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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아침, 아버지의 자리에서    
글쓴이 : 강선명    26-03-27 11:44    조회 : 129

추석 아침, 아버지의 자리에서

 

강선명

 

명절은 대목이다. 아니, 대목이었다. 5일장이 열리는 입구에 자리 잡은 우리 집 슈퍼는 장날마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작은 슈퍼 양쪽 문으로 쉴 새 없이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어디가 장터고, 어디가 슈퍼인지 경계가 흐려질 만큼 북적였다. 사람들은 밀가루와 설탕, 소주 등 필요한 물건을 집어 들고 순서도 없이 차례를 기다렸다. 부모님은 금고를 중심으로 한쪽은 계산, 한쪽은 포장으로 역할을 나눠 분주히 움직이셨다.

 

델몬트 주스, 10개들이 화장지, 다시다, 땅콩과 생강절임이 든 일회용 안주들이 기둥마다 매달려 있었고, 중앙에는 아이 얼굴이 그려진 분유통들이 진열돼 있었다. 얼핏 보면 어수선하지만, 나름 질서 있는 풍경이었다. 슈퍼 안쪽에는 작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가게와 이어진 우리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이곳 슈퍼는 우리 네 식구의 집이자 부모님의 일터였다. 그 모습은 지금도 내 꿈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아버지는 명절이 다가오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차로 10분 거리의 할아버지 댁에 들러 친척들과 아침을 드신 뒤, 빛의 속도로 슈퍼로 달려와 문을 여셨다. 슈퍼에서 조금 떨어진 창고에서는 어머니가 나무 상자에 담긴 과일을 하나하나 고르며 과일 바구니를 만드셨다.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사과와 배를 차곡차곡 쌓고, 투명 비닐 입구를 노란 끈으로 오므려 묶던 그 손길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80년대 후반에는 자가용이 흔치 않았고, 대형마트도 없었다. 명절이면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동네 슈퍼에 들렀다. 정종 한 병, 과일 바구니 하나, 담배 한 보루. 그것이 당시의 국룰이었다. 흰색 플라스틱 통에 아버지가 큰 소주병을 대고 회오리로 들이붓는 장면은 어린 내 눈에 마치 마법처럼 신기하게 보였다. 2홉들이 소주 두 병을 플라스틱 끈으로 지그재그로 위아래 묶어 한 손에 들 수 있게 만드는 손놀림은 현란했고, 신문지로 돌돌 말아 포장하는 동작은 예술 작품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명절마다 늘 같은 말씀을 하셨다. ‘아이고,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 어린 나는 그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었다. 명절은 늘 바쁘고 좋지만 빨리 지나가야 하는 날로 내 마음속에 각인됐다. 고등학생 때는 대로변에서 정종을 포장하는 일이 부끄러워 밖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고, 대학생 무렵에는 창고의 술 상자를 아버지를 대신해 전부 나르기도 했다. 그 시절의 명절은 다가올수록 공기부터 달라졌다. 마을 전체가 분주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가족을 맞이하는 설렘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추석은 전혀 다른 풍경이다. 특히 나처럼 작은 마트에는 더 이상 명절 대목이 없다. 긴 연휴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집이 아닌 여행지로 향한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자동차가 있고, 떠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 되었다. 캠핑장, 호텔, 펜션은 연휴 몇 주 전부터 예약이 마감되고, 시외의 대형 카페 주차장은 차 한 대 세울 자리조차 없다. 사람들은 집 앞 맛집은 외면한 채, 굳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새로운 맛집을 찾아 떠난다. 그렇다고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이제 마트에서 준비해야 할 것들도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처럼 명절 전날 부침가루와 식용유가 팔려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요즘은 명절 전 락스, 샴푸, 린스, 칫솔 같은 청소와 손님맞이 용품이 먼저 나간다. 집을 깨끗이 정리하고 가족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명절 당일에는 막걸리, 소주, 맥주, 과자, 아이스크림이 주력이다. 가족이 모이면 먹고 마시고 노는 게 우선이니까.

 

그리고 명절마다 꼭 오는 손님이 있다. 막힌 손님이다. 푸짐하게 먹은 뒤에는 위()든 아래든 막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명절만 되면 평소 잘 팔리지 않던 압축식 뚫어뻥 기계를 꺼내 둔다. 잠옷 차림으로 뛰어나와 뚫어뻥 있나요?’ 묻는 손님을 명절 아침마다 만나는 건 이제 익숙하다. 1년 내내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뚫어뻥이 드디어 자신의 때를 만나는 순간이다.

 

명절에는 특히 날씨가 좋으면 마트는 더욱 한산해진다. 이번 추석 역시 비는 잠깐 왔지만, 낮에는 덥고 미세먼지도 없어 여행하기 좋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다. 이런 날씨에 집에만 있는 건 가족에게 원성을 듣기 딱 좋을 것이다. 어디라도 나가야 한다. 지금의 명절은 그 시절보다 쉬는 날도 길고, 이동도 편리해졌지만, 그래서인지 그 열기가 모이지 못하고 흩어져 버리는 듯하다. 과거에 명절은 대목이었지만, 이제는 명절은 한산함이라는 새로운 공식으로 바뀌었다.

 

추석 당일 아침, 일찍 시골집을 나섰다. 마당에 서 계신 아버지는 그 시절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른 시간에 나를 배웅해주셨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예전의 팽팽한 긴장감 대신 느슨하고 조금은 지루한 평온이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버지에게는 지금의 평온이 더 좋을까. 아니면 그때의 분주함이 더 좋았을까. 도로에는 아직 차가 거의 없었고, 명절 아침의 차분함을 가르며 홀로 마트로 향했다.

 

문을 연 사람은 상가동에 나뿐이었다. 괜히 마음 한켠에 혹시나 하는 기대가 스쳤다. 밖에서도 잘 보이게 생수와 음료 박스를 꺼내어 진열하고, 냉장고에는 시원한 음료수와 술을 가득 채워 넣었다. 지나가는 차들이 여기는 문을 열었네하며 멈춰 서고, 성묘 길에 오르는 가족들이 들어와 음료수와 과자를 한 아름 집어 들고 나가길 바랐다. 그렇게 한참을 분주히 준비하고 나니, 이마에 땀이 맺혔다. 장갑을 벗고 카운터에 앉았다. 참 한산하구나

 

TV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예잇!”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진열대에 있는 소갈비 양념과 부침가루 위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이 양념들아, 이번 추석이 아니면 너희는 쓸모가 없다. 한 개라도 팔려 봐라.”

 

아무도 없는 추석의 이른 아침, 마트에서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다가, 아침에 나를 배웅해주시던 늙어 버린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매년 같은 자리에서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을 아버지였다.

 

구식 금고 옆에는 포장을 위해 반으로 자른 신문지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머리 위에는 노란 플라스틱 끈 한 줄이 길게 내려와 있었다. 손님들은 여기저기서 물건을 외치며 골랐고, 가게 안은 들뜬 목소리와 발소리로 가득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아버지는 쉼 없이 포장하고 계산을 하고 계셨다. 분주히 움직이는 뒷모습 너머로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써도, 기억은 좀처럼 또렷해지지 않았다.

 

아빠!”

 

어린 나의 목소리가 그 분주한 풍경을 가르며 울렸다. 그 순간,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돌아보았다. 땀에 젖은 얼굴 위로 환한 웃음을 머금고 계셨다. 기억이 잠시 멈춘 듯했다. 저렇게 웃는 아버지였다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명절 아침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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