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 참 오달지다
나는 흠칫 놀랐다.
“어머, 저게 뭐야?”
장터를 가던 길목에 하얀 꽃이 고개를 숙이고 얌전하게 서 있었다.
가던 발길을 멈추고 꽃을 유심히 쳐다봤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 꽃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처럼
화들짝 반갑다.
“야, 너 참 오래간만이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 꽃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지나간 시절이 오르르 내게로
쏟아져 왔다.
아마도 5월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중순 무렵에 흙속에 납작 엎드려 자손의 번창을 꿈꾸었을 그 꽃은, 7월과 8월 사이에 꽃을 피워내려고 하루에 3~4cm씩 몸을 늘여놓기에 바빴을 것이다. 1m 남짓한 줄기를 세워 솜털이 부숭부숭한 꽃잎을 매달게 되면서, 자손 번창이라는 목표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게 되었을 거다.
꽃은 누가 볼 새라 이른 새벽부터 피어서 농부의 훈훈한 미소와도 맞장구를 쳤을 테다. 늦둥이 막내의 재롱처럼 사근사근 농부의 애간장을 태웠을 것만 같다. 어릴 때 마주했던 하얀색 꽃잎은 수줍어서 땅만 보고 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모습은 변함이 없다. 자세는 공손하되 욕심은 많다. 좁은 씨방 안에 무려 80여개나 되는 알갱이들을 꾹꾹 눌러 채워 넣으니 말이다. 수확기가 되면 방을 뛰쳐나오려는 입자들로 입이 절로 툭툭 벌어졌다.
그 시기가 8월에서 9월 초순이다. 초가을의 어느 날, 농부의 두툼한 손에 사정없이 낫질을 당하게 되면서 그렇게 부지런을 떨며 키워냈던, 초본 식물로써의 생은 일단 마감하게 된다. 그런 후 서너 다발씩 묶여져 양지바르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세워진다. 위는 묶여있고 가운데는 비어있는 삼각대 모양의 ?.
그 ? 뒤에 숨거나 덩치가 작은 아이는 속 빈 공간으로 숨어들기도 했다. 술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작은 몸을 공처럼 오그리고 숨을 죽이던 미운 일곱 살의 모습들이 ?에서 새순처럼 되살아난다. 그럴 때 술래가 아닌 주인에게 발각되는 날엔 호된 꾸중을 뒤통수에 매달고 뛰어야만 했다.
바짝 마른 단은 곧 멍석으로 옮겨져 매 타작을 당했다. 거꾸로 매달려 막대기로 매를 맞았다. 온 사방으로 튀어나가며 5월에서 9월까지의 짧은 생애를 토설해야만 한다.
그 억울한 사정이 청명한 가을날에 변호인도 없이 치러지게 되었다. 남편에게 불만이 있는 아낙네는 단을 사정없이 쳐대면서 분풀이를 했고, 아내에게 할 말 못한 남정네는 그것을 멍석위에 내동댕이치면서 화풀이를 했으리라. 이렇게 화풀이를 당하고도 모자라 곧 방앗간으로 실려 갔다.
기계로 들들 볶이면서 온몸에 화상을 입고 타닥거리며 뛰쳐나오기도 했다. 이 때 그것의 화상은 사람의 후각을 파고들어 한 움큼 입속에 털어 넣고 싶은 욕구가 출렁거렸다. 그것들이 노릇노릇해질수록, 몸부림을 칠수록 입안에 침이 고여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차라리 씻을 때 쭉정이를 자처하고 떠내려가기라도 했다면 이다지 무지 몽매한 고통은 면할 것을 그 많은 알갱이들 중에 떠나버린 무리들 속에 끼지 못한 출중함이 원망스럽겠다.
방앗간에서 혹독한 고문을 통해 실오라기보다 가벼워진 상처로 남겨진
그것들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으깨다 못해 이젠 아주 기름을 짜버린다.
혹독한 경로 끝에 2홉들이 병에 깔끔하게 담겨져 하나의 상품으로 완성된 그것들.
사람들은 이미 과거를 청산 한 그것들의 다른 모습엔
일말의 미안하다거나 죄스럽다거나 후회한다거나 그런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말간 이성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고소한 결과물에 환호한다.
코를 킁킁거리면서 식욕을 불러 낼 뿐이다.
참기름 병뚜껑은 빨간색이고 들기름 병뚜껑은 노란색이다. 그러니까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노란 모자를 쓴 아이보다 더 고소하고 더 비싸고 사람들로부터 선호도가 높다.
진열대에서도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노란 모자를 쓴 아이보다 앞줄을 차지하고 앉아서
노란 모자를 위협한다.
“나는 갑이고 너는 을이야 임마”
주눅 든 노란 모자도 그걸 인정한다. 그래서 맥없이 뒤로 밀리고 있어도 암말 못한다.
국산 레벨이 붙은 참기름은 비싸게 팔려나가면서 사람들의 입맛을 살리는데 한 몫을 톡톡히 해낸다. 고사리, 콩나물, 시금치, 미나리, 당근, 오이와 어우러진
비빔밥 언저리에 찔끔 아껴가며 부어진 참기름 한 방울.
비빔밥 속에서 볶은 참깨와 기름이 함께 뒹굴면서 둘은 서글픈 조우를 한다.
그 나물들의 본래 향과 맛에 훨씬 진가를 발휘하게 만드는 주연이되 조연인 참깨들의
출연이 없었던들 어찌 그 비빔밥이 그리 고소하고 맛있을까.
비빔국수에 고명으로 올라앉은 깨알들의 진통이 없었던들 어찌 비빔국수의
화려한 무대가 탄생할 수 있으랴!
아무리 누추한 부엌에서 만드는 반찬일지라도 참기름 한 방울이 낙숫물처럼 툭 떨어졌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호화찬란한 주방을 압도하기도 하고 초라한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기도 한다. 너무 작아서 국물에 둥둥 떠다니다 먹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때가 있는
참깨지만 입맛 잃은 환자에게 고소한 참기름 한 방울은 달아났던 기력을 회복시키는 보양제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다. 게다가 시커멓고 투박한 쑥 개떡에 참기름 한 방울을 반지르르하게 문질러놓으면 금세 명품 떡으로 둔갑 시키는 마술성도 가지고 있다.
너무나 작아서 모이고 모여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초소형 참깨는
그 작은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우리네 입맛을 살려내는데 한몫 했다. 땅속에서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던 그것은 고난의 행군을 거듭한 끝에 야물게도 양념 1순위에 자신을 척 올려놓았다.
언제나 음식의 제일 꼭대기에서 그 음식의 빛을 내며 으스댄다.
절대 작다고 얕볼 일이 아니다.
미워하던 이가 잘못되면 깨소금 맛이라고 양념처럼 고소함을 쳐대는 참깨는 울퉁불퉁 치열이 고르지 못한 사람의 齒에도 가만히 끼어서 웃을 때
웃는 이의 용모에 초를 치는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
그렇게 고소하고 맛있는 참깨가 어쩐 일인지 통통하게 살이 찐 이(?)와 비슷하게 생겼다. 자세히 들여다보면‘이’는 이동 수단으로 극세사 다리를 세 쌍이나 갖고 있다.
두 개의 긴 더듬이도 있고 새카만 눈도 있다. 게다가 발톱까지 있다. 엄연히 ‘이’는 절지동물이고 깨는 식물이니 종이 다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맛있는 참깨가 왜‘이’와 닮았는지 참깨에게는 참 자존심 상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위생이 엉망이었던 50~60년대 내 어린 시절엔 참‘이’가 많았다.
옷 솔기에 납작하게 포진하고 있던‘이’들이 옷을 벗고 들여다보면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사람의 몸을 근질거리게 만들던 살찐‘이’들의 행렬은 물에 떠내려가는 참깨와 흡사했다. 머릿속엔 흑임자가 살았고 옷 속은 指麻(흰깨)의 영역이다.
노곤하게 늘어지던 한 밤중에 胡麻(흑임자)와 指麻의 공격은 정말로 짜증나고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한 낮에 그 敵들의 소탕작전이 벌어진다.
옷의 박음질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들을 붙잡아 넓적한 엄지 손톱위에 올려놓고 우직 끈 힘을 준다. 통통한 깨알들이‘톡’ 터지는 소리와 동시에 엄지손톱은 흡혈귀의 피로 얼룩졌다.
징그럽기는 하지만 적을 한 마리라도 소탕 했다는‘톡’의 쾌감이 깨알을 씹는 것만큼이나 고소하다. 머릿니를 잡을 때는 벽에 걸어두었던 달력을 부~욱 찢어서 그 뒷면의 하얀 여백을 방바닥에 펴놓고 참빗으로 촘촘하게 빗어 내렸다. 그러면 시커먼 흑임자들이 한 여름의 소나기처럼 달력 뒷면을 향해 후두두둑 떨어져 내렸다. 죽어라 달아나는 것들을 물에 떠내려가는 흑임자처럼 거둬서 방망이질을 해댔다. 설익은 참깨 터지는 소리가 달력 위를 등천하는 시간이다. 겨울철엔 화로 속으로 던져 화형식을 치러주곤 했다.
어떤 때는 엄마의 무릎에 눕혀 머릿속 ‘이’를 잡던 시간이 길어지면
나는 짜증을 내면서 그만 하겠다고 앙탈을 부렸다. 그러면 엄마는
“이거 다 잡고 나서 이따 깨소금 한 입 줄게 조금만 참아봐.
오! 여기도 있다 막 도망친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다급한 소리로 흑임자 소탕작전에 박차를 가했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꼼짝 못하게 입막음 하는 수단으로 깨소금 한 숟갈을 내 입에 퍼 넣었다. 그러면 만사형통이다.
그것을 먹는 시간은 어떤 것도 부럽지 않았다.
뭐든 깨작거리기만 하던 내게 깨소금이라면 무조건 통과다.
참깨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알짜배기다. 기름을 짜고 남은 깻묵은 어린 시절엔 엄마를 쫓아가서 얻어먹었었다. 깻묵은 방앗간 한쪽에 맷돌처럼 둥그런 고형체로 쌓여 있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고소하고 텁텁하고 느끼하고 씁쓰름하던 깻묵을 과자처럼 들고 다니며 먹었다. 그것이 무슨 알천이라고 주지도 않으면서 쫓아다니던 친구들을 애태우게 만들었는지 풀뿌리라도 먹어야만, 했던 아리고 남루했던 시절의 풍경이었다.
우리나라 참깨는 자국 사람들의 모습을 닮아선지 더 작고 단아하다. 참’이란 접두사를 붙이길 잘했다. 고소한 풍미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렇게 맛있는 국산 참깨를 아무 때나 슬카장(실컷, 맘껏)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시대인가!
앙탈만 부렸다 하면 언제나 내 입으로 퍼부어 지던 깨알들의 부서짐은
먼 옛날 그리운 시절로 나를 슬며시 불러낸다.
지금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 들일 수 있는 그것이지만 유실되어 버린 어린 꿈은
돌아올 길이 없다.
행여 흘릴 새라 두 손으로 받쳐 들던 엄마의 손도, 수저위에 소복하게 올려 졌던 깨알들도,
극성스럽게 알을 까대던 ‘이’들도 세월과 함께 떠내려갔다.
아! 지금은 참깨 꽃이 한창 피는 7월이다. 잊고 지냈던 까마득한 시간들이 장터로 가는 길목의 깨꽃 속에서 고스란히 떠올라 나를 전율케 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깨꽃은 그대로인데 그때의 내 그림자는 행방불명이다. 그때가 그리운 7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