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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들의 방파제    
글쓴이 : 이민    12-04-29 09:19    조회 : 6,041
별들의 방파제
이 민


나는 비오는 날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비오는 도로를 달려 바다 앞에 가 앉아있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오늘처럼 비가 오고, 마음 그래프가 조(躁)보다 울(鬱)에 가까운 날에는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더 심해져 제어가 어려워진다. 그러면 출근하다 말고, 또는 가야할 곳으로 이동 중에도 그대로 잠적해서 달려간다. 바다, '별들의 방파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탁 트인 바다와 수평선을 동경하며 좋아하지만, 난 그게 좀 유난스러울 정도이다. 속초 주변 바다 몇 군데를 나만이 알 수 있게 이름 지어놓고, 특별한 볼일이 없어도 자주 그곳들을 찾아간다. '별들의 방파제'는 그곳들 중 한곳의 이름이다.


빗길 물보라 이는 도로를 달린다.
젖어 가라앉은 도로 색과 짙어진 전경이, 앞 차창에 들이닥치는 빗물을 와이퍼가 밀어내며 생긴 아크 안으로 들어왔다 튕겨나가길 반복하는 걸 보며 평소보다는 조금 거친 운전으로 달려간다.
오디오 음악을 우악스럽게 크게 틀어 놓아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대항시킨다. 바깥 빗소리를 이기고 차안을 빈틈없이 채운 음악과 함께 난 그 안에 갇힌다. 그 때, 들리는 음악과는 전혀 다른 노래를 소리소리 지르며 불러댄다. 그러면 우악스럽던 오디오 음악도 와이퍼 아크 밖으로 튕겨나가고 나와 내 목소리만이 차안을 완벽히 장악하게 된다. 그 느낌이 좋아서 빗길을 달리는 거다. 그러며 달려가는 곳, '별들의 방파제'.


속초 아래쪽 낙산 부근에 잘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작은 방파제가 있다. 방파제가 짧고 낮은 편이어서 파도가 맞서다 깨어지면 방파제 위로 쉽게 올라온다.
방파제 위를 올라탄 파도가 엎어졌다가 쓸려 내려가곤 하는데 불가사리들이 같이 방파제 위로 뛰어 올라왔다가 파도 따라가는 놈은 따라 내려가고 내려가기 싫은 놈은 그냥 거기에 엎어져 있거나 뒤집어져 있거나 해서 연두색, 보라색, 짙은 갈색 등등, 색색의 별들이 방파제에 무수하다.
이십여 년 전쯤 처음으로 그곳에 갔던 날, 무수히 작은 별이 깔린 그 곳에 나 혼자 부를 이름으로 '별들의 방파제'란 이름을 지어줬다.


'별들의 방파제'에 도착하면 방파제 거의 끝으로 가 우산 쓴 채로 웅크리고 앉는다.
그리고 김민기의 노래 "친구"의 가사와 똑같은 바다를 그냥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검푸른 바다위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저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산 것과 죽은 것, 하늘과 물의 구분도 잘 되지 않는 검푸른 바다를 보며 그 노래를 읊듯 조그맣게 불러준다. 그러면 가져온 보따리를 던져보라고 바다가 먼저 나를 부추긴다.
나는 그동안 가슴에 엉겨붙어있던 엉키고 요란한 내 생각뭉치를 그 깊은 바다에 던져준다. 바다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나 궁금한지 이리 밀고 저리 부딪치며 보따리 안을 풀어보려 애를 쓴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렇게 그 끝자락에 앉아 기다리다 보면, 꼭꼭 매어졌던 보따리가 바다 속을 들며나다 어느 결에 풀어져 그 안에 있던 생각들이 가지런히 제 모양을 드러낸다. 그때서야 나는 '아! 이건 내 몫이구나 저건 내 몫이 아니구나'하고 구분해 편을 갈라놓을 수가 있게 된다.
내 몫이 아닌 것인데 내 몫으로 알고, 또는 내 몫이길 소망해서 붙잡고 집착했던 그 뭉치들 때문에 내가 버린 시간이 얼마며, 그것들이 내 가슴을 훑어 생겼던 생채기가 곪아 앓아누운 날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내 그릇이 작았던지, 내 그릇에 넘치게 그것들이 컸던지, 어쨌든 내 그릇이 깨어졌다면 내 몫이 아니었던 거다. 가진 것을 무엇에게라도 빼앗겼다면 그 또한 제대로 가진 것이 아니었으니 내려놓을 줄도 알았어야 했다. 그것들을 싸매 안고 절절매던 내가 안쓰러워 울컥 눈물을 쏟고 만다.
천천히 그것들을 하나 하나 내려 바다 속에 가라앉혀버린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그 무게만큼 가뿐해진다.
그제야 내 몫으로 편 갈라놓은 나머지 뭉치들을 들여다본다. 그것들은 파편으로 쪼개지고 순번이 정해져서 애잔히 정렬되어 있다. 난 그저 이것들만 순번대로 챙기면 될 일인 것을 하는 작심을 하고 일어나 비오는 방파제에서 내려온다.


그 '별들의 방파제'가 없어져버렸다.
몇 해 전, 갔더니 공사가 한창 중이었다. 더 넓고 바다 쪽으로 더 깊게 하는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더 이상 불가사리 별들이 뛰어 올라올 수 없게 되어버린 데다가, 내가 울음 담긴 맘으로 달려와도 그냥 가만히 내버려둬 주던 한적함까지 치워버릴 회센터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 때의 서운함이란 말로 할 수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나에게 '별들의 방파제'는 '별들의 방파제'일뿐이다. 사람이 죽어도 그 이름이 그대로인 것처럼.


그 후로는, 늘 던지던 생각뭉치를 던지지는 않는다.
대신 릴낚시에 등은 푸르고 배는 붉은 갯지렁이를 끼워 던진다.
바다로 들어간 갯지렁이가 어떤 모습을 달고 다시 올라올까 기다리는 동안, 그것은 생각뭉치를 던져 놓았을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별들의 방파제'에 찾아와 던질 것은 생각뭉치만은 아니겠구나 하고 캔맥주를 따 마신다.



<책과 인생> 2012년 2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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