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가끔은 공부를 한다. 의미가 없고 말장난 같지만 [해야 하는 공부]와 [하는 공부]사이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자판을 열었다. 전자는 피동적이거나 수동적인 반면 후자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이다. ‘젊어서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고, 나이가 들면서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해두고 싶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아닐 수도 있고 순서가 바뀔 수도 있다.
학창시절에 부모님께서 그렇게 공부하라고 애걸복걸하고 윽박지르기도 했었지만 [해야 하는 공부]는 하지 않고 또래들과 어울려 기타며 야전을 울러 메고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 일들이 학창시절의 전부였다는 것은 이미 밝힌바 있다. 이렇게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놈을 옛날에는 상놈이라고 불렀다. 그래 나는 상놈이었다. 아니 상놈이기보다는 차라리 쌍시옷을 더하여 ‘아주쌍놈’이었다. 우리 집안은 예로부터는 양반가문이었지만 부모님말씀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놀아났던 나는 가문에 똥칠을 하고 다닌 ‘아주쌍놈’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 후 사회에 진출하고는 조금씩 반성하고 인생을 걱정하다가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자발적으로 [하는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젊었을 때 [해야 하는 공부]는 때려죽여도 하기가 싫었지만, 늙어가면서 [하는 공부]는 하고 싶어도 여러 가지로 하기가 곤란하기만 하다. 정신적으로는 밀려오는 유혹 때문에 그렇고 육체적으로는 생각대로 몸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살아가면서 주색잡기, 음주가무 등등 공부 외적으로 배워뒀던 흥미로운 일들이 잡다하게 많아 공부를 하다가도 유혹에 빠진 나머지 “이 나이에 무슨!”하고 공부가 배척당할 위험이 크고, 특히 육체적으로 몸은 마음먹은 대로 따라주지를 않는 가운데 말초신경만 예민해져 편향적인 논리 속에서 자기 합리화에 빠져들 소지가 있다. 이는 공부를 시작할 때뿐만 아니라 공부를 하는 도중에서도 약간만 권태롭다고 느껴지면 시도 때도 없이 회의적인 생각이 엄습해오고, 계속해야 할까? 말아야할까? 선택을 요구받거나 타당성을 재삼 확인받게 되는 것이다.
보통사람은 쉰 살을 넘기면서 노안이 오기 시작한다. 노안이 오면 가까이 있는 물체가 흐릿하게 보이기 마련인데 이때는 돋보기를 쓰거나 근시안경을 낀 경우 안경을 벗어야 잘 보인다. 학창시절 때 학자풍의 대명사였던 사회선생님이 어느 날 수업 중에 안경을 벗었던 일이 있었는데 안경을 벗은 선생님의 모습에 조금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콧잔등에 안경자국하며 들어간 눈이 선명하게 나타나서 그 잘생겼던 얼굴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던 생각에 남들 앞에서는 웬만하면 안경을 벗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 인사하고 명함을 건네받으면 명함의 작은 글씨가 안경을 통해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경우 대충 받아 보는척하고 지갑에 넣거나 어떤 때에는 상대방의 정체가 너무 궁금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치켜뜨면서 안경너머로 보기도 한다. 숨겨야할 치부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참 불쌍한 광경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요즘은 공부를 할 때에 책에서 의문이 나는 점이 있으면 웹상에서 자료를 찾아 참고하기도하고, 파일로 노트를 만들어 PC에 저장하고는 필요할 때마다 파일을 열어 책과 대조하면서 공부를 할 경우가 많은데, 이때는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또는 올렸다가 내렸다가, 온갖 궁상을 다 떨면서 공부를 해야 한다.
젊은 사람은 정신회전의 속도가 곧 육체의 순발력으로 나타나지만 늙은 사람은 정신과 육체가 따로 노는 경우가 다반사다. 밥을 먹을 때에는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해도 다 먹고나서보면 어린 아이의 그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지저분한 것처럼 보인다. (오해 없기를, 필자의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필자의 나이 아직 환갑은 넘지 않았고 남들한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지만 벌써부터 그렇게 느껴지는 것만 같고 괜히 신경을 쓰고 있는 편이다.
가족을 동반하여 등산을 간다고 할 때, 젊은 사람은 [가족과 함께] 등산을 간다고 하지만 늙은 사람은 [노구를 이끌고] 등산을 간다고 표현한다. 젊은 사람의 경우 가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가족구성원을 챙겨야 할 필요가 있지만 늙은 사람은 자기육신하나 챙기는 것도 바쁜 것이다. 게다가 필자의 경우는 [노구와 거구를 동시에 이끌고] 등산을 가야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마누라 등살에 못 이겨 가끔은 그렇게라도 등산을 가는 편이다.
흡연으로 낭비되는 시간 또한 무시할 수가 없다. 다행히 나는 오래전에 죽기 살기로 힘들게 담배를 끊었지만 대략 이십년간의 흡연경험이 있었던 나는 단순흡연자가 골초가 되어가는 과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골초인 경우 최소한 삼십분마다 십분 정도를 시간을 연기로 날려 보낸다. 정말 아깝기 짝이 없는 시간 아닌가. 물론 오른손에는 볼펜을 왼손에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고 한꺼번에 두 가지를 진행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경우 대단한 숙련을 요한다. 잘 못하다가는 손가락도 담뱃불에 델 염려가 있고 책에 떨어진 담뱃재를 수습하다가 시간 다보내고 만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지만 먼 친척 자형 중에는 왼쪽입술에 담배를 문채로 오른쪽입술로 커피를 마시던 분이 계셨었다. 실제로 집사람과 함께 셋이서 부산의 어느 다방에서 만나서 대화중에 집사람이 옆구리를 쿡쿡 찔러 발견했던 사실인데 적어도 그 정도는 돼야 두가지일을 한꺼번에 진행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하늘의 조화’라는 말이 생각이 난다. 뭔가를 복수로 기대하고 있을 때 하늘은 전부를 한꺼번에 주거나 연속하여 퍼주지는 않는다. 반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비로소 하나든 둘이든 자기 주고 싶은 대로 내려준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고약한 성격의 소유자가 바로 하늘이다. 아주 절실하다면 뭔가를 하나만 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해야 한다.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이렇게 되면 아마 헷갈려서도 줄 수가 없게 되는 것 같다.
뭔가 요행의 힘으로라도 둘을 한꺼번에 필요로 한다면 요구사항중 하나는 분명 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둘 다 가질 수 없게 된다. 실천해보면 거의 팔구십 퍼센트는 맞아떨어진다. 필자가 지금까지 경험했거나 느낀 바로는 그랬다. 요행은 곧 우연이라는 것이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인데, 엄격히 따지자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요행이라는 것은 우연히 생기는 것도 아니고 또한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만약에 인생의 모든 과정이 우연이라면, 또는 필연이라면, 뭔가를 할 이유도 없고 해야 할 이유도 없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또는 노력이나 의지에 전혀 관계없이 지극히 우연히 발생된다면 [해야 하는 공부]나 [하는 공부], 이따위의 짓은 해야 하거나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봉선화의 씨앗이 ‘톡!’하고 저절로 터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연인 것처럼, 또는 필연인 것처럼, 그러나 무언가의 힘이 작용하지 않고서는 터질 까닭이 없다. 바람이 불었거나 대기압이 작용했거나 씨앗의 주머니에서 어떤 모멘트가 작용했거나, 여러 가지의 원인 중에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터진 것이다.
위 사실들을 비추어보면 모든 것은 분명 하늘의 조화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하늘은 곧 내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또한 나에 대한 모든 것 또는 나를 향한 모든 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나이가 들수록 정말 쉽지가 않은 공부다. 공부도 공부지만 가끔, 가뭄에 콩 나듯이 나는 책을 읽는다. 그것도 한권 읽는데 족히 한 달은 걸린다. 어떤 사람은 하루 만에 읽어버리는 책인데, 나는 근 한 달을, 경우에 따라서는 두석 달은 세월아 네월아 하고 읽어야 다 읽는다. 한 번에 수 페이지 읽고는 읽던 책을 덮어버리기도 하고 딸랑 몇 줄 읽고 덮어버리기도 한다. 읽다보면 독서보다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공부할 때와 마찬가지로 주색잡기의 유혹에 넘어가버려 책 한권을 읽는 것을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없잖아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별 영양가가 없었으니 약간은 영양가 있는 말씀을 인용하자면, 옛날 독서방법으로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었다고 하는데,『첫 번째 방법은 박학(博學)으로 두루 혹은 널리 배운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심문(審問)으로 자세히 묻는다는 것이고, 세 번째 방법은 신사(愼思)로서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 방법은 명변(明辯)인데 명백하게 분별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방법은 독행(篤行)으로 곧 진실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실천한다는 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 그러나 세월이 고속도로 상에서의 주행속도에 비견되고 세상이 급변해가는 요즘에는 정독과 속독이라는 독서방법이 있을 뿐이다. 정독은 단어의 뜻을 알아가며 자세히 읽는 것이고, 속독은 빠른 속도로 필요한 정보만을 파악하면서 읽는 방법이다.
그런데, 나는 이도저도 아닌 지독(遲讀)이라는 나만의 독서방법으로 읽는다. 더딜 遲에 읽을 讀이라! 지독하게 느리게 생각날 때마다 천천히 읽는다는 뜻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단어하나하나를 꼼꼼히 음미해가면서 읽는 편이다. 한참 읽다가 아까 읽었던 중요한 문장이 머릿속을 스치면 되돌아가서 거기부터 다시 시작하여 읽기도 하고, 문장의 뜻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는 그 절만 되풀이해서 몇 번이고 읽기도 한다. 정말 지독(遲讀)한 독서방법이 아닐 수가 없다. 진도가 문제일 뿐 이건 독서라기보다는 숫제 고시공부수준이다. 그래도 머리에 남은 것은 별로 없으니 역시 IQ100의 머리가 어디에 가겠는가!
최근 들어 나는 마음이 내킬 때 마다 오늘처럼 일기를 쓴다. 보통 일기라면 그날 있었던 일들을 글로써 기록하는 것으로, 저녁에 쓰거나 그 다음날 아침에 쓰거나 하루 만에 써야하는 게 일기인데, 나는 일기를 몇날며칠씩 쓴다. 여유가 생길 때마다 조금 쓰고는 덮어두고 생각나면 또 쓰고, 이렇게 여유를 두고 쓴다. 아주 가끔씩은 하루 만에 쓸 때도 있지만 보통은 최소사나흘은 쓰는 것이 나의 일기다. 일기를 쓰면서 이 생각 저 생각 옛날생각을 애써 떠올리려 노력을 한다.
일기를 쓰다보면 평상시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쓸모 있는 소재들이 자주 지면위에 떠오르는 편이다. 쓸모 있다고 해봐야 자아도취에 빠진 것에 불과하겠지만. 깊숙이 잠겨있는 많은 생각들 중에 괜찮은 뭔가를 하나 건져내면 월척을 낚은 것처럼 흥분되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보통 일기는 훗날 자신만이 추억하고자 현재를 배경으로 써두는 것인데, 나는 옛날이건 현재건 시간적인 개념에 구애받지 않고 또한 사실에 얽매이지 않은 채 주로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면위에 기록해두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바라고 쓴다는 거다. 일기를 쓰고 나서 자아도취에 빠지면 그때는 일기를 블로그에도 올리고 카페에도 올린다. 그래서 맞춤법도 문장도 썼다가는 고치고, 출품할 작품처럼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이건 일기와는 사뭇 다른 수필처럼 되고 만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듣기 좋게 내가 쓴 일기를 감히 수필이라고 부른다. 나는 오늘도 일기라는 이름을 빌려 한편의 수필을 쓴다.
2013년 09월 22일 (일) 맑음
2015년 09월 20일 (일) 修正
김혜정15-09-22 19:52
누구나가 한번쯤은 생각했을 문제를 아주 편안하게 편안하게 옆에서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선생님의 일기라는 이름을 빌린 수필이
공부에 관한 글과 독서에 관한 글을 나누진다면
독자를 더 몰입시킬 수 있는 훌륭한 글 두 편이 탄생하지 않을가...생각해봅니다.
등산에 관한 생각과 표현이 참 재미있고 아하~!! 하고 무릎을 치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창우15-09-23 19:18
감사합니다. 저는 블로그에서 <쉰들러 일기>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가끔은 글도 아닌 글을 써 올리곤 했는데, 딱 2년 전에 올려 놓은 이 글을 보니 괜찮다 싶어 조금 수정하여 올렸습니다. 요즘도 시간이 나면 아주가끔 글을 쓰고 있는데, 문제는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자주 자아도취에 빠지는 겁니다. 그래도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시니 기분이 엄청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