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1
-크로키북을 든 그녀-
곽지원
중학교
때 단골 소풍장소는 선정릉이었다. 그때는 ‘왜 맨날 여기야?’하고 불평불만이
많았는데, 선정릉이 얼마나 근사한 공원인지 전혀 모르던 철부지였다.
어른이
된 후 가끔 선정릉을 갈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바람결에 찰랑이는 칼
단발에
반쯤 가린, 우수가 깃든 얼굴과 가녀린 몸을 나무에 기대고 작은 크로키북에
뭔가를
열심히 그리던 선생님. 우리 중2 소녀들보다 불과 10살이나 많았을까? 대학을
갓
졸업하고 부임한 담임 선생님의 모습이다.
남자
선생님이 같은 넥타이를 연 이틀 매고 와도 뒷담화를 하던 예민한 소녀들 눈에,
우리
담임의 ‘꾸안꾸’ 패션은 늘 화제였다. 매일 바뀌는 찰랑찰랑 스커트에 블라우스 차
림은, 검은색 교복 안에 갇힌 사춘기 소녀에게는 참 아름다워 보였고, 부러웠다. 불과
2년 후에는 우리도 사복을 입고 고등학교를 다니게 될 줄 상상도 못한 채….
그런
그녀가 소풍 날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크로키북을 들고 나타났을 때, 많은 소
녀
팬들이 탄성을 질렀다. 그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의외로
청바지가 잘 어울린다
는
것도, 모두 멋있어 보였다.
둘째
딸아이가 2학년 때 전학간 중학교의 홈페이지에서 그 선생님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목덜미의 잔털이 일제히 일어섰다. 흔하지 않은 이름에 같은 국어과. 틀림없었다.
이 무심한 제자는 졸업 이후 학교나 담임 선생님을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마주한 선생님의 이름을 보고, 얼마나 망설였을까. 81년
에 서초중학교에 계셨던 김OO 선생님
아니시냐고, 짧게 사연을 남겼다. 나중에 들으
니, 홈페이지를 담당하는
교사가 내가 쓴 글을 보고 한밤중에 선생님에게 연락을 했다
고 한다.
“선생님! 옛날 제자가 학부모가 돼서
나타났어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선생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깡마른 체형에 쌍꺼풀이 또렷한 눈매와 두툼한 입술, 그리고
각진 턱이 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녀.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는
말이 확 와닿으며,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선생님이 자랑스러웠다.
우리의 사제 관계는 단박에 화제가 되었다. 물론
전학생인 딸아이는 뜻밖의 관심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스승의 날에는 선생님께 꽃다발을 보내 드리며, 29년이나 늦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지원아, 너 그때 그 남자애 기억하니?”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이름은
안 나왔지만, 나는 금세 알아들었다. 그 남자애의 담임이
지금은 강남의 한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라는 얘기를 하신 직후였다.
“아… 그럼요, 어떻게 잊겠어요.”
나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작게 웃었다.
“나도 초보 교사라서 처음에는 참 당황했지. 돌이켜
보면, 그때 일로 내가 많이 단련된 거 같아.”
“하하하, 그렇게 좋게 기억해 주시니 다행이에요.”
“혹시… 다시 만난 적 있어?”
정직하게 답해야 할지, 아니면 순간을
빨리 모면하기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진실게임’에서
‘진실’을 말하기 싫을 때,
차라리 술 마시는 쪽을 택하는 사람의 심리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나의 중학교 2학년 시절을 말할 때 담임
선생님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기억, ‘꽃을 준 남자’.
응답하라,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