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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안진 시모음    
글쓴이 : 손동숙    12-08-05 07:56    조회 : 6,390
유안진 / 국내 유명시 시모음
동행
살 같이 빠르다는 한 세월을
그대 부리가 빠알간 젊은 새요
옛 어르신들 그 말씀대로
연약한 죽지를 더욱 의지 삼고
느릅나무 높은 가지 하늘 중턱에다
한 개 작은 둥지를 틀고
햇발이 모자라도록 웃음 웃어 살자
음악이 모자라도록 춤을 추어 살자.

휘파람새
봄날 하루 해가
다아 저물도록
어디서 뉘 부르는 휘파람 소리
애국가 제3절 가슴 젖는 옛 곡조를.....
애국하다 요절한
총각귀신 새가
일본순사 칼 맞고 엎뎌진 학생
절대로 죽지 않는
뉘댁 삼대독자(三代獨子)가
어린 목청
돋워가며
거퍼 부는 휘파람.

떡 잎
조용히 門을 여는 한 왕조(王朝)를 본다
두 연인(戀人)이 일으키는 어린 왕국(王國)이여
저마다의 생애는 영광과 비극의 대 서사시(大敍事詩)
봄 아지랑이 황홀한 춤 앞세워
모든 인연(因緣)이 움돋았건만.

바다, 받아
우주의 첫 생명체가 시작되었다는
아폴리디데가 태어났다는
바다에, 밀물이 들고 있다
뜨거운 것이 짜거운 것이
뜨겁고도 쓰라리게 목젖까지 차 올라
어머니!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산에 묻힌 어머니(母)를 바다(海)에서 부르다니
하해(河海)같은 어머니라고 해서 그랬을까
세상의 강물이란 강물을 다 받아주어서
세상의 무엇이나 다 받아 주는
아무리 받아 주어도 넘치지 않는 바다는
천만 가지 세상높낮이들 가리지 않고
받아준다고 바다이지
천만가지 이름으로 천만번을 불러도
다만 바다일 뿐
받아주는 어머니(母)가 있어서
어머니의 눈물(?)이 있어서 바다(海)이지.

박수갈채를 보낸다
겨울은 최후까지 겨울을 완성하느라 최선을 다했다
핏뎅이를 쏟아내며 제 철을 완성하는 동백꽃도 피다 진다
칼바람 속에서도 겨울과 맞서 매화는 꽃 피었다,
반쯤 넘어 벙글었던 옥매화는 폭설을
못 이겨 가지 채 휘어지다 끝내는 부러졌다,
겨울 속에 봄은 왔고 봄 속에도 겨울은 있었다
두 시대가 동거해야 하는 불운은 항상 앞선 자의 몫이었다
정작 봄이 무르익었을 때는 매화는 이미 꽃이 아니었다
앞서 가는 자는 항상 이렇다
불행하지 않으면 선구자(先驅者)가 아니다
지탄(指彈)받는 수모(受侮)없이 완성되는 시대도 없다
춘설도 동백꽃도 꽃샘추위도
제 시대를 완성하고 죽는 후구자(後驅者)그 사람들.

세한도 가는 길
서리 묻은 기러기 죽지로
밤하늘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五十嶺) 고개부터는
추사체(秋史體) 뻗친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짱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다보탑을 줍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橫財)를 했다
석존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行人)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 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았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비 가는 소리
비 가는 소리에 잠 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不協和)의 음정(音程)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다보는 실루엣 같은 뒷모습의,
가고 있는 수묵 빛 밤비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 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죄다.

안경, 잘 때 쓴다
자기 전에 안경을 닦는다
책 속에만 꿈이 있는 줄 알고
책 읽을 때만 쓰던 안경을
총기가 빠져나간 눈에
열정이 빠져나간 눈에
덧눈으로 씌운다
잠은 어두우니까
더 밝은 눈이 필요하지
감긴 눈도 뜬눈이 되어
지나쳐버리는 꿈을 놓치지 않게 되고
꿈도 크고 밝은 눈을 쉬게 알아볼 것 같아서
자투리 낮잠을 잘 때도 반드시 안경을 쓰는데
꿈이 자꾸 줄어드니까
새 꿈이 안 오니까
꿈을 더 잘 보려고
꿈한테 더 잘 보이려고
멋진 새 안경을 특별히 맞췄는데
새 안경이 없어졌다
다리는 새 걸로 바꾸지 말걸 그랬어.

그림자도 반쪽이다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꺼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눈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쳐졌다
오른쪽 팔다리가 더 길어서 왼쪽 신이 더 빨리 닳는다
모로 누워야 잠이 잘 오고 그쪽 어께와 팔이 자주 저리다
옆가리마만 타서 그런지 목고개와 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기울어진다는 것
그리워진다는 것
안타까워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아프고 아픈 것
아픈 쪽만 내 몸이구나
아플 때만 내 마음이구나
남이 아픈 줄은 내가 어찌 알아
몸도 마음도 반쪽만 내 것이라서
그림자도 반쪽이구나
그런데 나머지 반쪽은 누구지?

조금만 덜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해 주시옵고
용서해 주시옵기를
지워서 잊어버려 주시옵기를
그러나 그러나
스스로를 용서해버릴 만큼은
저절로 다 잊어버릴 만큼은
마시옵기를
조금은 남겨 두시옵기를
용서 구할 거리를 또 만들지 않을 만큼은
때때로 울 수 있을 만큼은
흐린 자국 몇이라도 남겨두시옵기를.

운동화, 두 귀에 신기다
암만 기도해도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자, 그럴 리가 없다는 수녀님은
기도할 때 두 귀에 운동화를 신겨보라고 했다
새 운동화에 신이 난 두 귀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금방 하늘문밖에 도착했는데,
바로 그때 문안에서 걱정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가
“ 글라라의 전화는 언제나 통화 중이라서
도무지 통화를 할 수가 없단 말이야
게다가 가슴에는 빈틈이라곤 한치는커녕 반치도 없어서
응답을 보내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번번이 되돌아와 버리니 정말 큰일이야
저 잡념자루를 어쩐다? “

까마귀의 길
어두워야 보인다지
눈을 감고 기도하는 까닭이라지
토굴 속에 들어가서 도(道) 닦는 까닭이라지
하늘의 달도 밤길을 더 잘 가는 까닭이라지
선견자 중에 맹인이 많은 까닭이라지
영험할수록 판수(判數)가 많은 까닭이라지
불을 끄고 눈마저 감아야
대낮에 잃은 길도 찾아낼 수 있다지
기나긴 깜깜 어둠 깊고 깊은 캄캄 밑바닥에서
나만이 나의 길인 것을
나만이 나의 미래인 것을
어둠만이 촛불을 꽃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찾은 길을 잃지 않으려면
여름도 겨울보다 춥게 살아야 한다지
눈발이 그쳤다
밤중도 늙으면 새벽이 되지만
만년을 늙어도 터럭 한올 흴 수 없다
섣달 그믐밤 얼어붙은 가지 끝을 체온으로 녹이는 도래까마귀
울음 한 번 떨치면 반경 600리 밖에까지 몸서리치는 고독의
선사 이래 백설보다 순결한 검은 세계를 살며
영민과 고독과 숭고함의 길을 가는 사제로서 전령사로서
밤과 겨울의 검은 치마 시인으로서.

손대지 마라
깨트려 파계(破戒)시키지 마라
돌팔이 땡초로 환속(還俗)시키지 마라
그저 한낱 돌덩이 바위로만 보이느냐
하늘이 지으신 바 이대로가 부처니라
창조의 손바닥 그 체온에 뺨 부비는 바람과
구름도 묵묵히 읽고 가는 섭리는
햇볕이 달궈놓고 눈서리가 식혀내는
불과 얼음의 길, 인생과 다르지 않아
밤마다 달빛 별빛에 씻고 말린 몸에
풀과 꽃이 향기 풍겨 재롱 떨고
풀버러지 나방 새들 알 까고 새끼 치는
무릎 정강이를 이불 덮고 뿌리 묻어 크는 나무
다들 함께 한 이 자리 이대로가
완벽(完璧)이니라
神의 비밀스런
온갖 말씀이니라.
지란지교를 꿈꾸며...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글고 찾아가도 좋을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행복해질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좋고 남성이어도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필요도 없고
순수한 멋을 알고 증후한 몸가짐을 할수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수 있을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 주고나서 얼마의 시간이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신

이른 봄날씨처럼
변덕스런 우리 사랑 끝에
전신에 꽃부스럼 돋아나는 발진으로
모진 신고를 견디어야 했습니다만
만약
그대와 내게 용기가 있어
여름날 장마처럼 오래 오래 울더라도
여름 대낮 태양 같은 사랑을 했더라면
죽은 나무가지에도 잎은 우거지고
새들이 그 품에 깃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대와 내가
이성과 정열을 잘 다스려
가을 햇볕같이 성숙된 연정을 이어왔더라면
지금쯤
가을 이삭같은 열매를
거두어 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임이여
어쩌다가 우리는
서로가 너무 강하고 몸만 도사리고
자제와 분별은 싸늘히 식히고 식힌 나머지
소한 대한 추위를 불러오고 말아
얼음장 두꺼운 가슴 바닥에
실날같이 흐르는 그리움 한 줄기로
삼동을 어리석게 살고 있을까요


오늘

어느 날의 내게는
오직
어제만이 있었다

또 어느 날의 내게는
내일만이 있고 싶었다

등뒤의 풍경 같은
지난날이여

배경처럼 흐르는
아픈 가락이여

얼마나 나는
행진가를 부르며
부풀고 싶었으랴마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서로가 싸늘히
그늘을 드리운 자리
合自然의 오늘은

그 한때 쓰디쓰던 술맛이
혀끝에 감미로운
이 나이값


마흔 살

강물이 끝나는
그 자리가 바다이듯

젊은 눈물 마른 나이에는
눈물의 바다에 이르고 마는가

이제 나의 言語는 소리높은 파도
한번을 외쳐도 천만 마디 아우성이며

이제 나의 몸짓은 몸부림치는 물결
천만 번을 풀어내도 한 매듭의 춤사위일 뿐

그래 마흔 살부터는 눈물의 나이
물길밖에 안 보이는 눈물의 나이.
舍利

가려주고
숨겨주던
이 살을 태우면

그 이름만 남을 거야
온몸에 옹이 맺힌
그대 이름만

차마
소리쳐 못 불렀고
또 못 삭여낸

조개살에 깊이 박힌
흑진주처럼

아아 高僧의
舍利처럼 남을 거야
내 죽은 다음에는.
겨울밤 별떨기

참말로 서러워라
겨울밤 칼날 우는 추위를
두 손 호호 불며
글썽이는 눈으로
내 지켜보는 줄
까맣게 몰라라
그대는

혼(魂)이여
고운 혼이여
하늘과 땅 사이
그보다도 멀어서
인연 닿지 않는 이름
혼자 사랑하고 있는
이 못난 짓

못난이의
못난 짓을
끊지 못해 서러워라.


가을언덕

가을날 혼자서
언덕에 서면
어제가 추억처럼 아득하여라.

머리채 빗질하는 바람결에 문득
한떨기 갈대로 흔들리면서
이별이 더 따뜻하고 그윽하여
왠지 고마워 눈물 차올라라.

가을날 혼자서
언덕에 앉으면
구름도 이마 위에 머흘고 머흘러서
나보다 더 아파 아파하시는
성모님도 나란히 곁에 앉아계시어라.
침묵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사람을 얼마나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의 설익은 생각은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기를 기다릴수 있도록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의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속 침묵

어느 덫에 걸렸길래
이토록 뜨거운 내 입김은
말이 되지 못하는가

달아오를수록
싸늘한 눈발이 되고 마는가
나잇값을 따져보며
눈길을 걷는다

눈 위의 발자국처럼
스스로 상처 내며

아물기도 전에
다시 자해하며

말이 되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겨울은 겨울은 깊어만 간다.


지는 꽃을 보며

소맷깃
스쳐지기를
하 그리 소원하여서
소맷부린
닿았겠으나
인연 되지 못했으므로
손때 묻혀
어루만져 온 꿈
꽃잎 날려 다 버린다.


뒷소리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뽈 발레리는 이렇게 말했다지.

프랑스 그 남자의 이 잎소리를
내게 맞는 무슨 뒷소리로 받아낼까.

아아 나는 나는 언제나
앞보다는 뒤가 좋고
낮보다는 밤이 좋다.

그늘이 양지보다 더 편안하고
하늘보다 땅이 좋아
땅에서 살고 싶다.

죽으면 가서 행복하다는 하늘보다는
불행해서 울더라도 땅에서 살고 싶다.

어둔 하늘에 돋아나는 별보다는
날 저무는 들길에 고개 살랑 저어 피는
쬐꼬만 들꽃이고 싶다

숨가쁜 초록으로 숨차오르는 진초록으로
바람이 분다.
혼자서도 향기롭게 꽃다지로 살아야겠다.




너의
어디든
나는 빛나고 있다.

녹슨 자물쇠
무겁게 걸어둔
너의 깊은 데서
등불을 켜는 사람

너의 슬픔
속속들이 파묻힌
숨긴 눈물까지를
환히 보고 있는
나의 이 슬픔

가슴, 가슴의
샛길을 날으며
노래하는 종지리

퍼덕이는 날개의
깃털을 쓰다듬는
나의 이 기쁨

하늘 채광(採光)어리운
푸섶의 이슬같이

너의
어디든
내 눈물은 반짝이고 있다.


증명사진

가을아 가을아
지금 내 이름과 내 증명사진은
벌레구멍 피멍자죽
서리묻은 가랑잎
말채찍 바람아
제발 그냥 놔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