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 찐빵의 꿈
유영석
눈꽃이 소복이 내려앉은 작년 12월이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한신대학교 정문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칠 때마다 마음마저 하얗게 물들었다. 교정으로 들어서니 눈밭에는 청춘의 발자국들이 여기저기 꿈을 좇았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캠퍼스는 내일을 향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회계동아리 학생들과 종강 후 학교 앞 카페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구석에 앉아있던 한 남학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교수님, 이제 사회생활을 곧 시작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는 메모지에 ‘Aim High!(목표를 높게 세워라.)’라고 적어 건넸다. 그걸 보고 있던 옆자리 여학생이 물었다. “청소년 시절 교수님 꿈은 무엇이었나요?” 선생님이었다고 하자 어떻게 꿈에 도달했는지를 재차 물었다. 순간 청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갔다.
아버지는 찐빵 장사를 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집으로 돌아오는 낡은 리어카에는 온 가족의 사랑이 실려 있었다. 그 위에서 철부지 남동생은 재롱을 부리고, 어머니 품에 안긴 여동생은 미소를 지었다. “영석아, 아빠 손 꼭 잡아!” 아버지의 따뜻한 음성이 여전히 귓가에 울려 퍼진다. 고된 하루에도 웃음을 잃지 않던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 가족에게 희망의 등불이었다. 달빛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달동네는 가난했지만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했다.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은 밤길 친구가 되어주고, 휘영청 밝은 달은 어둠을 밝혀 희망의 빛을 비춰 주었다.
나의 어린 시절 별명은 찐빵이었다. 찐빵처럼 동그란 얼굴에 부모님이 찐빵 장사를 하셨으니, 친구들이 그리 불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별명이 싫지 않았다. 친구들이 놀려대도 개의치 않고 잘 어울려 지냈으며 오히려 둥근 보름달처럼 정겨운 별명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우정의 징표였고 부모님의 땀방울이 만들어낸 자랑스러운 이름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은 내게 특별한 존재였다. 『소년조선일보』에 「우리집은 판잣집」이라는 동시로 입선한 내게 대견하다며 등을 토닥여준 손길은 아직도 온기가 느껴진다. 어느 날 선생님이 불쑥 물었다. “너는 장래 무엇이 되고 싶니?” 그 물음은 내 안에서 잠자던 꿈을 일깨웠다. 마음을 담은 질문은 누군가에게 큰 응원이 된다. 얼떨결에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간절한 바람이기보다는 막연한 동경이었지만, 그건 척박한 땅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틔워보려고 세상으로 고개를 내민 순간이기도 했다.
소년 시절 우리 집 쌀독은 늘 비었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해 담임 선생님께 꾸중을 들을 때는 친구들 보기에 창피하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집안 형편상 상고에 진학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훗날 아버지가 되니 아버지의 마음이 더 잘 보였다.
1차로 학생을 선발한 덕수상고는 낙방했다.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맛보았다. 동대문상고에서는 장학금을 받는 나름 우등생이었다. 취업 시즌이 되니 담임 선생님이 삼성에 응시해 보라고 권유했다. 선생님 말씀은 어둠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었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담임 선생님이 ‘삼성맨’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1974년 7월, 삼성에 취업하여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선생의 꿈은 찐빵 안에서 잠시 쉬었다.
직장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자기 계발의 불씨는 끄지 않았다. 1982년 한국방송통신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통신 강의를 듣고, 출석 시험을 치르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회사 업무는 한겨울의 함박눈처럼 쌓이고 몸은 저녁마다 파김치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1987년 4월 일본 오사카 지사 주재원으로 발령받았다. 회사로부터 인정을 받은 듯해 뿌듯하면서도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아쉬움도 컸다. 버릴까 하다가도 정작 빼앗기면 아까워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오사카 근무를 마치고 1992년 말 귀국했다. 서둘러 방송통신대에 확인해 보니 이미 제적 처리된 상태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던가. 우여곡절 끝에 무역학과로 편입학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1995년 봄에는 도쿄지사 주재 발령을 받았다. 당시 회사가 추진하던 프로젝트의 적임자로 나를 택했다. 학업의 끈을 단단히 묶어 새천년이 시작된 2000년, 천신만고 끝에 졸업장을 받았다. 대학교 입학에서 졸업까지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안개 속 가시밭길이었지만 흐릿한 빛을 보며 길을 찾아 보람도 컸다.
삶은 언제나 배움의 연속이다. 2014년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낮에는 대기업에서 임원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했다. 세월을 견디면서 ‘포기’라는 단어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힘들어도 연구에 몰두할 때는 행복했다. 방송통신대라는 핸디캡을 딛고 꿈과 도전의 의미를 새기며, ‘빅 데이터 환경에서 프로세스 마이닝을 이용한 내부 감사 실시간 모니터링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을 썼다. 햇살이 가득한 2017년 9월, 박사모를 쓰고 대학교 교수가 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린 시절 품었던 꿈을 지혜가 빛나는 60의 나이에 이뤘다. 삶의 한 페이지를 의미 있는 이야기로 채웠다.
우연과 필연이라는 수레바퀴가 수없이 돌고 돌며 인연을 만들어낸다. 내게는 평생 잊지 못할 은사 세 분이 있다. 어린 시절 꿈을 심어준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 제적 상태인 아들이 다시 공부하도록 통신대에 디딤돌을 놓아준 부모님, 학문적 가르침과 멘토인 한신대 홍성찬 명예교수이다. 홍 교수는 2016년 세계 인명사전 ‘마르커스 후즈 후 인더 월드(Marquis Who’s Who in the World)’에 등재된 분이다. 이 소중한 인연 덕분에 선생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풍성한 잎사귀처럼 삶을 향기롭게 하는 인연은 세상 최고의 자산이다.
잠깐의 추억여행을 마치고 다시 카페로 돌아왔다. 나는 살면서 꿈이란 단지 목표에 닿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이겨내며 나아가는 여정임을 깨달았다. 학생들에게 남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지 말고 자기 걸음으로 세상을 걸어보라고 했다. 벽을 마주할 때는 무엇이든 시도하라는 신호임을 일러주었다. ‘긍정의 힘’을 믿고, 변화에 두려워하지 말고, 좋은 인연을 만들라고 당부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인생 선배의 말에 학생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카페를 나서니 어둑한 겨울밤에 눈꽃이 흩날렸다. 청춘들의 꿈이 세상을 아름다운 설경으로 물들이기를 소망했다.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글에 대한 호기심이 꿈틀거리며 나를 흔들어 깨웠다. 2022년 봄에 강남구 가족센터에서 3개월간 디지털 교육을 받고 나서 그해 9월에 글쓰기의 창인 ‘긍정의 힘’ 블로그를 개설하고 긍정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치유의 습작’이었다. 거센 파도를 헤쳐 온 삶을 성찰하고 일기장을 펼쳐 과거를 돌아보았다. 일기와 편지, 그 갈림길에서 나는 잠시 멈칫했다. 일기를 남에게 공개한다는 것은 설레면서도 두려운 일이다. 영화 필름처럼 스쳐 가는 인생의 그림자를 낯선 타인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다. 감추고 싶은 저린 고통과 아린 추억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랐지만, 열린 마음으로 내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내게 글 쓰는 시간은 쉼표처럼 비움의 시간이자 침묵의 시간이다. 한 편 두 편 글이 늘어나니 빈 곳간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지인 작가가 혹하는 미끼를 던졌다. 글이 괜찮으니 꼭 출간을 해보란다. 나는 내가 잘 안다. 글의 소양도 부족하고 독서량도 턱없이 모자란다. 알면서도 얼떨결에 미끼를 물었다. 글을 책으로 묶으면 의미와 가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꼬드겼다. 기획서 작성, 제목 및 목차 설정, 퇴고 등의 출간 과정은 한 편의 작은 드라마였다. 2023년 4월, 인생의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가는 길목에서 자전적 수필 『바다를 꿈꾸는 개구리』가 세상으로 나왔다.
출간을 기념하여 그해 6월 북 콘서트하는 날 예의를 갖추려고 헤어숍에 들렀다. 나를 알아본 디자이너에게서 “여자 친구로부터 받은 선물인 『바다를 꿈꾸는 개구리』를 읽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황홀경 그 자체였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선한 영향을 끼쳤다니, 생각할수록 꿈만 같았다. 이런 맛에 산고(産苦)를 겪으며 글을 쓰는가 보다. 내가 심은 긍정의 씨앗이 푸르게 싹을 틔워 내게로 다시 돌아왔으니, 세상에 이보다 귀한 선물이 어디 또 있을까. 나는 그날 ‘작가’라는 날개를 달고 잠시 하늘을 날아보았다.
글을 쓸수록 부족함이 도드라졌다. 마음을 다잡고 수필과 시 공부를 시작했다.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지고 현시성이 있어야 좋은 수필이다”는 어느 작가의 말을 가슴에 품고 글을 배우며 담금질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2024년 8월, 『한국산문』에 「소년의 미래 여행」으로 수필가로 등단했다. 지인인 작가가 작품을 읽고 문자를 보내왔다. “글이 감동이군요. 과거와 미래를 잇는 글의 내용이 좋고 문맥의 흐름도 유연합니다. 꿈꾸는 청춘에게 길이 될 것입니다.” 선배의 칭찬에 후배 고래는 춤을 추었다. 틈틈이 시조 창작 활동도 해서 그해 12월에는 『시조문학』에 「장미를 생각하며」로 시조 시인으로 등단했다.
작가로서 본 무대에 서게 된 건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으로 동시를 쓰며 글쓰기 꿈을 키운 게 씨앗이 되었다. 그 씨앗이 현실로 활짝 꽃을 피운 것은 내 인생 드라마 최고의 한 컷이었다. 이제 개구리는 우물을 뛰쳐나와 벽을 오르고 강을 건넌다. 저만치 보이는 바다를 그리면서. 인생의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가지만, 사유는 중천에서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다. 갓 지펴진 문학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를 소망하며 좋은 글로 인생의 다음 챕터를 장식하고 싶다.
인생은 찐빵과 같다. 겉은 소담하지만, 그 안에는 꿈과 사랑이라는 팥소가 발효되어 부풀어 오른다. 흔히 삶을 고해라고 하지만 누구나 고난과 시련, 실패라는 쓴맛을 보며 하루하루를 건넌다. 물에 빠져도, 폭풍이 불어도 헤쳐나와야 하는 것이 이 여정이다. 삶은 아름다움과 고통이 서로 얽혀 있는 서사시와 같다. 오뚝이는 넘어져도 훌훌 털고 바로 일어난다. 주저앉지 않으면 실패는 더 높이 뛰기 위한 발판이 된다.
꿈은 존재 이유를 밝혀주는 빛이다. 꿈이 없는 길이 어두운 이유다. 꿈은 크기나 무게로 저울 되지 않는다. 각자의 그릇에 원하는 형상을 담으면 된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난다고 했다. 선창가를 기웃거리며 죽은 고기만을 찾는 갈매기는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모른다.
내 이름을 불러본다. 경영자, 대학교수, 컨설턴트, 사학재단 이사장, 작가. 오십 성상을 메마른 땅을 뚫고 솟아오른 잡초처럼 억척스레 버텼다. 내 이름자 ‘석(石)’처럼 모진 비바람에도 꿋꿋이 꿈의 자리를 지켰다. 누구나 내면에 긍정과 부정이 공존한다. 긍정에 먹이를 주면 희망이 싹트고, 부정에 주면 절망이 드리운다. 나는 긍정 씨앗에 물을 주고 햇살을 씌워주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뿌리를 내렸고, 어릴 적의 꿈을 펼칠 기회라는 확신이 용기를 불어넣었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매 순간 새로운 세계에 도전했으며 그렇게 내 삶은 길을 만들었다.
어린 시절 선생님이 심어준 꿈의 씨앗은 시련을 거름 삼아 무럭무럭 자라 활짝 꽃을 피웠다. 그 꽃들은 삶의 향기가 되었고 어려운 순간마다 힘이 되었다. 어찌 보면 나는 비바람으로 쓰러질 때마다 다시금 우뚝 일어선 ‘오뚝이 찐빵’이었다. 오뚝이 하나가 찐빵 앞에 서서 눈을 깜빡인다. 누군가 자꾸 그를 넘어뜨리는데도 벌떡 일어나 윙크를 한다. “괜찮아, 찐빵, 너도 할 수 있어! 함께 일어설 수 있어!” ‘오뚝이 찐빵’은 오늘도 푸른 꿈을 꾼다.
- 이투데이피앤씨, ⌜2025년 나의 ‘브라보!’순간 공모전⌟ 수상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