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
차세란
폭염이 절정을 향해 내달렸던 8월의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헤어져 집에 돌아와 보니 식탁 위에 백화점 롤케이크가 올려져 있었다.
"아니, 이게 웬 롤케이크야? 저녁 먹기 전에 롤케이크를 먹겠다고?" 쓸데없는 것 잘 사들이는 딸내미가 사 온 줄 알고 냅다 잔소리부터 쏟아냈다.
"위층에서 다음 주부터 인테리어 공사하는데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주고 갔어!"
스마트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딸내미가 심드렁한 대답을 내놓는다.
"아~ 그래? 맛나겠네." 민망해진 나는 말끝을 얼버무리며 급히 태세를 전환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들이킨다고 했던가? 휴일 저녁 각자 방에 늘어져 있던 식구들을 불러 모아 롤케이크 한 조각씩을 나눠 주었다. 달달하고 촉촉한 것이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당장 그 다음주 월요일부터 우두두두.... 쿠다다다.... 쿵쾅....온갖 종류의 소음이 쏟아져 내렸다. 사나흘은 어찌 견뎠는데 그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집 앞 카페라도 가 있을 요량으로 책 한 권을 들고 집을 나섰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리는데 문 앞에서 한 사내와 마주쳤다. 더러운 러닝셔츠에 땀을 줄줄 흘리며 양손 가득 공구를 챙겨 든 그는 엘레베이터 문을 대신 잡아 주고 있는 나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민머리에 구릿빛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이방인은 진한 땀 냄새를 남기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급히 사라졌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우연히 그를 몇 번 더 마주쳤다. 다른 인부들은 삼삼오오 모여 있었는데 유독 그는 혼자 아래위층을 자주 오르내리는 것 같았다.
열흘 남짓 이어진 공사는 소음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불편함을 안겼지만 이미 받아먹은 롤케이크과 자주 마주쳤던 이방인 때문에 나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열흘 전 위층의 이삿짐을 나르던 일꾼들도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였다. 이렇게 주위에서 외국인들을 쉽사리 보게 되니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1980년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리 반에는 ‘구 엔티투린'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아이가 있었다. 외국인을 거의 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그 아이는 아버지가 구씨인 한국인이고, 어머니는 베트남에서 왔다고 했다. 갈색 피부에 유난히 큰 눈과 또래보다 한 뼘쯤 큰 키에 비쩍 마른 몸매 때문에 그 아이는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한 교실에 앉아 있던 그 많은 아이들 중에 아직도 엔티투린이란 이름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름 대신 '수수깡'이라 더 자주 불리긴 했지만.... 그 애는 우리보다 한두 살 위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래서였는지 또래보다 키도 컸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하도 오래된 기억이기도 하고 교실 맨 끝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그 아이에게 관심을 둘 것도 없어서 그 아이에 대한 추억은 몇 가지 없다. 그 중 하나는 공책 검사이고, 또 하나는 운동회이다.
그 시절 선생님은 왜 그렇게 공책 검사를 자주 하셨는지, 부반장이였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의 공책을 걷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제시간에 공책의 한 면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맞춤법은커녕 삐뚤빼뚤한 글씨와 씨름하던 엔티투린은 내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기 일쑤였다. 나는 옆에서 기다리다 못해 얼른 공책을 걷어갈 심산으로 선생님 눈을 피해 몇 자를 대신 적어 주곤 했다. 그때마다 머쓱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 아이의 눈빛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래도 일년에 한번 운동회가 열리면 그 애는 빛을 발했다. 달리기에 소질이 있어서 항상 1등으로 결승점을 통과 했던 그 애는 그때마다 잇몸을 드러내고 환히 웃었는데 그 미소는 가을 햇살만큼 환했다.
최근 법무부가 공개한 통계자료 (2023년 통계일보)를 참고하면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2023년 12월 기준으로 250만 7,584명이고 총인구 대비 4.89%이다. OECD에서는 이주 배경 인구가 총인구의 5%를 넘을 경우 '다문화, 다인종 국가'로 분류한다. 한국이 다문화 사회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내국인 십만 명이 줄어들 때 외국인은 십오만 명이 늘었다고 한다. 수도권에서 조금만 떨어진 지방으로 나가면 동네에 동남아 음식점들이 즐비하고, 초등학교는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점점 늘어간다고 한다. 지금은 교실마다 '엔티투린'들이 많을 것이고 옛날처럼 존재감 없이 앉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앞으로 십년 후 우리는 어떤 모습의 사회 속에서 살게 될까? 오천 년의 단일 민족을 강조하던 교육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같은 아파트 10층의 장난꾸러기 두 형제의 아빠와 반려견 산초의 친구 도비 아빠는 모두 바다 건너에서 왔다. 가끔 공원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금발의 새댁은 그녀와 많이 닮은 친정엄마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수다를 떤다. 주말의 마트에는 히잡을 쓴 여인네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통계 수치에서 보듯 이미 우리는 그들과 어울려 살고 있는데 나의 무심함이 이제야 그들을 깨닫게 했다.
우리나라는 절차와 심사가 까다로워 외국인들의 이민이나 장기 체류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이곳에서 살고자 하는 그들은 얼마나 많은 공부와 준비를하고 왔겠는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동화되어 살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을 이방인으로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해외여행을 갔을 때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기대하지 않던 친절과 환대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런 곳은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그러니 나도 이곳에 함께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살펴봐야겠다. 우리 민족은 자고로 손님 접대에 극진하지 않았던가?
시대와 환경이 변했다. 사람이 귀한 시대이다. 그들에게 관심을 두면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질 것이다. 그런 이해는 그들에게 배려와 환대가 될 것이고 내가 베푼 환대는 돌고 돌아 언젠가 이 자리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위층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하던 이방인과 수십 년 전 외롭게 앉아 있던 엔티투린이 모두 우리나라 어디서인가 잘살면 좋겠다.
어느새 동남아의 더위가 무색할 만한 폭염의 저녁이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