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의 수탉이 되라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을 읽고
국화리
팔순의 교수는 새벽을 기다리며 독백을 쏟아내고 있다. 나직하나 단호한 목소리다. 그는 일생을 살아온 삶의 철학으로 세상을 질타하고 있었다. 그의 삶은 스승들과 함께 어둠을 뚫는 전령사인 갈리아의 수탉과 같이 살아왔다.
세상은 아직도 선량한 사람이 피고석에 서있으며 악인들은 검사석에서 웃고 있고, 신은 멀리 있는 우주라는 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악 마가 지옥에서 탈출하여 이 지상에서 성업 중이며, 모든 인간은 시장 지향적인 존재가 되어 최고의 입찰가를 받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고… (「서문」 중에서 )
저자는 ‘과연 우리가 평등하고 정의로우며, 인간답게 살날이 오기는 할까요?’라고 묻고 있다. 나는 왜 힘에 버거운 임헌영 교수의 저서를 읽으며 감히 글을 쓸 생각을 했을까. 서문 중에 인용된 파스칼의 글에서 우선 나는 멈췄고, 무너졌기 때문이다,
아,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공허하며, 더러움에 가득 차 있는 것일까. 인간이란 도대체 괴물 같은 것이 아닌가. 진기하기 이를 데 없고 무슨 괴물, 무슨 혼돈, 무슨 모순에 가득 찬 것 등이 무슨 놀라운 일들 인가? 모든 것의 심판자이면서도, 어리석은 흙 속의 지렁이에 불 과한 것. 진리를 맡은 자 이면서도 불확실한 오류의 시궁창, 우주의 영광이면서 우주의 쓰레기다.
내 감정은 흐느꼈다. 인간관계로 혼란에 빠지는 나를 질타하는 메시지 같았다. 나는 하찮은 일에 흔들리는 인간쓰레기의 한명일 지도 모른다.
나의 개인사를 돌아보면 나는 피해의식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 증상이 중증일 때는 멍청이 혼자 중얼거렸다. 의학적으로 이런 증상은 심적 충격을 받았을 때 심장의 손상을 줄이기 위한 자가 치료 능력이라 한다. 몸의 방어 능력, 즉 말을 함으로 심장의 부담을 줄이는 이로운 증상인 것이다. 그날도 고통에 눌려 나는 일독을 마친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을 집어든 것이다. 이 책은 임헌영 교수의 삶을 문학평론가인 유성호 교수와 대담 형식으로 쓰인 자서전이다.
책에는 저자의 출생에서부터 성장기와 문학을 통해 한국의 군사독재 하에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의 역사철학과 문학평론가로서 인식은 그를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을 걷게 했다. 그가 평생을 한국 민주화의 투사로 살아온 데는 그의 출생과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그 산골 마을은 임 씨의 집성촌으로 학문을 하는 분들이 있어 부친을 비롯해서 집안사람들이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깨인 분들이었다. 우리나라의 해방의 격동기와 한국전쟁 즈음에 그의 부친이 목숨을 잃었다. 형과 삼촌의 월북 사건 등 장정 다섯 명이 사라지며 임 씨 집성촌에 큰 파도가 덮쳤다. 그 세파로 홀어머니 밑에서 장남이 되어버린 저자는 문인이 되어 글을 써왔다. 저자는 부친의 죽음과 임씨 집성촌의 비극에서 의식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 정치사는 건국 초대 대통령부터 장기 독재정권으로 시작하여 4.19 유혈혁명으로 종식을 보았다. 그 후 5.16 군사 쿠데타로 또다시 장기 군사독재 정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저자는 이 암울한 시대에 글을 무기로 투쟁을 해왔다. 그 대가로 그는 국가 공권력에 의해 체포, 구금, 고문을 당하였다.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투쟁하였고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그 후도 민주화의 길은 멀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소장을 역임하며 친일파 청산 작업인 『친일 인명사전』을 만들었고, 지금도 분단 상황에 있는 우리나라의 ‘통일문제’와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을 하는 현역이다.
그의 역사철학과 문학, 지성, 감성, 조직력, 실천력은 책을 통해서 깊게 만날 수가 있다. 한 권의 책은 대하소설처럼 방대한 한 시대의 산 역사가 살아있어 울림이 장대하다.
그의 저서에서 나는 내가 고통으로 여기던 일들을 먼지로 날리는 구절을 다시 만났다.
저자는 감옥에서 재판받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때 교도관은 『신약성경』을 넣어주었다. ‘나보다 더 비극을 보노라면 위로를 받겠지’ 하여 저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그 대목을 비교하여 읽었다. 그러나 작가의 노력은 실패였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인가,도 생각했단다. 작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카타르시스는 비참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하찮은 것인가? 더불어 문학이란 이렇게 무력한 것인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 했다. ( 361쪽)
이 구절에서 저자가 당하는 고통의 깊이에 절망하게 되었다. 국가는 문인들의 민주화 운동을 간첩단 활동으로 몰아 수갑을 채워 법정에 세웠다. 신문에는 문인 간첩단을 일망타진 했다는 기사를 썼다. 수사기관의 폭력행사로 겁박당하며 그의 가정이 풍비박산당하는 광경이 보였다. 그 가족들에게서 극한 상황에서 터지는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작가는 불행한 한반도 정치체제에서 일찍이 아버지와 친지의 희생을 체험하지 않았던가. 작가에게는 생명 같은 신념이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까지 희생시키며 나라와 민족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굽히지 않고 살아왔다.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이었나. 나에게 신념이 있기나 했을까. 고작 사소한 인간관계에서 생겼던 불쾌함을 움켜잡고 고민에 빠진 내 자신이 저급해 보였다. 죽기 전에 자각이 생겼으니 다행스럽다. 쓸데없이 자란 가지는 쳐내며 내 소나무를 키우겠다.
저자의 역사 철학과 문학사상은 방대하여 내가 몇 독을 한들 이해할 수는 없다. 저자의 절규에 귀 기울이고 세상은 변하여야 한다는 마음은 더 절실해졌다.
평소 임헌영 교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곁에 두고 읽는 책이라 했다. 나는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가까이 두고 읽겠다. 나는 저자와 동시대인으로 같은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작가와 공유하는 많은 역사의 현장을 알고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시민으로 살지만 내 조국얼굴은 이민자의 얼굴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의 저서는 그가 풀지 못했던 문제들을 독자들에게 깊이 있게 고민하라는 책이다. 내 조국의 정의로운 세상,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쯤 와 있을까. 매일 시끄러운 것을 보면 정의의 그 길을 향하여 진통하는 소리로 들린다.
노 교수는 독백을 마치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창가가 불그스레해진다. 진보적 삶을 산 저자는 참된 진보는 편 가르기가 아니므로 보수가 진보하면 미래가 되고 진보도 썩으면 반동으로 전락한다,는 외침이 나의 가슴에 절절하다.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진보와 보수의 대결은 서로 증오 수준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늘어나 성찰의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성숙한 민주주의 발전으로 진보 보수가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자는 역사는 발전해 왔고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고 진보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며 독자들에게 갈리아의 수탉처럼 울어줄 것을 바라고 있다.
미물인 나도 우주의 영광 쪽으로 몸을 굴려 한걸음 나아간다면, 저자인 내 스승 임헌영교수가 이 책을 세상에 낸 보람이 있을 것이다.
(2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