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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쩌다가 시인이 되었는가 -1-    
글쓴이 : 이하재    21-09-16 11:21    조회 : 4,582
나는 어쩌다가 시인이 되었는가

-1-
 인간은 살아가면서 많은 인연을 맺으며 살아간다. 각 인연은 서로에게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각자의 삶을 이루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후천적인 만남은 각자의 의지에 따라 지속하거나 단절할 수도 있지만, 선천적인 인연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맺어진 결과이다. 부부는 헤어지면 남남이 되지만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결코 남이 될 수 없는 하늘이 맺어준 천륜이다.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운명을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어느 하늘 아래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 다락골이다. 홍길동이 산정상에 성을 쌓고 훈련했었다는 무성산 북쪽 끝자락에 위치해 하늘만 빠끔하게 열린 깊은 산골이다. 현재는 세 집만 남아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열다섯 가구에 집마다 아이들이 몇 명씩 있어 시끌벅적했었다.
 나는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이건석)와 어머니(노화자)의 몸을 빌려 세상에 태어났다. 3남 4녀 중 셋째아들로 두 형과 네 명의 여동생과 함께 자랐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계셨으니 열 한 식구가 좁은 공간에서 살을 부대끼며 살았다. 농번기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아궁이의 부지깽이도 소용이 되었지만 나는 형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자연 속에서 뛰어놀았다. 동생의 특권이었다.
 1961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마곡초등학교 월가분교인데 임시로 마을회관을 사용하였다. 3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막두산 언덕에 새로 지은 학교 건물로 이사를 하였다. 하지만 미완의 시설이라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교실에서 공부를 하는 중에도 밖에서는 운동장을 닦느라 부모님들이 삽질과 괭이질을 하였다. 불도저가 있었다면 며칠이면 끝날 일을 우리 부모님들은 고생을 참 많이도 하시었다. 우리도 수업이 끝나면 산 아래 냇가에서 모래와 자갈을 퍼 날랐다. 책보에 담아 낑낑거리며 언덕 위로 나르면 선생님이 손목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도장을 열 개 받고 나서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은 논둑길을 지나 냇물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산모퉁이를 돌아 밭길을 거쳐 굽이굽이 언덕길을 올라야 했다. 놀이터가 따로 있지 않았으니 하굣길이 즐거운 놀이터였다. 서낭나무(느티나무) 밑에서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었다. 초여름에는 이빨이 까맣게 물들도록 산 버찌를 따 먹었다.
 5학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빨갛게 익은 산딸기를 배가 부르도록 따먹었다. 식곤증이었을까 집에 와서 곧장 잠이 들고 꿈을 꾸었다.
 좁고 어두운 동굴 속 같은 길을 가는데 저만치에서 눈부시게 밝은 빛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보석처럼 빛이 나고 황홀하였다. 나는 그곳으로 가려 했지만,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발버둥을 쳐도 좁은 굴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엉엉 울었다. 오랫동안 눈물을 쏟으며 서럽게 울었다.
 들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가 깨웠을 때 나는 다락문에 매달려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서쪽 하늘로 기운 태양이 다락의 작은 창으로 강렬한 빛을 퍼붓고 있었다. 생시 같은 꿈이었다. 마치 나의 미래를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종종 하고자 하는 일들이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곤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집안 형편상 어려웠다. 두 형도 중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진학을 하지 못하였다. 집안 형편을 알면서 마냥 조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의 배려로 마곡사에서 설립하고 운영하던 마곡 고등공민학교에 진학하였다. 중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고입자격검정 고시에 합격해야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학교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2십 리가 넘는 먼 거리였지만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힘든 줄도 모르고 다녔다. 13살 어린 나이에 참으로 힘든 통학이었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아궁이 앞에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날마다 새벽밥을 지으시고 도시락을 챙겨주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시었다. 나는 책과 도시락을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메고 논두렁 이슬을 털며 반달음질로 학교에 갔다. 꼬박 두 시간 정도를 걸었다.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었다. 학교에 다니는 일이 너무 힘들었지만, 부모님에게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학년 겨울방학 어느 날, 왼손에 물집이 생겼다. 바늘로 터트리니 누런 진물이 나왔다. 상처는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여도 아물지 않았다. 손가락도 서서히 굽어졌다. 무릎을 구부리고 펴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편 무릎을 뻗친 상태로 발을 끌며 학교에 갔다. 집에 올 때는 친구들이 교대로 업어주기도 하였다.
 눈썹이 술술 빠졌다. 밥그릇에도 책장에도 눈썹이 묻어있었다. 왼손은 감각이 사라지고 살이 빠져 갈퀴처럼 손가락이 굽어졌다.
 나의 몸은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다. 통증이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괴로웠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가위에 눌리곤 하였다. 부모님은 야속하게 지켜만 보시였다. 팔을 잘라버리고 싶다는 협박성 푸념에 저절로 낫기를 바라시던 부모님은 마침내 마음을 바꾸시었다.
 1969년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공주 산성동에 있는 ‘이용주 의원’으로 갔다. 원장님은 내 몸을 자세히 살펴보고 주삿바늘로 이곳저곳을 찌르며 아프냐고 물었다. 아무 감각이 없었다. 원장님은 나를 밖으로 내보내고 아버지한테만 얘기하였다. 병원장님의 안내로 공주 보건소에 갔다. 좀 더 세밀한 검사를 마치고 담당 의사는 병원에서처럼 아버지한테만 오랫동안 설명을 하였다. 나는 보건소 현관 계단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봉황산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병원에서 나와서도 버스를 타고 마곡사까지 오는 동안에도 버스에서 내려 십리 길을 걸어오면서도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대 같은 비가 모내기하려고 갈아 놓은 논에 사정없이 쏟아졌다. 종이(유지)우산을 썼지만, 아버지의 흰 바지저고리도 나의 검정 교복도 흠뻑 젖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어머니는 다그치듯 물으시었고 아버지는 힘없이 XX 병이라고 하시었다. 우리 집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울기 시작하였다.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의 모든 꿈이 무너지고 있었다. 울다 지치면 쉬었다가 슬픔이 밀려오면 또 울고 밤새도록 울었다. 논에서는 개구리가, 산에서는 소쩍새가 나의 마음을 아는 듯 함께 울어주었다.

 학교에 갔다. 담임이셨던 전 황 선생님이 병원에 갔던 결과를 물으시었다. 나는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다가 울기 시작하였다. 선생님은 친구들을 모두 교실 밖으로 내보내고 계속 캐물었지만 나는 어깨를 들먹이며 큰 소리로 울기만 하였다. 선생님은 온갖 병명을 말하며 답을 들으려 하시었고 나는 고개를 저어가며 아니라고 하였다. 답답해하시던 선생님이 XX 병이라도 되느냐고 말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서럽게 울었다. 선생님은 믿지 못하시는지 나를 데리고 공주 보건소에 가서 확인하시었다.
 아버지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으신지 대전시에 있는 ‘장피부과’로 나를 데리고 가시었다. 그 병원에서도 신통한 답을 듣지 못하였다. 나는 원장님에게 학교에 다녀도 되느냐고 물었다. 원장님은 머뭇거림도 없이 학교는 안 다니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혹시나 했는데 검정 테 안경을 쓴 병원장의 대답은 순진한 소년의 상처를 더 깊게 하였다.
 나는 무단으로 학교에 가지 않았다. 몸도 괴로웠지만, 마음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나는 노중선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다. 사회와 도덕 과목을 가르치시다가 고려대학교 아세아연구소로 자리를 옮기신 선생님이었다. 며칠 후 책 한 권과 답장을 보내주시었다. 1969년 5월 호 ‘신동아’ 에는 유 준 박사의 기고문이 실려있었다. 이제는 천형의 사슬이 아니며 치료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노중선 선생님은 ‘낙망落望은 금물禁物’이라고 강조하시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하시었다.
 정기적으로 보건소에 들러 약을 타다 먹었다. 부모님은 병이 빨리 낫기를 원하시어 하루 치보다 많은 양을 먹으라고 강요하시었다. 이틀에 반 알씩 복용하라는 약을 하루에 두 알씩 먹었다. 약의 과다복용은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하늘은 빙글빙글 돌았고 땅은 푹푹 꺼지는 듯 심한 현기증이 났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주의를 들으신 부모님은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처방 약 외에 몸에 좋다는 보약을 수시로 달여 주시였다.
 학교에 안 간 지 두 달 후였다. 보리 방아를 찧으려고 아버지와 함께 마을회관이 있는 큰 동네 방앗간에 갔었다. 마을회관 앞에서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7월의 무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시며 월가리 다락골로 나를 찾아오시는 길이었다. 선생님은 9월에 검정고시 시험이 있으니 당장 학교에 나오라고 하시었다. 아버지도 허락하시어 다시 학교에 나갔다.
 두 달 동안 시험 준비를 하고 1969년 9월 21일 대전 여고에서 검정고시 시험을 보았다. 나는 선생님의 부탁을 들어주기나 한 것처럼 시험을 치르고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공부를 계속할 만큼 나의 몸과 마음은 온전하지 않았다.
  환자이면서도 누워있지 않으니 남들은 내가 환자인 줄 몰랐다. 겉모습은 멀쩡하고 얼굴도 마르지 않아 누구도 나를 병자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부모님은 나의 병을 철저하게 비밀로 하였다. 혼사 길이 막힐 수도 있다며 스물한 살 된 큰 형의 결혼을 서둘러 성사시키고 입단속을 하시었다. 아직도 형수님은 나의 병력을 모르신다. 현대 의학의 발달 덕분에 나를 괴롭히던 무리는 휴면상태로 잠복을 하여 병의 진행은 멈추게 되었다.
 나는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소를 먹일 꼴을 베었다. 꼴을 베는 동안은 산사람이 되어 자유를 만끽하였다.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불렀다. 남을 의식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산속에서 울분을 삭이곤 하였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산골에서는 겨울 땔감을 준비한다. 톱 한 자루 들고 산속에 들어가서 생을 다한 병든 나무들과 폭풍에 쓰러져 마른 가지들을 잘라서 지게에 지고 왔다. 나에게 강요된 일은 아니었지만, 하루를 보내기엔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꿈도 희망도 아무런 계획도 없이 삶에 회의를 느끼며 1년 세월을 보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아 세상은 온통 하얀 도화지 같았다. 그날도 장작을 패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재하!’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친구 엄기운의 방문이었다. 그의 집은 학교 근처에 있었다. 우리 집과는 반대방향이니까 2십 리가 훨씬 넘는 먼 거리였다. 친구는 고등학교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친구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나의 부모님에게 인사하고는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렸다. 내일까지 공주 영명고등학교에 원서를 내면 시험을 볼 수 있으니 자기하고 같이 가자고 하였다. 당시 영고는 후기로 학생을 모집하였었다. 친구는 공주사범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두 시간을 넘게 걸어서 친구의 집에 도착하였다. 깜깜한 밤이었다. 친구의 집은 버스가 다니는 큰길가에 있었다. 친구의 가족들 모두가 집에 있었다. 부모님과 결혼을 한 큰형의 내외와 조카들, 대학생인 형과 동생까지 열 명이나 되는 대가족이었다. 학교에서 가까워 몇 번 갔었기 때문에 구면이었다. 부모님과 형들 모두 반갑게 맞아 주시였다.
 방학이라 집에 있어도 되는데 친구는 나를 데리고 영고에 갔다.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의무라도 있는 듯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친구는 당당했다. 방학이라 학교는 조용했다. 교무실에는 선생님(우길현 교감 선생님) 한 분이 계시었고 친구는 씩씩하게 자기소개를 하였다. 친구는 마치 자기 학교 선생님 앞에서처럼 행동하였다. 친구가 우러러 보였다. 나는 입학원서를 작성하고 고입자격 검정고시 합격증을 제출하였다.
 전염병 환자인 줄 알면서도 학교에 다니도록 배려해주신 전황 선생님과 친구 엄기운의 도움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친구가 나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하여 멀고 험한 길을 오지 않았더라면 나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공주시 중학동에 사시던 숙부님 댁에서 숙식하였다. 숙모님은 나의 병을 아시면서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사촌들과 똑같이 대해 주시였다. 하숙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시면서 조카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시였다.
 1년의 공백기는 길었다. 60명 이상이 바글거리는 교실 풍경은 낯설었다. 나의 학습능력은 현저히 낮아졌고 심적인 갈등은 깊어졌다. 공주 보건소의 담장을 따라 통학하는 길은 즐겁지 않았다. 보건소에 갈 때는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하였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가도 혼자일 때는 슬픔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이중적인 인격체로 굳어져 갔다. 다행스럽게 선생님도 친구들도 내가 혐오스러운 전염병 환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1973년 <진학>지 3월호에 각 대학의 입학 요강이 실려있었다. 국립대학교의 입학자격에 ‘법정 3종 전염병 환자는 입학을 불허한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부모님은 대학교까지는 절대로 보낼 수 없다고 선언한 상태라 진학의 길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암담한 미래를 보는 듯하였다. 몸도 마음도 괴로웠다.
 나는 두통이 있어 치료를 위해 10일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겠다고 말도 안 되는 결석신고서를 담임선생님께 드렸다. 선생님은 별말씀 없이 받아 주시였다. 그때 선생님이 좀 더 관심을 두고 따져 물으셨다면 나는 말 못 하고 감추고만 있었던 신상을 말씀드리고 하소연이라도 했을 것이다.
 목사 선생님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말을 빌려 ‘소년 이어! 야망을 가져라’라고 설교를 하시었지만, 나의 꿈은 물거품처럼 하나씩, 하나씩 꺼져갔다.
 위로받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못 했다. 담임선생님한테도 목사 선생님한테도 차마 말을 못 했다.
 마곡사에서 운영하던 학교에 다녔던 인연으로 공주불교학생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학교에서는 성경공부를, 절에서는 불법을 두루 섭렵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다. 철학적인 사유보다 깊은 신심으로 종교 생활을 했었더라면 길이 보였을까?
 평범하게 보였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나의 청소년기는 미래에 대한 대책 없이 끝났다. 가슴 깊이 상처를 묻고 검은 파도가 일렁이는 세상 속으로 나침반도 없이 밀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