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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밀, 호호(好好)    
글쓴이 : 김서영    25-07-21 09:48    조회 : 1,654
   메밀, 호호(好好).hwp (70.0K) [0] DATE : 2025-07-21 09:49:57

메밀, 호호(好好) 

김서영

 

푹푹 찐다라는 말이 이번 여름만큼 어울린 적이 있었을까. 칠월로 들어서면서 한낮의 열기는 사람 체온을 가뿐히 넘어선다. 조금만 걸어도 등줄기로 땀이 줄줄 흐르고, 폭삭 데워진 몸은 에어컨 앞에서야 겨우 열이 식는다. 기운이 빠지고 입맛도 시원치 않다. 그럴 때 문득, 살얼음 동동 뜬 동치미 국물에 말은 메밀국수가 간절하다. 그 한 젓가락이면 숨통이 트일 것 같다.

 메밀로 만든 요리를 나는 무턱대고 좋아한다. ‘세 살 입맛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처럼, 어릴 적부터 입에 익은 맛이라서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메밀을 찾게 되는 건, 어린 시절 입맛의 기호만은 아닐 것이다. 봄날이면 메밀밭에 나를 앉혀 놓고 오늘 요놈 뜯어다 맛나게 무쳐 먹고, 또 요놈 영글면 메밀묵 해줄게하시며 나를 어르던 할머니. 외지에서 일하는 자식을 대신해 손녀인 나를 돌보던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녹진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사는 집 근처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도시 텃밭이 있다. 그 주변으로는 계절마다 청보리, 메밀, 수레국화, 코스모스 등 다양한 곡물과 꽃들이 피고 진다. 그중에서도 내 발걸음이 멈추는 곳은 오월, 파릇한 메밀 순 앞에서다. 어린 순이 어른 손바닥 크기로 자라면 나는 극심한 갈등에 휩싸인다. 어릴 적 먹은 메밀나물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연한 새순을 베어다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뒤 된장과 고추장,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묻혀 먹고 싶어진다. 요즘은 구하기 힘든 재료이기도 하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식감을 알기에 더욱 욕심이 났다. 한 날 밤은 입안에 메밀나물 무침 맛이 생생히 돌아 몰래 손이라도 대볼까 싶었다. 하지만 텃밭 귀퉁이마다 박힌 CCTV에 찍힐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결국 눈으로만 훔칠 뿐, 메밀꽃이 일어 한들거리는 모양을 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요즘은 도정 기술이 발달해 껍질이 섞이지 않은 하얀 메밀가루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 메밀 100%를 반죽해 국수를 뽑아내는 집도 많아졌다. 그런데 메밀로 유명한 음식점에서도 메뉴에 메밀묵은 없다. 여름철에는 묵이 쉽게 상해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겨울이라고 파는 곳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들린 겨울 오일장에서 메밀묵을 영접했다. 친한 친구를 해외에서 만난 듯 기뻐 폴짝거리며 연신 어쩜 좋아, 어쩜 좋아하며 박수를 쳐댔다. 그날 이후, 겨울 오일장은 내 방앗간이 되었다.

   할머니는 겨울마다 메밀묵을 쑤었다. 가을볕에 잘 마른 메밀을 갈아 까만 껍질을 체에 걸러 하얀 가루를 얻어 낸다. 큰 가마솥에 물을 부어가며 농도를 맞추고, 불 조절을 해가며 묵이 눌어붙지 않게 긴 나무 주걱으로 연신 젖는다. 팔 빠지기 직전 다 됐다라는 말로 할머니의 반나절 묵 끓이기는 끝이 난다. 뜨거운 묵을 팥죽색 대야에 붓고 마루에 두면 겨울바람이 부지런히 불어 식힌다. 손가락 끝으로 눌러 탱글탱글해지면 바람이 할 일도 끝이 난다. 이제 묵을 한 모 꺼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묵 위에 들기름 넣은 간장을 두르고, 참깨를 으깨 뿌린다. 마지막으로 바싹 구운 김을 손으로 부숴 올린다. 수저로 한입 떠 입안에 머금는다. 부드러운 식감과 고소한 향, 그리고 겨울바람의 감촉이 입안에서 난리 블루스를 춘다. 눈 내리는 겨울밤 아랫목에서 먹던 그 맛은 또 얼마나 따뜻했던지. 힘든 날 꺼내 먹는 내 기억의 온기다. 메밀묵을 좋아한다는 도깨비랑 먹기 내기해도 이길 수 있을 만큼 배가 차면, 어느 날의 헛헛했던 마음이 할머니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다.

 여름, 사람들이 시원한 음식을 찾는 계절이다. 그중에서도 메밀국수와 평양냉면이 인기 있다. 데워진 체내의 열을 식혀주는 차가운 성질이 있어 더운 날 한 그릇 먹으면, 숨통이 좀 트인다. 심술 고약한 여름 햇살에 희롱당한 기력도 얼마쯤은 보양 될 것이다. 사실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메밀로 만든 국수를 먹어봤다. 하지만 처음 먹은 평양냉면의 슴슴하고 밍밍한 맛도, 봉평 막국수라는 생소한 국수 맛에서도 익숙한 향과 맛을 느꼈다. 입맛은 기억의 맛이었다. 재료가 단지 메밀이라는 이유로 좋다’, ‘싫다를 논할 여지가 일도 없었다. 메밀로 만든 모든 음식은 내게 호불호(好不好)가 아닌, 그저 호호(好好)였다.

 요즘 소울푸드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화두다. 우리에게 마음을 위로해 주는 추억의 음식이 있다는 건, 숨 막히는 하루 끝에 마주한 바람 같다. 때론 외롭고 아플 때 병원 약보다 더 약이 되는 묘한 치료제가 되기도 한다. 이상하게도 일주일 전에 먹은 아귀찜 맛은 희미해도, 초등학교 졸업식 날 먹었던 자장면 맛은 선명하다. 맛이 아닌 추억을 기억하는 것이다. 마루 끝 팥죽색 대야 속 메밀묵과 겨울바람, 그리운 할머니. 그 기억을 한데 모아 메밀국수 앞에 앉는다. 여름 햇살에 희롱당한 기력에 다시 숨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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