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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플라나무와 박 선생님(소설)    
글쓴이 : 김창수    15-06-17 22:07    조회 : 6,712
포플라나무와 박 선생님
1997.11.20작성 18년 만에 원고 교정 수정판
자전적 소설(200자 원고지 80매 정도)

고향가는 길은 바둑판처럼 길게 뻗어져 있었다. 왕복 2차선 도로는 거칠 것 없이 늘어져 있었고 그 위를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햇볕이 쨍쨍거리는 한낮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춘을 마음껏 구가하려는 듯 청춘남녀를 태운 오토바이가 무리지어 쉴 새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도롯가에는 이름모를 꽃들이 제몸에 겨운 듯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저 너머 과수원에는 빛고운 과일들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정축년 한가위는 우리 곁으로 예전보다 일찍 다가와서 고향으로 향하는 계림의 마음을 한층 들뜨게 하였다. 계림은 시골에 있는 선산에 벌초를 일찌감치 끝낼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는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정을 넘기더니 열차 시각이 가까와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잠을 자는둥 마는둥 곰팡이가 핀 마냥 버석한 얼굴을 더듬더듬 씻고 어제 저녁에 다려놓은 간편한 옷차림으로 나갈 채비를 꾸렸다.
 
시간이 어정쩡해서 밥이라도 먹으려니 가뜩이나 위장이 좋지 않은 그로서는 선뜻 내키지 않았으나 마누라는 먼 길을 떠나는 그에게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일렀지만 그는 밥 대신에 어제 밤에 인근 슈퍼에서 사다 놓은 우유를 벌컥 삼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새벽 두시 삼십 오분, 행선지 기차를 타는데는 아직도 시간이 좀 남았건만 그놈의 택시운전기사 양반은 시간에 쫓기는지 아니면 성질이 되게 급했는지 그가 택시에 타자마자 젊은 혈기를 과시라도 하듯 쏜살같이 질주에 질주를 거듭했다. 소위, 총알택시란 바로 이런게로구나! 가끔씩 방송에서 나오던 총알택시 사고를 남의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겨 보아왔던 그는 자신이 막상 총알택시를 타자 지레 겁먹은 표정이었다.
 
그 택시기사는 과속으로 질주하다가 네거리에 다다르자 신호등이 황색 신호로 바뀌고 있음에도 마치 사선을 넘나들 듯이 그대로 네거리를 총알처럼 건너가 버렸다. 그는 아직도 시간이 좀 있으니까 “천천히 갑시다” 라는 말이 목구멍에까지 올라왔으나 행여 운전하는데 지장이 있을까 하여 숨을 죽이고 있었다. 오금이 저려왔다 아니, 괜히 운전기사 양반한테 새벽부터 싫은 소리를 하여 오히려 더 난폭 운전을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서 가만히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과속 질주를 하더니 어느덧 눈깜짝할 사이에 D역에 도착하였다.
 
역 대합실에는 휴일을 즐기려는 청춘남녀들이 여기저기 무리지어 앉아 있었고 그들 옆에는 다리를 움츠리고 기역자행으로 잠을 자고 있는 사람, 자기집 안방처럼 타인의 이목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큰 대자로 뻗어 자는 사람, 니은자형으로 그래도 반듯하게 앉아서 자는 사람 등 잠자는 유형도 가지각색이었다.
 
개찰구 입구 모서리에는 웬 늙은네가 벽쪽을 향하여 쭈그리고 앉아서 무슨 기도를 그리 열심히 하는지 혼자서 고개를 흔들어대며 쉬지 않고 중얼중얼 거렸다. 그는 눈요기라도 하듯이 쓰윽 역 구내를 한바퀴 둘러본 뒤에 매표소로 향했다.
 
" A행 새벽 두시 삼십 오분 한 장요? "
" 그 시간에 기차는 없습니다. "
" 예? 분명히 전화로 확인하고 왔는데요. "
" 손님 잘못알고 오셨습니다. 두시 삼십 오분 기차는 낮 기차입니다 "
" 젠장, 이놈의 여편네 ! " 그는 대뜸 신경질부터 났다.
어떻게 기차시간표를 알아봤길래 낮인지 새벽인지 구분도 못하고, 망할년 좀 확실히 알아보지 않고 뭔가 좀 이상하다 했더니...
" 다음 기차는 언제 있습니까 ? "
"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입니다 "
 
계림이는 빳빳한 일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고 차표 한 장을 끊었다. 시계는 새벽 한시 오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잠이라도 좀 더 자고 오는건데, 기차를 타려면 아직 서너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고 그렇다고 다시 집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에라, 모르겠다. 역 구내에서 어떻게 버티다 보면 기차 시간이 다가오겠지. 그는 역 구내를 다시 한 바퀴 둘러본 후에 역 바깥으로 나갔다.
 
휘황 찬란한 불빛들이 적막한 밤을 깨우고 있었다. 밤은 깊었건만 저 멀리 빌딩사이로 잠못 이루는 불나비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불나비들은 오색찬란한 불빛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새들도 저녁이 되면 자기 품으로 날아가건만 가여운 불나비들이 밤을 낮삼아 흥정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또한 그 불나비들 틈새로 마치 악어와 악어새처럼 그들 곁에서 기생하는 일단의 몰잇군도 더러 눈에 띄었다.
 
" 아저씨 하룻밤 자고 가세요 서비스도 좋고 끝내줍니다 " 화장기가 짙게 배어있는 중년의 여자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그에게 접근해 왔다. "갈길이 바쁜 사람입니다 " 저만치 휘둘러대고 그는 자리를 옮겼다. 수명의 불나비들과 바람잡이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가는 손님들을 유혹했다. 밤을 잊은 역 주변은 요란스럽고 현란하게 이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짙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광장을 뒤로 하고 그는 다시 역구내로 들어왔다. 웬지 역 구내로 들어서자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았다. 마치 악의 구렁텅이를 벗어난 것처럼 저 밖의 바람잡이 사내 중에는 사람의 등을 쳐먹을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수수께끼를 하나 내었다.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동물이 무엇인지 아나?
사자? 치타? 귀신? 아니 그럼... 그건 바로 사람이란다 왜? - 일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시골 노인이 서울 아들네 집을 찾아가려고 명동역에 내렸는데 아 글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그 노인은 입이 딱 벌어지며 시골에는 젊은이는 없고 늙은이들만 주로 있어 놀리는 전답이 많은데 이렇게 많은 서울 사람들은 도시 무얼해서 먹고 사는지? 땅 한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터인데 ...
 
그러자 그 노인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엿듣고 있던 젊은이 왈 "여기 서울 사람들은 서로 등쳐 먹고 안삽니까? " 라고.... 웃지 못할 일화다. 만물의 영장입네, 지고 지순한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인간 스스로 자화자찬하고 있지만 그들은 오늘도 서로를 미워하고 싸우고 칼부림질을 하고 있다. 좀더 많은 재산을 가지려고 부자간에 형제간에 노사간에 국가간에 다툼질이 끊임없고 그렇게 하여 역사는 흘러 흘러 내려왔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보라 백수의 왕인 사자조차 생존을 위해 다른 짐승들을 죽이지만 분에 넘치는 욕심도 없고 배가 부르면 곁눈질 하지 않는다. 다만, 원시의 무기로 생존해 가고 있을뿐...
 
그는 잠시라도 눈을 부칠 빈 자리가 없는지 역구내를 한 바퀴 휙 돌았다. 그러나 그가 앉을만한 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다. 역 구내를 한바퀴 둘러 본 그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이층에는 사람들이 없었지만 앉을 만한 의자는 없었다. 그는 할수 없이 시멘트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바닥은 타일로 씌어져 있었으며 청소를 말끔하게 해서인지 반들반들 윤기가 쫙 흐르고 있었다. 간편한 외출복으로 나온 터라서 옷에 그리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바닥이 다소 차갑게 느껴져서 오래 누워있지는 못했다. 갑자기 일층 저 밑에서 터벅터벅 이층으로 올라오는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결에 그는 벌떡 일어났다. 혹시 역 보안원은 아니지 혹은 험상궂은 사내가 올라오는 것은 아닌지 다소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일층 계단으로 내려갔다. 일층 역 구내는 다시 사람들로 시끌벅적이었다. 방금 역에서 내린 승객들이 한 무데기로 우르르 역 구내를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역 구내는 다시 조용해지고 으스스한 바람이 엄습해왔다. 그는 일자로 뻗어져 자기집 안방처럼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한 아주머니 옆의 빈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는 앉아서 잠을 청해 보았지만 영 불평하였다. 다시 의자를 침대삼아 옆으로 드러누웠다 그러나 깊이 잘 수가 없었다. 기차를 타기에는 다소 지루한 시간이 남았지만 그렇다고 옆의 아줌마처럼 곤드레 만드레 잘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다.
 
한번 깊이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이 깊었다. 몇 번이고 몸을 뒤척이더니 저만치에서 기적소리가 바리톤 음성처럼 나직이 들려왔다. 그는 자리를 털고 역 출입구를 지나 A행 기차를 탈 수 있는 계단으로 총총히 내려왔다.
 
긴 엿가락 모양 밤새 달려온 기차는 D역에서 가파른 숨을 몰아쉰 뒤 손님들을 태우고 꽁지를 뒤흔들더니 다시 남동으로 힘찬 발차를 개시했다. 계림은 열차 객석 중간쯤에 앉았다. 객차 안에는 승객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띄엄띄엄 앉아있는 승객들은 다소 여유가 있어 보였다. 저마다 제일 편한 자세로 앉아서 책을 보고 있거나 삼류 에로물을 보면서 히히덕 거리거나 혹은 코를 벌렁 내밀면서 잠자는 사람 등 실로 다양한 군상들의 집합체였다. 계림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인지 열차 객석에 앉은 후 잠을 청했다. 아니 잠이 몰려왔다고 해야겠다. 꿀맛같은 잠을 얼마나 잤을까. 하마터면 그는 하차 역을 지날뻔 했다. 천상에서 들려오는 안내 방송이 구름을 비집고 나온 듯 가녀린 목소리가 비몽사몽간에도 하차역 안내 방송만큼은 어렴풋 귓전을 때렸다.
 
" .... 승객 여러분 잊으신 물건이 없으신 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시고 ... 안녕히 가십시요 .... "
" .... 다시 한 번 ... A역입니다 ... "
그는 부리나케 A역에서 지친 몸을 내렸다. 긴 미로처럼 생긴 역 지하 통로 주변 벽에는 A시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듯 시내 전경과 전통 소주, M댐 등의 사진 등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마치 A시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바로미터해주는 것 같았다. 역 지하 통로를 빠져나온 그는 볼일을 보러 D역 구내 안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토일렛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D역 구내에서 남자 토일렛으로 가자면 여자 토일렛으로 지나야 했는데 얼핏 보이는 게 담배 연기가 두리뭉실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금 그와 같이 A역에서 내린 여고생인 듯한 앳때 보이는 학생이 화장실로 들어서마자 그동안 세인들의 눈에 꽉 막혔던 끽연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자 한 듯 연신 담배 연기를 펑펑 뿜어대고 있었다.
 
역에서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는 200여 미터 남짓의 거리에 있었다. 버스 차창 너머로 시내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있었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잘 단장되어 있었다. 수년 전부터 이 소도시에도 아파트가 듬성듬성 들어서더니 이제는 지방자치 시대를 열면서 더욱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예전보다는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소도시 주변에는 대규모 수력 댐이 두 개나 들어서 있어서 댐이 들어서기 전과 들어선 후의 기상 변화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댐이 들어선 후에 벼의 낟알이 예전처럼 단단히 여물지 못하고 짙은 안개속에 이 도회의 하루가 시작되고 겨울에는 예전보다 기온이 많이 내려가는 바람에 난방비도 그만큼 더 소비되는 도시가 되었다.
 
그는 일전에 ㅇㅇ 지방신문 사회면에서 "댐 부근 지역개발은 요원한 것인가? " 라는 부제가 붙은 심층 취재 기사란을 읽은 적이 있다. 그야말로 댐 건설로 인한 혜택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주로 보면서 댐 부근 지역에는 별로 혜택을 입은 것도 없이 그 피해가 크다면서 북부 지역 주민들이 시위를 했다는 기사였다. 이러한 주민들의 불만을 다소라도 무마하려는 듯 가시적이고 즉흥적인 발상들이 속속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이 소도시 주변을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도회지 진입로에는 토산품 판매장이 들어섰다. 또한 인근에는 어린이 놀이용 유희물이 들어섰지만 지금은 인적이 뚝 끊긴 상태에서 잡초들만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시행정의 표본이 아닌가 하고 그는 씁쓰름한 표정을 지었다.
 
안개에 휩싸인 강 상류에는 보조댐에서 시원스런 물줄기가 불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 위로는 마치 베일에 싸인 그 무엇을 감추려는 듯 흰구름이 뒤덮여 묘한 운치를 그려내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 흰구름 너머로 많은 보물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우선 댐 상류로 올라가는 길목 좌측 편에는 제비원이 들어서 있었고 조선시대 양반 고택들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댐 주변에는 민속 마을이 아담하게 들어서 있다. 또한 위쪽에는 유학자들이 후학을 가르치던 서원이 지근 거리에 있었다. 전통의 도시요 이 나라 유교 문화의 요람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성 싶다.
 
구 도심에서 신 도심지로 향하는 길목엔 강변 도로가 시원스레 뻗어 있고 영남권의 젖줄 낙동강이 천 년의 세월을 부대끼고 아무 말 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 위를 아치형의 다리가 동서를 이어주고 다리 건너편에는 북부지역에서 제일 큰 병원이 우뚝 서 있다. 신 도심지 끄트머리에는 북부 지역의 교육의 요람이자 주민들의 자긍심을 북돋아준 A대학교가 찬연하게 서 있었다.
 
이제 A시에서 J면까지는 산 고개를 휘돌아 몇 개의 다리를 건너면 된다. 아득한 저 멀리 M댐 수면 위로 철새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이따금 부는 산들바람에 물결이 요동친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 그가 어렸을 때 가끔 놀러갔던 외가집은 지금 수몰 지역이 되어 그 터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주변은 물고기들이 노니는 큰 호수가 되었다. 외가집은 수몰되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로 초가집으로 면 내에서도 얼마 남지 않은 명물이었는데 그 놈의 댐 건설로 인하여 자취도 없이 수면 아래로 급강하 해버렸다. 아니 다른 집은 몰라도 그 초가집은 분명 수중 저 밑에서 썩지 않고 용왕님의 별장으로 이용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M댐이 건설되기 전만 해도 A시에서 J면으로 가려면 산모퉁이 굽이굽이 돌아 잠깐 눈을 부쳐도 될 정도로 멀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댐 위로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위를 버스가 지나면서 장활한 풍경을 감상하노라면 어느 새 버스는 마지막 다리를 건너고 마는 것이다.
 
도시로 도시로 향하는 행렬이 계속 이어지면서 시골에는 손꼽을 정도로 일꾼들이 없다. 그러나 삶이 풍요로워지면서 해마다 시골의 전경도 많이 달라졌다. 도로 주변에는 ㅇㅇ모텔, ㅇㅇ식당 등 숙박업소와 식당이 경치 좋은 곳에 띄엄띄엄 들어차 있었다. 그것은 모두 다 외지인들을 위한 안락처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고향 사람들에게는 별로 혜택이 돌아오는 것도 없이 촌로들은 그저 쓰레기만 치울 따름이었다.
 
계림이는 J면에서 하차하여 다시 N행 완행버스를 타려고 오백 오십원 짜리 차표 한 장을 끊었다. 몇 년 만에 타보는 시내버스이었던가! 고향을 등진 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고향은 어떻게 변했을까? 물론 몇 년 전에도 할아버지 묘소 이전 때문에 고향을 한번 들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묘소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고향 마을을 들리지 못했다.
 
시내버스는 어느덧 갈구리 입구에 다다랐다. 창밖에는 반변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자라와 거북이가 노닐던 천연 강물이 지금은 오염이 되어 강바닥이 잿빛으로 둔탁해 보였다. 워낙 오지라서 이곳에는 변변한 공장 하나 없다. 다만, 토질이 퇴적암이라서 비만 오면 씻겨 내려가서 물을 흐려놓기도 한다.
“아니 전에는 포플러나무도 많이 있었는데 ...”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계림은 혼자 중얼거렸다. 갈구리 냇가에는 그가 국민학교에 다닐때만 해도 잡초와 풀들이 모래톱 사이사이로 제법 무성하게 자라서 여름에는 피서지로는 더할나위 없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냇가에서 50여 미터 들어간 자리에는 포플라나무가 일렬로 쭉 늘어서 있었는데, 그 포플라나무의 소유자는 다름 아닌 그의 중학교 은사인 박희윤 선생님이셨다. 박 선생님은 포플라나무를 수백 그루 심으셨다. 포플라나무는 냇가의 비옥한 무기질과 각종 영양분을 섭취하여 그가 국민학교 상급생이었을 때는 제법 쓸만한 재목으로 자라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포플라나무 주변은 수업을 파한 후에 좋은 놀이터요 씨름장이었다. 계림이가 사는 마을은 학교에서 오리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는 수업을 파하고 친구들과 걸어오다가 가끔식 포플라나무 아래에서 놀다가 집으로 오곤했다. 포플라 나무 아래에서의 특별한 기억은 없지만, 문득 치기어린 격투가 떠올라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어느 무덥던 여름날 비는 몇 날째 내리지 않고 냇물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매미도 더위에 못 이기는 양 연신 울어대던 때에 그의 친구 병구와 싸움질을 한 적이 있었다.
 
“야! 임마 너는 맨날 나를 괴롭히고 이때까지 참아왔다만 오늘 한번 붙어볼래 ?" 계림이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그래 좋다 한 번 해보자 " 하고 맹구 녀석도 뒤질세라 맞받아쳤다.
맹구는 계림이와 같은 반 친구로서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를 자주 괴롭혀왔다. 그렇다고 신체적으로 괴롭혔다기 보다 수업시간에 제대로 공부를 못하도록 만화책을 불쑥 내민다거나 시험을 칠때 자주 정답을 가르쳐 달라고 옷깃을 잡아당긴다든가 하여 심술궂게 그를 괴롭혀왔다. 그럴때 마다 그는 천성이 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로 달려 들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쌓이고 쌓인 한을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미리 싸움을 걸었다.
 
" 그래 좋다 어디 한번 해보는 거다. " 먼저 싸움을 걸어놓고 다시 한 번 다짐을 하였다. "장소는 어디로 할까?" "갈구리 포플라러 나무 아래가 어때?"
"좋아 그럼 오늘 수업을 마치고 거기서 기다려" 하고 그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포플라 나무 아래 주위에는 수십 센티미터나 자란 만지면 금방이라도 손가락을 베일 정도로 이름모를 풀들이 무성히 우거져 있고 그 풀숲 사이사이로 띄엄띄엄 모래무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씨름을 한다거나 격투장소로는 안성마춤이었다.
 
"자! 덤벼봐라" 그는 기선을 잡으려고 먼저 악을 썼다. "퉤, 퉤" 맹구는 손바닥에 침을 한 번 뱉고 양손을 비비더니 굶주린 여우 눈동자를 하고 잔뜩 계림을 노려봤다. 이에 질세라 계림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먼저 맹구의 오른쪽 얼굴을 한방 갈겼다. 싸움은 싱겁게 끝이 났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피를 보면 한발 물러서는 법이다. 그것이 적개심을 돋구든지 혹은 항복한 자에 대한 일말의 동정이든 사람의 몸에서 쏟아내는 피는 주변의 험악한 분위기를 누그려뜨려 주었다.
 
맹구는 먼저 코피를 흘리자 금방 항복해 버렸다. 옆에서 심판처럼 지켜보고 있던 명철이 녀석이 안됐다는 듯 맹구에게 휴지를 주었다. 맹구는 아무 말없이 침을 퉤퉤 뱉더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휴지로 콧구멍을 막았다. 그 후 맹구는 다시는 계림을 집적거리지 못했다.
 
계림이가 살던 마을은 삼 개 군이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읍내로 통하는 지방도로 한 자락에 있다. 분지는 아니지만 마을을 사방에서 첩첩 산들이 둘러쳐져 있고 얕은 산 언덕배기를 객토화 사업을 하여 고만고만한 논밭들이 도로 양편을 두고 제법 널려쳐져 있었다.
 
집성촌은 아니지만 김녕(金寧) 김씨 문중과 밀양(密陽) 박씨 문중들이 4할을 차지하고 기타 여러 성씨 문중들이 오손도손 살아가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그리고 마을 골 안쪽에는 커다란 저수지가 드리워져 있고 그 저수지를 젖줄로 삼아 소량의 물들이 합쳐져 얕은 개울을 만들어 마을 중심지를 유유히 흐르고 그 시내를 경계삼아 마을에서는 개울 위쪽을 속칭 윗마라 부르고 개울 아래쪽을 아랫마라고 불렀다. 윗마는 오십 여호, 아랫마는 사십 여호나 되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그 당시에는 대개가 그러하듯이 모두가 생활이 어려웠었다. 한국 동란도 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서 마을은 피폐해졌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동란의 그늘이 너무 길어서인지 좀처럼 가난에서 헤어날 줄 몰랐다. 아이들은 미국에서 보내주는 원조 물자로 그러저럭 지냈어야 했다. 학용품에서부터 빵까지 다양한 생필품과 먹거리들이 쏟아졌다. 그래도 아이들은 마냥 굶주린 가운데에서도 미국이 보내준 빵과 건빵들을 맛있게 먹어댔다. 특히 하루 세 끼니도 잇기조차 힘든 아이들은 빵은 한끼 식량으로서의 값어치가 충분히 있었다.
 
계림은 윗 마을에서 성장하였다. 새해 초에 몹시 춥던 어느날 어머니는 계란 꾸러미를 사러 아랫 마을로 내려간 사이에 그의 동생은 큰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가 가게로 계란을 사러 간 사이에 무슨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계림이 살던 초가집 옆에 쌓아둔 낱가리에 불장난을 하다가 그만 낱가리에 불이 붙어 겨울 땔감용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낱가리를 거의 다 태우고 낱가리 옆 초가지붕에 까지 불이 붙어 올랐다. 밭때기 밑에 까지 내려가셨던 어머니는 불기둥과 연기를 보더니만 직감적으로 당신 집 주변에 불이 난 것을 알고 쏜살같이 달려오셨다.
 
계림이 동생은 겁에 질린 나머지 형과 방 안쪽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얼굴만 빼꼼히 내민 채 불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마침 이웃사람들이 불이야! 하면서 양동이에다 물을 길어와서 불을 껐다. 다행히 계림이의 초가집은 옆 귀퉁이만 조금 태웠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기 그지 없었다.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초가집 바로 옆 낱가리에서 불이 타오르고 금방이라도 초가집으로 불기둥이 번질 태세인데도 계림 형제들은 방 안에서 나올 줄 모르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엉엉 울고 있었으니......
 
그러나 일단의 동네 젊은 아줌마들은 나무로 엮은 담 밖에서 무슨 좋은 구경거리라도 있는 것처럼 자기들끼리 중얼중얼 거렸다. 그 와중에서도 계림은 우리 형제들을 구할 사람이 없는지 두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렸지만 누구하나 자기들 쪽으로 오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불구경만 하는 아줌마들이 미어졌다.
 
그 당시에는 계림이 집에서 돼지와 닭을 제법 키웠는데 태풍으로 닭장이 무너지면서 그 많은 닭들은 하루 아침에 허무하게 죽어버리고 부친이 피땀 흘려 일궈논 축사는 온데간데 없이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계림이 가족은 윗마에서 몇 년을 산 후에 마을을 가로지르는 얕은 개울을 건너 아랫 마을로 이사를 했다. 불기운에 그슬린 초가집을 버리고 마치 새 출발을 하려는 듯 스레트집을 새로 지었다. 주변에는 전부 논으로 둘러싸여 있고 계림이 집 바로 옆에는 교회가 하나 우뚝 서 있었다.
 
봄에는 주변 논에서 개구리들이 쉴 새 없이 울어댔고 여름에는 반변천에서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먹곤 했다. 마당 앞 텃밭에는 어머니가 심어놓은 토마토, 감자, 옥수수, 고추, 상추, 가지 등이 자라 제철에 맞는 과일과 작물을 수확하여 가족끼리 나눠먹는 등 풍족하지 않았지만 먹거리는 요즘 말하는 소위 웰빙 음식이었다.
 
한 여름에는 마당에 놓여있는 이동식 마루판에서 껍질을 조금 남겨놓은 옥수수와 함께 찐 피감자를 먹으며 밤 하늘의 별을 바라 보고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속에 잠들었던 추억은 동화속의 그림처럼 어렴풋 떠오른다.
그 당시 마을사람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박 선생님과 도로 건너편에 사시던 국민학교 이상면 선생님, 면 서기를 하시던 계림 아버지 등이 이 마을에서는 유지로서 농사를 전업으로 하지 않는 유일한 가구들이었다.
 
계림은 마을에서 2km 떨어진 B국민학교를 마치고 다시 국민학교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면 소재지 방면 그러니까 마을에서 2km 거리에 있는 I중학교로 진학하였다. 중학교에 입학한 계림은 이제 제법 의젓해졌으며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국민학교 때와는 달리 체계적으로 시간을 짜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입학식때 스스로 다짐하곤 했다.
 
그가 다니던 중학교는 야트막한 산 언저리에 있었으며, 주변에는 나즈막한 구릉들이 이어져 있고 몇 기의 묘기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공동묘지를 이장케 하고 그 주변에 학교를 세웠다. 학교는 두 개의 교사로 앞은 2층 교사로 뒤에는 단층 교사로 세워졌다. 그리고 단층 교사 뒤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개지가 있어서 운동장 끄트머리에는 흙을 쌓아서 학생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흙더미 위에 올라가서 장난을 치곤하였다. I중학교는 면내에 유일한 중학교로 고교 진학률이 군내에서는 최고로 높았다. 다만 학생과 학부형들에게 아쉬운 것은 군내에 이렇다 할 고등학교가 없어서 어릴때부터 자녀들을 객지로 유학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 학부형들은 오직 자식교육 하나만 바라보고 피땀이 배인 농토를 버리고 고향을 등지고 가족들을 데리고 도회로 떠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부모와 떨어져서 도회지에서 주로 자취를 하거나 혹은 하숙을 하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가정형편 때문에 실업계 고교로 진학했으며 극소수 학생들이 인문계 고교로 진학을 하였다.
 
계림은 중학교까지 자전거로 통학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걸어 다니기도 했다. 어떤 때는 박 선생님과 같이 등하교를 하는 때도 더러 있었다. 박 선생님은 여느 선생님과는 많이 달랐다. 그렇다고 크게 드러나듯이 표시나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이 보기에는 다소 괴짜같기도 하고 옷차림새도 단순하고 허름하였다. 그 당시 선생님하면 존경의 대상이었고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으례 존경받는 이 사회의 선각자로서 생각하였던터라 박선생님의 차림새는 여하튼 학생들의 시선을 충분히 끌었고 주요 화제가 되었다.
 
멋드러지게 정장을 하고 나온 다른 선생님과는 달리 항상 허름한 옷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년 내내 구두를 신은 적을 보지 못했다. 흰 운동화에 학생들처럼 짧게 깎은 머리, 좀 심하게 표현하면 공사장에 다니는 인부와 다를게 없었다. 그러나 외양과는 달리 너무도 검소하셔서 치장을 하는데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
 
오직 교육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진학에 무척 애정을 쏟으시고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셨다. 박 선생님이 중학교 3학년 담임 때의 일이다.
3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그 전보다는 더 일찍 출근하셔서 그날의 학습할 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계림이도 교실에 들어설 때 창 너머 교무실에 앉아 계시는 박선생님을 가끔 보았다.
 
"여러분! 이제 연합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오늘부터 90일 밖에 안 남았어요.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시험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사흘이 멀다하고 연합고사 D-00일을 학생들에게 주입했다. 하루는 오후 수업시간에 연합고사 시험문제를 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박 선생님은 말씀을 중단하시더니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른손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허공으로 쳐올리고 왼쪽다리를 들어올리더니 '픽 픽'하면서 바지가랭이 사이로 향기롭지 못한 소리를 내셨다. 그런데 그 소리가 사방에 울렸던지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히히덕거리며
코를 잡는 시늉을 했다. 기철이 녀석이 "선생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능청을 떨자 박 선생님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어받았다.
 
"뭐라꼬? 누구 닮았나. 예이 자식아 차라리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해라" 하면서 허허 웃으셨다. 진학 시험 준비로 주눅이 든 학생들에게 한 줄기 단비처럼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말들이 가끔식 쏟아져 나와서 학생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하지만 계림은 이때만큼 박 선생님과 한 동네에 산다는 것이 낯간지러울 지경이었다. 너무 숫기가 없었던 탓이었을까........
 
대저 국어를 맡고 있는 하원장 선생님이나 영어를 마치 토박이처럼 술술 구사한다는 김진석 선생님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행동하는 폼이 보기에도 자주 거슬렸다. 그러나 박 선생님은 소탈한 면이 많고 참으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셨다. 시골에서 남는 것은 학생들을 좋은 상급학교로 진학시키는길 밖에 없다면서 계속해서 3학년 담임을 도맡아 하셨다. 농촌의 환경을 너무도 잘 아시는 박선생님은 집에서도 직접 농사를 지으시기 때문에 농민들의 애환과 어려움을 너무도 잘 아셔서 그들 자녀들의 진학에 깊은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박 선생님은 과학을 가르쳤는데 전공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셔서 수업을 파한 후에도 과학실에 혼자 남아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교육청장기 전람회다 중앙 학생 과학전람회다 해서 때로는 홀로 때로는 지도 학생과 같이 전람회에 출품작을 내놓으셨다. 그럴 때 마다 자주 상을 받으시곤 하셨는데 그것은 과학에 대한 열정의 산물로서 당연한 귀결점으로 박 선생님의 영광은 물론 학교의 명예를 빛내주었다.
 
박 선생님은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00교육대학을 어렵게 나오시고 00국민학교에서 첫 교편을 잡으셨다. 박 선생님에 대한 유명 일화가 하나 있다. 그것은 마을 어른들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학생들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박 선생님이 학교를 다니던 당시에는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해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학생들이 많았다.
 
박 선생님도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근근히 고등학교를 마치고 뜻하는 바가 있어서 교육대학에 진학을 하였는데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였던지 거짓말처럼 낡아빠진 바지 무릎팍 쪽에는 바닥에 닳아 없어지고 겨울에는 물론 연탄을 쓸 연료비조차 부족했지만 방안이 뜨거우면 공부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서 혹한의 겨울에도 연탄을 제대로 아니 일부러 때지 않고 공부를 하였다. 그러한 일화를 마을 어른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일장 훈시하 듯 전설처럼 종종 들려주곤 했다.
 
박 선생님은 국민학교에서 수년 간 봉직하면서 틈틈히 진급 시험 공부하여 중학교로 옮겼다. 그 첫 발령지가 고향에 소재하고 있는 00중학교였던 것이다. 박선생님은 “우리의 희망은 여러분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상급학교로 진학하고 장차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부모님은 가난 때문에 많이 배우지를 못하여 농사밖에 모르지만 여러분들은 부모님 세대보다는 여건이 좋아 옛날처럼 초근모피니, 보리고개를 접하는 일이 없으므로 열심히 공부하여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된다.”라며 수업 시간에 누누이 강조하였다.
 
허름한 옷에다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 괴짜 같기도 하지만 그 정신만큼은 올곧고 깊었다. 박 선생님은 슬하에 1남 3녀를 두셨다. 대개가 그러하듯이 그 당시에는 대를 이으려고 하다 보니 딸이 많은 집안이 더러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자녀가 네명이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당신이 보시기에는 다소 쑥스러웠는지 모를 일이다. 네 명의 자녀 가운데 맏딸은 계림이와 중학교 동창으로 전문대학을 나와서 T시에서 유아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박 선생님은 매사에 부지런하셨다. 평상시에는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수업
을 마치면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를 하였다. 그리고 집에서는 과수원에서 혹은 밭에서 일을 하는 등 개미처럼 바쁘게 생활하였다.
 
그 모든 것이 고향을 사랑하는 향토애가 강한 선생님 본성인지도 모른다. 고향을 뜨지 못하고 농민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정열을 쏟았다. 계림은 박 선생님의 교육 열의는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운동화에 스포츠머리하며, 옷 차림새 등이 다소 못마땅하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의 진실 아니 깊은 뜻을 너무 몰랐었다. 검소하시고 가식이 없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소박한 생활이 외유내강이랄까 선생님의 그런 의지가 어디서 솟아나는지 새삼 존경스러워진다.
 
어느 추운 겨울날 박 선생님은 마을의 3학년 학생들을 교무실로 불러내어 크게 호통을 치신 적이 있었다. 그때 교무실에는 다른 선생님들은 수업중이었고 박 선생님 혼자만 계셨는데 계림은 조금 늦게 교무실로 들어갔을 때였다. 박 선생님의 고함이 교무실 밖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야이 자식들아! 술취한 사람하고 그것도 제 몸도 가누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저 보고 지나쳤다는게 말이나 되나... 이 엄동설한에..." 박 선생님은 호흡을 가다듬으려는 듯 잠시 말을 끊고 다시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계속 말을 이었다. "배웠다는 학생들이... 나는 적어도 너들한테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어 ..." "김명수! 너는 어떻게 생각해 입이 있으면 한번 이야기해봐라."
 
"죄송합니다. 저희들의 불찰이었습니다. " 하면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술취한 사람을 못봤으면 몰라도 그 사람을 본 이상 연락을 취하든지 아니면 같이 너희들 집까지는 대동했어야 하는거 아이가? 이 엄동설한에 혼자가는 게 그것도 해질 무렵에 술취해서 걸어간다면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그 술취한 사람이 죽던 날 계림이도 마을 친구들과 같이 하교를 했다. 민수, 철식이 등과 같이 집으로 오다가 고구럼 고개에 다다랐을 때 웬 술취한 어른이 보기에도 민망하게 아슬아슬할 정도로 휘청거리면서 금방 쓰러질 듯이 혼자 걷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혼자 뒤집어쓰고 제 힘에 겨워 어슬렁어슬렁 올라가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 너머로 고개를 숙이고 온 사방이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계림이 친구들은 제 너머로 그렇게 같이 걷다가 그 어른의 걸음이 너무 느려 같이 걷기를 포기하고 술취한 그 어른을 뒤로한 채 고개를 내려왔다.
 
다음날 아침에 교실로 들어가기 위하여 교무실 입구에 다다르자 교무주임 선생님과 박 선생님이 학생들에 둘러 쌓여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다. 계림은 술취한 어른이 고구럼 재에서 수백 미터도 못가서 계림이 친구들이 조금 앞서 간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 밑 커브길을 돌다가 폭우 대비용으로 만들어 놓은 방천둑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는 것과 그 일 때문에 그때 같이 동행한 학생들에게 사고경위를 조사하러 경찰서에서 학교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계림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회로 진학하였다. 읍내에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하나 있으나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대부분 그러하듯이 성적이 상위권에 들어가는 학생은 대처 도시로 진학하였다.
 
도회지로 나온 후에 그는 박 선생님에게 전화 한 번 드리지 못했다. 어느날 우연히 y일보 사회면에서 전국 학생 과학전람회 지도부문 우수 교사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얼핏 보았다 "여보세요! 박선생님 좀 부탁합니다." "어느 분 말입니까? 박 선생님이 두 분인데 영어 선생님입니까? 아니면 과학 선생님입니까?"
 
계림이는 전화를 한 번도 해보지 않다가 이제 새삼스레 스승에게 전화를 하려니까 좀 쑥스러웠지만, 신문에서 선생님에 관한 기사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비록 만나 뵙지는 못하더라도 전화 한 통화라도 해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여겼다.
 
"여보세요 저 계림입니다." "누구? 계림이 응 웬일이고?" 박 선생님은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도 제자를 금방 알아본 듯 하였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일전에 신문을 보니까 전국 학생 과학전람회 우수 지도 교사상을 받으셨대요" "그래 고맙네 그일로 백두산에 한 번 안 갔다 왔나."
"선생님 요즘도 활동이 많으시네요. 그리고 전화 한 통화도 못드려서 죄송합니다." "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많이 안바쁘나 한번 놀러 오지 왜?"
 
"선생님 전에 울릉도에 계신다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이제 정년도 얼마 안 남으셨죠?" "아직 멀었어." "참 그리고 민숙이는 대구에 있다면서요?" "그래 여하튼 이렇게 전화까지 해주고 고맙네."
박 선생님은 과학을 담당하셨는데 열정적으로 연구와 학생 지도에 몰두하였다.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신문 지상에 과학 전람회다 수상 소식이 자주 실렸다.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에도 박 선생님은 과학에 조예가 있는 학생들을 특별 지도를 하고 학생 전람회에 여러 번 출품하였다. "자네는 어디서 근무하노?" 박 선생님은 계속 말을 이었다. "건강식 음료 판매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선생님 요즘 건강은 어떻습니까?" "건강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새마실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통근 안했나. 그때부터 다진 체력이 뒷받침되어서인지 지금은 잔병 하나 안치른다."
 
고향을 떠난 지 수십 년, 고향에 산 날보다 고향을 등지고 산 날이 더 많은 날이다. 아득한 고향 풍경이 어렴풋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70년대 말 경제개발이 한창 진행중이던 때에 산업화의 영향으로 정든 고향을 버리고 이농하는 가구들이 갈수록 늘어갔다. 가난 때문에 여자애들은 보통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하고 정든 고향을 등지고 가족과 떨어져 돈벌이하러 도회로 나갔다. 고작 나이가 십칠 팔세 정도 되었는데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도회로 도회로 떠났던 것이다. 여자애들은 자신의 건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대부분을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한테 송금하였다. 자식들이 보낸 돈을 오빠나 남동생들의 등록금으로, 진학 비용으로 보태고 일부는 부모님의 전답을 사는데 들어갔다. 계림이 사는 마을도 예외는 아니어서 산업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도회로 나가 있던 그들 자식을 통하여 소리소리 없이 도회의 때가 묻혀 들어왔다.
 
매년 대 여섯 가구가 마을을 떠났다. 도시에 대한 동경도 있었지만, 농사지을 땅도 별로 없는데다가 장래 비젼도 없고 해서, 또한 자식들에 대한 교육 열의가 대단하여 내자식 만큼은 농사를 짓게 해서는 안된다는, 가난을 대물림해서는 안된다는 일념하에 논 팔고 집 팔아 줄줄이 도회로 떠났던 것이다.
 
계림 옆집에 살았던 민수네가 계림네 집이 도회로 이사가던 3년 전에 먼저 도회로 떠나더니 윗마을에 살았던 경수네 집마저 p시로 떠나버렸다. 계림이네 집이 이사가던 그 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떠나 보내기가 아쉬워 마을을 지나는 도로변 다리 아래에서 개 한 마리를 잡았다. 어린 그로서는 개를 잡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준식이 아저씨와 형섭이 형님이 어디서 개를 한 마리 끌어다가 다리 밑으로 가져갔다. 잠시후 개 목에 노끈이 메여지고 형섭이 형님이 재빨리 다리 끄트머리에 볼룩 솟은 시멘트 모서리에 끈을 칭칭 메고, 개의 몸통을 잡고 있던 준식이 아저씨가 번개처럼 개의 몸통을 다리 아래로 던저 버렸다. 개는 고함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개 가죽 타는 매케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계림은 멀찌감치서 역겨운 냄새를 맡아야 했었다.
 
계림 부친은 공무원으로 마을 사람들은 통상 성을 따서 김 서기라고 불렀다. 그의 부친은 그 당시 마을의 궂은 일을 도맡아했다. 그도 그럴것이 마을 주민들 대다수가 가난으로 학교도 제대로 못다닌터라 편지도 읽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계림 부친은 마을 주민들이 호적등본을 떼달라고 부탁하면 그 다음날 즉시 떼어주어 마을 사람들의 신뢰가 깊었다. 또한 박 선생님과 같이 마을 발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마을에 전기가 들어올 때의 일이다. 워낙 가난하던 시절이라 돈이 드는 일이라면 좋은 일일지라도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이 많았다. 돈 나오는 구멍은 작은데 쓰일데는 갈수록 늘어가니 그럴만도 한 일이었다.
전기도 들여 놓으면 경제적인 부담이 클까봐 애초부터 많이 망설이는 집이 많았다. 그 중에서 계림 옆집에 살았던 기석이네 집이 특히 심했는데, 나중에는 사립문까지 닫으면서 극력 반대를 하였다. 계림 부친은 박 선생님을 대동하고 적극 설득하여 기석이네 집에도 전기가 힘들게 들어오게 되었다.
 
계림 가족이 이사가던 날 마을 사람들은 동구밖까지 나와서 이사짐을 실은 차가 마을에서 사라질때까지 한참이나 서서 지켜보았다. 마치 일가 친척이 다시 볼 수 없는 타향으로 떠나는 것을 아쉬운 듯 바라보면서.....
 
이제 고향을 모두 떠나버렸다. 학생은 진학을 위해, 어른들은 더많은 경제적 부의 획득과 문화생활을 누리기 위해서 혹은 자녀교육을 위해 정든 고향을 버리고 농토를 팔고 집을 버리고 도회로 떠났다. 그러나 변함없이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도회지보다 더 열악한 교육 여건과 환경속에서도, 남아 있는 고향 농민의 자녀 교육에 열정을 쏟아 붓는 박 선생님은 지리적인 행동 반경은 좁지만 가슴에 가득품은 교육 연구와 지식탐구는 경계선이 없었다. 각종 과학 전람회 출품 수상작들이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박 선생님이 수십 년 전 반변천 냇가에 심은 포플라 나무가 이제는 자라서 좋은 재목이 되었다.
 
어느덧 버스는 고향(故鄕) 문턱을 지나고 있었다. 계림은 이번에 박 선생님을 꼭 뵈야겠다고 다짐했다. 차창 너머로 누런 들녘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 고향 경북 영양군 입암면 노달리는 남으로 진보면 소재지에
소설가 김주영 객주문학관이 있고(소설가 김주영은 입암과 진보의
경계 삼거리 월전이 고향이고 월전에서 입암면 경계 입구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석보면소재지에 소설가 이문열의 생가 있다.
입암에서 영양읍내로 진입 전 감천에 오씨 집성촌내 시인 오일도
고향이고 영양읍에서 일월산 방면으로 일월면 주곡리에 당대의
청록파 3인의 한 분인 조지훈 생가가 있다.
 
입암면 노달리는 반변천을
앞에 두고 야트막한 구릉이 포진한 살기좋은 고장이다. 옛날에는
윗마, 아랫마, 골노달로 세분 되었고 멀리 방전쪽으로 들판 너머
삼시랑이 있었다. 속된 말로 예로부터 놀기 좋은 노달이라 칭했다.
영양읍에서 진보, 청송, 영덕읍으로 가려면 노달 마을을 지나는 도로를
반드시 거쳐야 했다. 산업화의 바람과 더불어 여느 마을처럼 어릴 적
함께 했던 원 고향 사람은 대부분 도회로 떠나고 윗대 어르신은
대부분 세월의 더깨 속에 작고했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고향 마을 : 영양군 입암면 노달리 258번지
아랫마 교회옆 주황 스레트집이 어릴 적 고향집으로 지금은 타인이 거주
스레트집 앞에 서 있는 감나무는 도회로 오던 해 감나무 처음 감이 열렸으나
아쉽게 수확을 못해보고 고향을 떠남
어머니는 고향의 향수를 이기지 못하고 도회로 나온지 5년 만에 작고함
(44세, 1984년 1월)
다른 어르신의 절반 밖에 사시지 못하고 가신 어머니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침.
추석때가 되어 성묘하러 갈때면 모질도록 모정이 가슴에 메아리진다
모든 것이 못난 자식, 나의 탓이다.

박기숙   15-06-25 05:44
    
김창수님,
반갑습니다

고향 가는 길~~로 시작한
포풀라나무와 박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저와의 약속하신 7년후 은퇘때 책 출간이
앞 당긴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전진 하세요

시원한 남녁 바닷바람 갯바람 몰고 오시듯이 ~~~
김창수   15-06-26 14:45
    
한국산문 문학의 대선배님 반갑습니다 요즘 건강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사실 지방에 있는 한국산문 회원은 드문걸로 아는데 목포의 임도순 대구의 저 입니다
늘 격려와 지원 감사드립니다
오래오래  장수하시고 건강하십시요
유시경   15-06-29 00:08
    
김창수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저를 몰라도 저는 선생님을 알지요. 왜냐하면 한국산문 총회 때 몇 번 스쳐뵌(인사는 못드렸지만) 적이 있걸랑요.ㅎㅎ
며칠 전에 선생님의 자전적 소설 한번 훑고 나서 이번에 정독을 했습니다. '선속독 후정독'. 제 독서습관이 그렇거든요.^^
18년만에 원고를 수정하셨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선생님께서 장편에 도전하시는 것도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차후 훌륭한 작품 많이 쓰셔서 널리 알려지길 마음속 깊이 기원하겠습니다.
참! 지방에 계신 분 중 저와 같은 달에 등단하신 전주의 백봉기 선생님도 계시더군요.
건승 건강 건필하십시오. 주제 없이 인사드렸습니다.^^
김창수   15-06-30 10:26
    
감사합니다 18년 전에 모 신문사 신춘문예에 도전해보려고 끈적거렸는데 그 당시에 어떻게 썼는지조차 모르겟습니다. 하여간 감사합니다.  다음 총회나 송년회때 뵙겠습니다. 졸필에도 늘 격려해주시는 박기숙님 그리고 오늘 처음 기억하게 된 한국산문 유시경님 반갑고 고맙습니다. 두 분도 늘 건강하시고 건필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