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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천렵(隨筆川獵)    
글쓴이 : 이형표    19-06-16 22:49    조회 : 5,714
   수필 천렵_이형표.hwp (13.5K) [0] DATE : 2019-06-16 22:49:54


수필 천렵(隨筆川獵)

이형표

   수필 천렵! ! 이토록 홀가분한 여행이라니! 수필 하나 달랑 들고 떠나게 될 줄이야! 그날 나는 수필만 가볍게 어깨에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먼지 몇 놈들이 하늘에서 까불까불 춤을 추고 난리를 피웠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놈들을 보는 족족 엄지와 검지 속에 잡아넣고 싹싹 비틀어 버렸다. 아이티엑스 청춘 열차를 미리 예약을 해 둔 터라, 시간은 넉넉했다. 하필이면 청춘 열차일까? 내가 열창하는 만년(晩年)의 과거를 들먹이니 마음이 아려오기 시작한다. 이미 헤어진 지 오래이건만 가슴속에는 아직도 그때의 애증이 담뿍 남아 있었나 보다. 청춘이란 단어 하나에 즐거운 천렵 길이 잠시 흔들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어린 나이에 시작한 공무원 생활은 경험 부족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했다. 한양에 자주 가보지 않았던 나는 졸업하던 이듬해 경복궁 내에 있었던 허물기 전의 옛 중앙청 후문 별관에 시험 원서를 접수했다. 그때 촌놈이 바라본 중앙청과 정부청사는 아주 우람해 보였다. ! 나도 이런 곳에서 공무원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 보았다. 지금 돌이켜봐도 공무원 시험에 학력을 철폐한 것은 시골 촌뜨기에게는 아주 잘한 정책으로 생각된다.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도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요즘 많이 회자되는 바보 대통령’, 그분이 그런 케이스 아니었을까? 그 정책을 누가 만들었는지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그 당시 고교 실력으로 갈 수 있는 말단 공직 생활, 나의 애달픈 청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수원역에서 요리조리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아이티엑스 청춘 열차 플랫폼 입구에서 물 한 병을 구입하고는 잠시 기다렸다. 언뜻 눈을 들어 저만치 바라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미인 여자 한 분이 서 있었다. 나중에 저녁 친교 시간에 정신을 얼떨하게 만든 춤꾼, 바로 그분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각자 예약을 해둔 열차 칸으로 향했다. 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데 가까이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뿔싸! 존경하는 선배님들이 줄줄이 앉아 환하게 반겨 주는 게 아닌가! 열차에서 만나니 새롭게 친근감이 들었다. 두어 시간을 가뿐하게 달린 열차 덕분에 드디어 목적지인 김천역에 도착했다.

   처음 와 본 곳이라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누구와 연락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일행을 기다리는 예쁜 분이 또 계셨다. 자신의 승용차로 픽업을 해 주겠다는 김천 토박이분이었다. 바쁠 텐데도 이렇게 나와준 덕분에 함께 한 일행은 수월하게 김천의 명찰(名刹) ‘직지사면전에 위치한 한식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종류가 많아 부담스러운 반찬 이십여 가지를 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체 위대한(?) 나는 서벅서벅 잘도 먹어댔다. 퉁퉁 불거진 배를 두드리는 사이, 먼저 일정이 있으셨던 교수님과 일행이 도착했다. 곧이어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식후경을 하기 위해 천오백 년 고찰(古刹)직지사(直指寺)’ 탐방에 나섰다.

   ‘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곳에 절을 지으라라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는 일설이 있는 사찰이었다. 정확히 천오백 년 전에 최초로 지어졌다고 하니, 한국에 있는 아주 오래된 사찰 중의 하나임이 분명해 보였다. 직지사에는 유명 보물들이 즐비했다. 국보여서 보지는 못한 금동6각사리함(국보 제208)을 비롯하여 대웅전앞3층석탑 2(보물 제606), 대웅전삼존불탱화 3(보물 제670) 및 비로전앞3층석탑(보물 제607) 등 여러 기()의 보물들이 그 오랜 세월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풍상을 겪었을까를 생각하니 또 가슴이 아려왔다.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하고 삼존불 탱화 3폭을 그윽이 바라보니, 스치는 바람에도 떠는 소소한 인생의 찰나가 보이는 듯하여 영겁을 사실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사찰을 뒤로하고 교수님과 함께 내려오는 사찰의 옆길은 간간이 내리는 빗방울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의 지긋하신 말씀과 더불어 고불고불한 절길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교수님과 단둘이 걸을 수 있는 자리가 처음인지라, 자못 긴장되기도 하였거니와 어떻게 보조를 맞추어야 할지 얼떨떨하였는데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색함이 완전히 해소된 기분이었다. 그러는 사이 절 밑까지 금방 도착을 하였고, 나는 입구에서 봐 두었던 군밤 장수에게 냉큼 달려가서 군밤을 구입하여 교수님께 드렸다. 안 드시면 어찌하나 했는데 선뜻 받아주셨다. 천오백 년 고찰 관람을 마치고 껍데기가 쏙쏙 빠지는 잘 익은 군밤을 먹는 맛도 괜찮았다. 돌아오는 길에 백수(白水) 정완영 문학 기념관도 들렀다.

   드디어 이제 수필 천렵 시간이다. 각자 준비해 온 맛깔나는 수필을 서로 뽐내며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황토방 숙소의 넓은 대청에서 이십여 명의 문객들이 들고 온 싱싱하고 담백한 수필 만찬을 벌려 놓으니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이전에는 선도 보이지 않았던 전부 새로운 작품들이었다. 어떤 이는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서 만들어 왔으나 펼쳐보니 별 것 아닌 것도 있고, 나름대로 꽤 실속있고 꼽꼽하게 꾸며 온 것들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아무리 문식이 요란스럽다 한들 교수님의 지엄하신 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일말의 예외도 없었다. 문식을 자랑하면 할수록 교수님의 눈초리는 매서웠다. 다들 숙연하고 눈물을 찔끔거렸다. 훌쩍훌쩍.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아니, 못 그럴 것이다.

   저녁 친교 시간은 그야말로 정신 이탈 시간이었다. 수필 천렵에 왔으면 수필을 잡으러 와야지 왜 예정에도 없는 끼를 몰래 데리고들 왔는지, 믿었던 교수님도 그 끼를 몰래 동반하고 오셨다. 다들 속았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언짢았다. 반칙 아닌가? 누군 한큐 없는 줄 알어! 나도 가지고 올걸. 다들 그런 기분에 울울해 하면서도 해까닥 파안대소하며 늦은 봄날의 하루 저녁을 유쾌하게 보냈다. ㅋㅋㅋ

   늦은 밤, 달님은 구름 속에서 혼자 키득거리고 있었다. 내년에도 또 웃겨줘!!! ?

 



박영화   19-07-11 23:41
    
이렇게 재밌게도 쓰시는군요. ㅎㅎ
이형표 샘도 내년 엠티에 '끼'를 꼭 데리고 오세요. 궁금합니다.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
이형표   19-07-12 23:31
    
박영화 작가님! 감사합니다.
즐겁게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작가님의 하시는 일 늘 만사형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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