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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의 상상력과 칸트의 선험지식(I)    
글쓴이 : 김창식    19-01-05 17:38    조회 : 6,887
                    수필의 상상력과 칸트의 선험지식(I)
 
                                                                                                             김창식
 
1. 우리 수필의 문제점-읽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수필은 결국 인간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아니겠냐고? 맞다. 그 다음이 문제다. 수필전문지나 종합문예지에 실린 수필들을 보면 내용과 구성이 닮은꼴이다. 일상과 주변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 개인의 기구하고 구차한 삶의 기록, 감각적인 자연예찬이거나 오래 전 농경시대로 회귀하는 추억담, 타인에 대한 은근한 비난이나 타박, 자신과 가족에 대한 자랑 아닌 자랑(그러니까 결국 자랑)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수필이 읽히지 않는다.
 
 자연과 사물, 현상에서 삶의 이치를 읽어내지 못하는 음풍농월은 울림이 없다. 개인의 신변잡기도 관심을 끌지 못한다. 불특정 독자에게 작가는 거리에서 스치는 모르는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까. 가상현실이 일상에 틈입한 시대에서 농경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체험담도 당연히 흥미가 없다. 자신이나 가족자랑, 타인에 대한 비방을 듣는 것은 고역이며, 눈물 없이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신파성 글에도 질렸다.
 
 위 같은 지적이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 수필의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닐뿐더러, 문제가 되는 요소들이 SNS 상의 정보유통망처럼 가지를 치거나 어지럽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태를 악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점은 읽히지 않는다는 것일 것이다. 도대체 왜 수필이 읽히지 않는 것일까?
 
2. 결정적 문제점-상상력의 부족
 
 한 마디로 재미가 없어서다! 장르적 재미(선정적, 말초적, 자극적, 그로테스크한)를 말함이 아니다. 상상력 부족, 주제의식 결여, 흥미 없는 소재의 채택, 뻔한 전개와 결말, 정확하지 않은 문장과 논리, 교훈적 논조, 혼란스러운 미사여구와 수식어 사용이 얼키고 설켜 읽어도 남는 것이 없고 마음에 와 닿지도 않으니 누가 수필을 읽겠는가? 우선 고질병 중의 고질병인 상상력 부족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상상력이 무엇일까? 현실세계와는 거리를 둔, 하지만 있음직한 가상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색일 것이다. 작가의 문학적 세계의 깊이와 너비를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수필 역시 문학의 한 갈래인 만큼 시야를 넓혀 다른 문학 장르(?소설?희곡)에 통용되는, 상상력을 동원해 재창조하는 기법을 일부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일어난 일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일기처럼 기록해야 진실하다는 잘못된 주술呪術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쓴다는 행위 자체가 도대체 가능하지 않다. 쓰려고 하는 모든 내용은 펜을 잡거나 컴퓨터 좌판에 앉는 순간 과거의 일이 된다. 즉 쓴다는 행위는 기억(생각, 체험)을 소환하는 작업인 것이다. 하지만 기억은 모호하고 자의적恣意的이며 온전치 않다. 기억은 습작되기도 하고 휘발되기도 한다. 게다가 기억을 표출하는 수단과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언어(문자) 자체가 불완전하지 않은가? 문학이란 원래 가능하지 않은 일에 가장 근사치로 도달하려는 피곤한 도로徒勞이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보여주려는 내용은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물론 발생한 실제의 일일을 가능한 한 정확히 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자신의 사상이나 관점, 정서와 체험에 충실하려 노력하되, ‘상상력을 빌어 실제적 사실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해야만 문학적 진실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시나 소설, 희곡처럼 전적인 허구에 의존하면 작위적인 느낌을 주어 석연치 않을 뿐더러 수필 장르의 고유한 정체성을 훼손하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상상력의 도입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3. 상상력과 허구의 같은 점, 다른 점
 
 피할 수 없는 의문이 생긴다. 시나 소설, 희곡 같은 인접 장르에서 사용하는 허구, 또는 왜곡과 수필에서 허용되는 상상력은 어떻게 다른가? 수필에서 발현되는 상상력은 나와 관련된, 내가 개입하는사건과 느낌의 재구성을 말함이다! 바로 이 지점에 미묘하거나 확연한 차이가 있다. 문학적 효과 증대를 위한 '선의의 조정(Goodwill Adjustment)'은 허용되지만, 있지도 않은 일을 있었거나, 있음직하게 거짓으로 꾸며 처음부터 속이려 드는 것은 고의적인 속임수요, 자기기만이다.
 
 또 다른 갈래의 고민과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글을 쓰는 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이고 원초적이며 피해갈 수 없는 한탄일 것이다. “상상력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어떻게 하나?” 푸념은 이어진다. “경험이 없어서.” “책을 많이 읽지 않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심지어 가방끈이 짧아서, 어쩌고저쩌고.이 말들은 필계나 변명,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