관심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선생님의 고품격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선생님의 수업 시간은 늘 재미있었다. 수업하시면서 중간중간 인생의 지표가 될 만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는데 그중 가장 많이 말씀하신 것이 ‘그 누구의 탓도 하지 말라’는 당부이셨다. 훗날 난 성당에서 신부님이 당신의 주먹으로 가슴을 살짝 세 번 칠 때마다 '내 탓이오'를 하는 모습을 보고 선생님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얼마 후 선생님의 가르침이 무색하게 난 심한 '부모 탓 병’에 걸리고 말았다. 가정 형편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친구들이 과외를 받네, 미술학원에 다니네, 피아노를 치네 하면 부러움에 속이 탔다. 그리고 난 까만 그을음을 부모 탓으로 돌리며 삐딱하게 굴었다.
학교도 간신히 가서 대충 버티다가 보충은 싹 다 빼먹고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좀 놀 줄 안다고 자부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면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우리의 아지트는 학교 앞에서 조금 떨어진 분식집 쪽방이었다. 쪽방은 분식집 주인아주머니 쉼터인데 손님이랍시고 우리가 점령해버린 것이다. 우리는 누구든 용돈만 생기면 미친 듯이 달려가 떡볶이, 쫄면, 라면 등으로 배를 채우곤 음악 듣고 수다 떨다가 깜박 잠이 들곤 했다. 그러면 아주머니가 학교 들어가라며 흔들어 깨웠다.
얼마못가 스릴만점 이었던 우리의 행각은 학생지도부 선생님에게 들통났다. 잡혀가 학생부실에서 훈육 받고, 반성문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최순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너무나 창피하여 쥐구멍을 찾고 있는 나를 보시곤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냐며 학창 시절 모범생으로만 살면 나중에 추억거리가 없어서 못쓴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무엇이든 다 들어줄 터이니 하고 싶은 말 다 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채근 없이 기다려주시는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 포기하는 심정으로 “선생님이 환경 탓, 부모 탓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자꾸 탓만 하게 되어 탓하기 싫어 그냥 놀았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모두 내 탓이네”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고는 이어 하시는 말씀이
“난 조실부모한 사람이야. 누님이 버스 안내원을 하여 날 가르쳤지. 그런데 어느날 버스 안내원들이 요금에 손을 댔다는 오해를 받아 퇴근도 못하고 몸수색을 받았다더군. 그런데도 돈이 나오지 않자 화간 난 사장이 뜨거운 물을 땅바닥에 던졌는데 하필이면 그 물이 누님 왼쪽 발등을 덮은 거야. 그때 바로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누나는 병원비가 아까워 그 고통을 참다가 끝내는 발의 반쪽을 잃으셨어. 그런데도 내 학비를 벌어야 한다며 그 발을 가지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내 학비를 감당해 주셨지.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이야? 그런데도 난 누님에게 짜증을 내곤 했어. 공부가 쉬운 줄 아냐며 투정도 부렸지. 그런데도 누님은 나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셨어. 난 세상에서 누님을 가장 존경해. 그런데 나는 왜 좀 더 일찍 철이 들지 못했을까? 나는 왜 누님을 사랑하면서도 누님의 희생을 뻔뻔하게 받아먹기만 했을까?"
선생님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보니 숨이 멎는 듯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내 선생님은 내 등을 토닥거리며 말씀하셨다.
“ 다 사치야 사치….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지녀야 해. 네가 하기 싫어서 안 해놓고는 괜스레 부모님 탓을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
선생님은 다른 친구들과도 개인 상담을 다 마친 후에도 실내와 갈아 신는 곳 까지 동행해 함께 해주셨다.
늦은 하굣길의 찬바람이 내 마음을 휘몰아쳐 머리끝으로 말아올리는듯 했다. 그렇다. 내 불만은 사치였다. 지금껏 부모님 덕분으로 살아왔으면서도 감사한 줄 모르고 욕심만 부렸던 것이다.
나는 며칠을 끙끙 앓으면서 앞으로는 긍정의 자세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학생답게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마음을 다지고 공부하니 남의 것으로만 알았던 행복이 나에게도 찾아와 총학생회장으로 명예롭게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찾아뵌 것이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마음과는 달리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 찾아뵙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몇 년이 흘러 찾아뵈니 안 계셨다. 죄송하고 서운한 마음을 늘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주옥같은 말씀들로 위로할 뿐이다. 더욱이 사교육 시장에서 18년째 교육의 엄중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더없이 소중하다.
항상 선생님은 ‘마크 테커리’ 선생처럼 인생을 잘 살아가는 힘을 주셨고, 지혜를 가르쳐 주셨다. ‘역지사지’를 선생님에게서 배웠고, 즐거울 때 기뻐하는 연습보다는 슬플 때 슬퍼하지 않는 연습을 배웠다. 사교육 선생으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선생님 덕분이다. 선생님께 받은 사랑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밤늦은 퇴근길, 수루가 부르는 ‘To sir with love'가 어김없이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다. 어떻게 해서든 수소문해 찾아뵈어야 하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여태 찾아뵙지 못하고 있으니 숙제를 다 하지 못한 학생처럼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달빛이 참 곱고 아름답습니다. 선생님이 내려다보고 계신 것 같아요. 건강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