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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쓰기의 한 사례    
글쓴이 : 홍정현    14-11-28 13:22    조회 : 28,543

수필 쓰기의 한 사례

홍정현

  등단 이후 일 년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수필 쓰기 즐거움에 빠져 헤벌쭉 웃고 다니던 일 년 전 나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 은하를 벗어나 안드로메다은하 어디쯤을 날아가고 있을까? ‘헤벌쭉한’ 내가 지구를 떠나버린 후, 남겨진 나는 모니터 빈 문서 흰 빛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막막한’ 나로 전락했다.

  흰 모니터에 홀로 도도하게 서 있는 막대기, 커서(cursor)가 규칙적으로 깜박인다. 커서는 신경질적으로 깜박이며 모스 기호처럼 내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공간을 채워봐. 비문은 용서하지 않겠어! 등단했으니 글에 기품이 있어야겠지? 재미만 추구하지 마. 인간에 대한 성찰이 꼭 들어가야 해. 아마추어 같이 보이는 산만함은 안 돼!’라고.

  커서가 끊임없이 깜박이면서 압박해오자 뇌는 압박에 대한 방어기제를 출동시킨다. 구입희망 물품 1위인 세일러(일본 필기구 회사) 만년필. 나와 모니터 사이에서 신기루처럼 만년필이 어른거린다. 글쓰기는 팽개치고 세일러 만년필을 검색하며 놀고 싶다. 만년필의 필감, 캡의 방식, 잉크의 흐름 정도, 촉의 특징, 색의 종류 등등을 알아보고 싶다. 매끈하고 유려한 몸체, 날렵한 촉을 감상하면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고 나의 세상엔 평화가 찾아오겠지?

  하지만, 안 된다. 일 년의 슬럼프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 글쓰기의 즐거움은 만년필이 주는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수필 한 편을 완성한 후 얻는 성취감이 얼마나 달콤한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마음을 다잡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만년필을 하이킥으로 날려버린다. 그리고 다시 모니터에 집중한다.

  글쓰기의 강한 욕구가 방언처럼 터져 나와 문장을 쏟아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속된 말로 ‘필(feel) 받았다’고 하는 순간. 그 순간이 오면 자판 위 손가락은 현란한 춤을 추며 막힘없이 이야기를 뽑아낸다. 일단 그렇게 초고를 써놓으면 그 뒤의 과정은 편안하게 진행된다. 든든한 초고만 있다면 수십 번 퇴고하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저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구성을 바꾸고 문장을 고치면 되는 일이다.

  지금 난 그 ‘필(feel)'이 절실하다. 어떻게 해야 ‘필(feel)'이 올까? 맥주를 들이켜고 알딸딸해지면 ‘필(feel)'이 올까? 알코올의 힘을 빌리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본다. 이런, 맥주가 없다.

  그러면 음악을 들어볼까? 청춘의 냄새가 물씬 묻어있는 90년대 곡을 들으면 그때의 감수성이 다시 살아날지 모른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오직 감정에만 충실했던 이십 대로 돌아가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글을 쭉 써내려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음악을 듣기 위해 보스 뮤직 시스템의 블루투스를 켠다. 휴대폰에 저장된 90년대 음악을 스피커로 듣기 위해서는 블루투스 연결이 필요하다. 하지만 연결이 안 된다. 여러 번 시도해도 되지 않는다. 정확히 다섯 번 시도와 실패를 반복한 후 포기한다. 기계마저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 버럭 짜증이 올라온다. 애써 감정을 진정시키며 이어폰을 집어 든다. 귀가 약해 이어폰 사용이 좋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필(feel)'을 받으려면 밑밥이 필요하므로. 이어폰에서 임재범의 <이 밤이 지나면>이 흘러나온다. 임재범의 강한 음성이 딱딱하게 경직된 마음의 근육을 살살 풀어준다. 다행이다. 효과가 있다.

  자, 이제 무엇을 써야 할까? 거창한 소재보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찾아야 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글감이다.’라는 최면을 건다. 이제 노래에 몸을 맡기고 내면의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작은 물결을 포착하면 된다. 낚싯줄을 내리고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니터 화면은 점점 창백해지고, 커서는 점점 더 빨리 깜박인다. 창백한 화면이 커서를 따라 리듬을 탄다. 하나, 둘, 셋, 꿀렁꿀렁. 화면에 얼룩이 일렁이면서 커서의 깜박임이 머릿속까지 옮겨진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두통의 전조를 감지하고 실의에 빠져들려는 순간, 낚시줄이 팽팽해진다. 무언가가 걸려든 것이다. 낚싯대를 꽉 쥐고 힘껏 잡아 올린다. 무엇일까? 내 글감이 되어줄 것은?

  ‘사자’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그림, <잠자는 집시>에 있던 사자의 동그란 눈동자가 떠오른 것이다. 그 사자는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다. 사자를 매개로 연결고리를 찾아야한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모니터가 아닌 사자와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앙리 루소 그림 속 사자는 사막에서 자고 있는 집시 여인 옆에 서 있다. 모니터 가득 앙리 루소 그림을 열어놓고 사자의 눈을 바라본다. 사자는 왜 사막에 있는 걸까? 사자는 왜 꼬리에 힘을 주고 있을까? 아무리 바라보아도 사자는 그림 속에만 있다. 다른 무엇이 되어주지 않는다. 레고조각으로 가득 찬 커다란 박스에서 새끼손톱만한 부품을 찾는 기분이다.

  귀가 따끔거려 이어폰을 뺀다. 전람회의 <취중진담> 노래가 이어폰과 함께 멀어진다. 취중진담. 역시 맥주를 마셔야 했다. 맥주가 있었다면 사자는 그림 밖으로 뛰쳐나와 내 옆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음 한편에서 올라오는 씁쓸함 때문인지 실제 위병이 시작된 건지 속이 쓰려온다. 순진한 척 바라보는 사자가 보기 싫어 모니터 창을 신경질적으로 닫으니 뒤에 겹쳐있던 네이버 검색창이 뜬다.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처럼 검색창에 만년필 이름을 친다. 나만의 놀이터가 활짝 열린다. 세일러 만년필이 언급된 글과 사이트가 가득 올라온다. 검색을 하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마음에 드는 만년필을 할인가로 판매한다는 문구를 본다. 귀신에 홀린 듯 만년필을 장바구니에 넣고 카드 결제를 한다. 드디어 세일러 프로페셔널 기어 만년필이 내 것이 되었다.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린다. 오늘 주문했으니 내일이나 모레면 반가운 택배 아저씨의 경쾌한 초인종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다. 스멀스멀 불안감이 주변에서 흘러나오더니 순식간에 만족감을 집어삼켜버린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래왔듯이, 오늘도 나는 글쓰기에 실패했다. 워드프로세서 커서에 굴복한 패배자가 된 것이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린다. 열두 살 아들 제이다. 제이가 징징거리는 소리로 말한다.

  “엄마! 나 수학경시대회 망쳤어. 실수했어.”

  꾹 눌러 놓은 온갖 감정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그것은 기화하여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요동친다. 자제력이 뻥하고 튕겨 나간다. 대 폭발이다.

  “뭐? 또 실수했다고? 너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얏!”

  내가 들어도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아들에게 우악스럽게 화풀이를 하는 진짜 패배자가 되고 만다.


<<책과 인생>>  2014.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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