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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쩌다가 시인이 되었는가 -3-    
글쓴이 : 이하재    21-09-18 12:27    조회 : 4,580
-3-
 주인이 없는 빈방은 찬 기운만이 맴돌았다. 젊은 기운으로 채워졌던 작은 방은 허무함으로 가득하였다.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서야 각자의 방을 갖게 되었고 흥분된 마음으로 방 정리를 했었다.
 아들의 방에 큰 거울을 걸려고 절대로 빠지지 않게 망치질을 하였었다. 내 손으로 쾅쾅 박아놓은 대못은 벽에 그대로 박혀있고 거울은 침대 위에 얌전하게 누워있었다.
 잘 정돈된 책상 위에는 빨간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등록금 고지서 한 장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등록금 걱정을 덜어주고 싶어서 그렇게도 힘든 결정을 했더란 말이냐? 정이 없었기로서니 영원한 이별을 하면서도 한마디 할 말이 없었단 말이냐?.
 방바닥에는 토막 난 배낭끈과 한 움큼의 검은 머리카락이 나뒹굴고 벽지에는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생의 마지막 흔적이다. 불과 몇 걸음의 사이를 두고 부모는 쿨쿨 잠을 자고 사지가 멀쩡한 자식은 저승으로 가기 위해 벽에 매달려 소리도 못 지르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부모의 코 고는 소리가 얼마나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을까.
 잊어야 한다. 지워야 한다. 부모 싫다고 떠나버린 자식 놈 깨끗하게 버려야 한다. 거울을 버리고 못을 빼 멀리 던져버리고 책상도 침대도 입던 옷도 몽땅 내다 버렸다. 노트북도. 기타도. 스마트폰도 다른 이에게 주었다. 아들의 흔적을 지워내려고 아들의 손길이 닿았던 것들을 찾아 버렸다.
 집마저 버리고 이사를 했다. 방 한 칸 줄여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아들의 그림자를 지우려고 함께 호흡했던 공간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이동했지만, 기억만은 지워지지 않고 또렷하게 살아났다. 아침부터 밤까지 깨어있는 동안에는 어느 곳에 있든지 따라다녔다. 웃는 얼굴로, 무표정한 얼굴로, 찡그린 얼굴로 나보다 한 발 앞서 이동해 있었다.
 
 죽은 놈은 죽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만 한다. 새끼를 사자에게 내어주고 돌아서서 풀을 뜯어 먹는 누우처럼 먹고 살기 위해서, 남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며칠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집을 나섰다.
 거리에는 슬픈 덩어리들이 몰려다녔다. 동서울터미널에는 휴가 나온 군인들이, 아셈타워에는 소풍 나온 노란 병아리들이, 대학교에는 개학을 한 학생들이, 자양동에는 다니던 학교와 교복 입은 학생들이, 젊은 손님들은 모두 화살이 되어 내 가슴을 쑤셔댔다.
 애초부터 없었던 것과 존재하다가 없어진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원래부터 없었다면 허공 그 자체이지만 존재하다가 사라졌다면, 손에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기억들이 어떤 매개를 접하는 순간 살아나 허공 속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갓난아기를 보면 방긋 웃던 모습이,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보면 무릎에 앉아 행복해하던 얼굴이, 유치원생을 보면 재롱 잔치하던 모습이, 군인을 보면 면회 다니던 시절이, 편의점을 보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모습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가 무얼 잘 못 했는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하필이면 네가…….’
 ‘왜 죽었니?’
 ‘왜 아무 말도 안 했니, 왜, 왜, 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목이 터지라 외쳤다. 자동차의 실내는 혼자서 소리 지르고 미친 짓을 하기에 매우 적합한 구조다. 고속도로에서 눈물을 훔치려고 안경을 벗은 채 달렸다. 세상 끝까지 달리고 싶었다.
 나는 하나뿐인 아들을 무관심으로 대해 죽음으로 몰았다. 나는 정신적 살인자이고 죄인이다.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것 같았다.
 몇 안 되는 친구들도 멀리하고 외롭게, 더욱 고독하게 나를 가두었다. 나를 가둔 벽은 점점 높아졌다.
 술을 마시고 취하고 싶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술을 마시면 몸이 괴로워 마실 수가 없었다. 마약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데 구하지 못해 포기했다. 향락에 빠져볼까 했으나 그러기에는 돈도 없고 너무 늙어버렸다.
 TV와 컴퓨터가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이고 피난처였다. 쉬는 날이면 인터넷으로 바둑과 장기, 고스톱 등 간단한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무엇이든지 깊숙이 빠져들어 현실을 부정하고 잊고 싶었다.
 
 게임도 시들해지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갔다. 꿈을 잃으면 의욕도 사라진다. 의욕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아주 작고 하찮은 것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때 가능하다.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힘든데 체념 속에 살 수는 없다. 아픔보다 괴로운 서러운 병을 얻고 애간장을 저미는 이별을 했다. 분명 까닭이 있을 터이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나의 삶은 서럽고 슬프고 한스럽고 고달픈가.
 망상의 수렁에서 나오려면 몰입할 수 있는 실상이 필요하다. 인터넷 검색 중에 독학사 광고를 보았다. 혼자 공부를 해서 학위를 받을 수 있고 대학교졸업 학력으로 인정이 된다는 것이다. 집에서 컴퓨터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나 동영상 강의와 교재비를 포함하여 300만 원의 거금이 필요했다.
 며칠 동안 고민을 하였다. 이대로 미쳐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삶을 살 것인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초등학교 시절 잠깐 낮잠이 들어 꾸었던 생시 같은 꿈이었다. 작은 구멍을 통과하면 보석보다 빛나는 세상에 다다를 수 있는데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어 엉엉 울었었다.
 생각해보면 그 뒤로 나의 병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하고자 하는 일도 어느 정도 진행되다가는 길이 막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좌절하였고 그 꿈이 생각났었다. 꿈보다 해몽이다. 지금까지 운명을 미리 알려준 것 같은 그 꿈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작은 구멍을 통과했더라면 최상의 삶에 100% 도달했겠지만 50%라도 가까이 간다면 무한 광명의 세상은 아닐지라도 아주 캄캄한 암흑의 세계는 벗어날 것이 아닌가.
 대전여자고등학교에서 고입 검정고시시험을 볼 때 대학생인지 선생님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화단 앞에서 책을 읽고 있던 분이 우리한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열심히 공부해라. 대통령이 되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면 대통령이 못되더라도 국회의원은 할 수가 있다. 아마 그분은 국회의원이 아니 되었어도 밑바닥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 해보자. 어렸을 때는, 내가 병이 들기 전에는 공부를 잘했었지 않은가. 학위를 취득해서 무한 광명의 세상은 아니더라도 지옥 같은 생활은 벗어나 보자. 나에게 주어졌던 악몽 같은 시절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와 천둥이 울고 무서리가 내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동영상 강의에 등록하였다. 카드로 10개월 할부 결제를 하였다. 목돈이 들었지만 강한 동기부여가 필요하였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학과 중에서 국문학과를 선택하였다. 밥 먹고 사는 것과 무관한 시를 쓰겠다고, 시인이 되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교과서에 실린 작품을 제외하고는 어떤 시도 모르는 주제에,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 외에는 누구도 모르는 택시기사가 시인이 되겠다니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내가 겪어내야 했던, 가슴 아팠던 사연들을 풀어내고 싶었다. 시를 쓰는 일에 나이도 학력도 따지지 않겠지만, 학위 정도는 있어야 시인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 거로 생각하였다. 어쩌면 학력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독학 학위는 4단계 23과목에 합격하면 된다. 1단계 시험에 한 학년을 이수하는 꼴이다. 2년여의 방황을 접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공부도 적당한 때가 있는 것이다. 책을 놓은 지 40년이 지났다. 눈이 침침하여 책을 오래 읽을 수 없다. 모니터도 장시간 들여다볼 수 없다. 기억력의 쇠퇴는 난관 중의 난관이다. 돌아서면 가물가물해져 반복에 반복해서 학습해야만 되었다.
 더 어려운 것은,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망상을 떨쳐내는 일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놈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그리 자주 나타나는지 책갈피 속에서도 모니터 속에서도 불쑥불쑥 나타나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마 등록금을 내지 않았더라면 포기했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택시 영업을 계속해야만 했다. 미치지 않으려고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착같이 일을 해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늘그막에 안 하던 공부를 하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모든 절차는 인터넷으로 진행되었으나 시험은 감독관의 입회하에 엄정하게 치러졌다. 대부분 시험은 거주지에서 가까운 방통대 경기캠퍼스에서 보았다. 시험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나처럼 공부할 기회를 놓쳤던 사람도 있고 단시간에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어린 학생도 있었다.
 경기공고에서도 시험을 보았다. 방통대보다 교실 수가 많았고 지정된 교실을 찾기가 힘들었다. 긴 복도를 기웃거리며 걷는데 어린 소녀들이
 “저 교수님! OOO 교실이 어디에 있어요?”하고 물었다.
 “모르겠네요. 나도 시험 보러 왔어요.” 지나치며 나눈 짧은 대화가 나를 웃기고 서글프게 하였었다.
 시험지를 받아들 때마다 가슴은 두근거렸고 손은 떨리었다. 사인펜으로 동그라미를 채우는데 자꾸 벗어나 답안지를 다시 작성하였다. 수험생 중에 꼴찌로 답안지를 제출하며 젊은 감독 선생님에게 어색한 웃음을 짓곤 하였다.
 국문학을 전공하는데 영어 과목도 합격해야 했다. 교양과목 중에 국사, 윤리, 영어는 필수과목이다. 첫 번째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다른 과목은 합격하였는데 영어 때문에 4단계의 시험은 치르지 못했다. 2단계와 3단계를 통과하였지만, 필수과목인 영어를 통과하지 못해 졸업시험과 상응한 4단계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없었다.
 2년 차에도 영어를 통과하지 못했다. 단어를 알아야 독해가 되고 정답을 고를 수 있는데 어휘력이 부족해 또 일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1년을 더 공부했으나 오히려 점수는 떨어졌다. 단어장을 앞에 매달아 놓고 운전하면서 외웠다. 강의를 녹음해 손님이 없을 때는 반복해서 들었다.
 학위취득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한 지 3년 차 마침내 영어시험을 통과했다. 합격을 확인하고는 웃어보았다. 나에게도 기쁨이라는 감정이 숨어 있었다.
 2017년 2월 22일 방배동 교원연수원에서 학위수여식이 있었고 합격 수기 장려상을 받았다. 시험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늙은 나이에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했다고 격려하는 상이다. 사각모를 쓰고 사진도 찍었다. 나도 대학교를 졸업한 셈이다. 나도 국문학사가 되었다.
 
 시인이 되는 길을 찾아보았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방법 외에도 문학지에 응모하는 길이 있었다. 관심이 있으면 보인다. 문학지가 많다는 것도 시인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시 창작 강의하는 곳도 많았고 인터넷에는 수많은 시가 떠돌아다녔다.
 2018년 몇 번의 응모 끝에 시로 등단하였다. 시인이 된 것이다. 내가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을, 가슴속에 품고 있던 생각과 정서를 내보이고 싶었다.
 나에게 시는 표출의 본능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다. 억압된 감정을 드러내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행위다. 단단하게 뭉쳐져 가슴 깊이 가라앉은 한과 슬픔 덩어리를 끄집어내고 풀어헤쳐 나 자신을 치유하고 동병상련하는 이들과 공감하는 일이다. 기왕이면 조금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포장해 세상에 내놓고 싶다.
 턱없이 부족한 배움을 보충하기 위해 서울디지털대학교에 편입하여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제껏 나는 문학과 이질적인 삶을 살아왔었다. 문인이라고 내세우기에 부족하지만,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거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나의 어긋난 삶이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재하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60년, 상처투성이 삶을 뒤집어 보고 싶어 이름을 하재로 바꾸었다. 시인 이하재의 앞날에 옛날 꿈에서 보았던 서광을 볼 수 있을까.
 시인이라는 새 옷을 입었지만 나에게는 너무 크고 헐렁하다. 나는 여전히 택시를 몰고 다니며 궁핍한 생활을 한다. 나는 택시기사일 뿐 내 삶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의 직업은 택시기사다.
 나는 안다. 아무리 울며 발버둥 쳐도 꿈에서 보았던 광명의 세상, 최고의 정점에는 이르지 못할 거라는 것을 잘 안다. 재주도 배경도 턱없이 모자라고 주어진 시간도 부족하지만, 가난한 영혼을 살찌워 새로 입은 옷이 잘 어울리는 시인이 되고 싶다.
 많은 작품보다 많은 사람에게 기억될 한 편의 시를 얻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어둠의 한쪽 모서리를 살짝 걷어 올리고 누군가 흘리고 갔을지 모를 작은 행복이라도 주울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