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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릿한 역전승    
글쓴이 : 박희래    25-11-15 17:07    조회 : 275
   짜릿한 역전승.hwp (63.0K) [0] DATE : 2025-11-15 17:07:26

짜릿한 역전승 

박희래 

  가을 햇살이 눈 부신 토요일 아침, 자전거 타기 딱 좋은 날이다. 아내와 함께해서 더 좋다. 경의선 국수역에서 신원역으로 가는 길에 넓게 펼쳐진 황금 들판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다. “산들산들 가을바람에 한들한들 춤추는 코스모스<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이라는 노래를 저절로 흥얼거리게 한다.”


 양평군 양서면에 소재한 양서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 파란 하늘에 걸려 멋들어지게 펄럭이는 만국기가 눈에 들어온다.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열세 살 가을날로 날아간다. 초등학교 때 달리기는 곧잘 하여 가을운동회 때마다 공책과 연필을 탔다. 육 학년 때의 일이다.

선생님들은 학년마다 전체 학생을 불러 모아 놓고 이어달리기할 선수를 뽑았다. 담임 선생님의 지명에 의해 육 학년 대표 백군 마지막 이어달리기 주자로 뽑혔다. 청군 대표는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공부도 잘한 반장이었다. 내가 어떻게 이어달리기 주자로 뽑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뽑힌 이상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주는 일 학년 여학생으로부터 출발하여 육 학년 남학생 주자가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어 있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멋지게 달려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누구나 굴뚝 같겠지만 잘 달려보고 싶은 마음에 욕심이 지나치면 넘어져 다칠 수도 있다. 이어달리기는 숨 가쁘게 달려오던 주자가 기다리고 있는 다음 주자에게 빠르게 바통을 전달하여 경주를 이어가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어달리기를 지도하는 선생님은 학년 대표로 뽑힌 주자들에게 바통을 주고받는 방밥을 가르쳤다. 달려오는 주자가 지친 듯하면, 그 자리에서 바통을 받지 말고 약간 뒤로 물러나 앞으로 달려가며 바통을 받아야 탄력을 살려 잘 달릴 수 있다고 하셨다.

  가을운동회를 앞두고 선생님과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예행연습을 몇 번 했다. 키도 작고 다리가 짧아 신체적으로 불리한 여건에서 그와 비교가 되지 않아 주눅이 들 수 있었다. 그러나 연습하면서 내가 그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두 걸음 떼면 난 세 걸음 이상 떼어야 한다는 것.

  이어달리기는 가을운동회에서 모든 경기와 놀이가 끝난 후, 절정을 장식하는 마지막 경기이다. 그러다 보니 만인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전교생과 선생님, 학부모, 동네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전 경기가 펼쳐진 그날, 드디어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려 퍼지고 화약 냄새가 온 공기를 가득 채웠다. 연습 때와 마찬가지로 육 학년 여학생들까지는 청군이 앞서고 있었다. 나에게 바통을 넘겨줄 선수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미 바통을 받은 청군 대표 반장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드디어 나도 바통을 무사히 넘겨받았다. 신발이 벗겨지지 않도록 미리 꽉 끼는 신발을 준비했고, 이제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일만 남았다. 검정 고무신이 땅을 박차고 탄내 나게 달렸다. 운동장이 흔들릴 듯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함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고, 내 귀에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눈앞에 골인 지점이 조금 남아 있었을 때 청군 대표와의 간격은 거의 좁혀졌다. 가시권에 들어왔다. 골인 줄도 뚜렷하게 보였다. 그때까지도 뒤를 따라가다가 마지막 힘을 쏟아부어야 했다. 죽는 힘을 다해 달렸고, 기어코 그를 추월했다.

  백군인 나의 가슴이 골인 줄에 먼저 닿자, 여기저기서 한숨 섞인 원망과 함성이 뒤섞여 오래도록 가을 하늘에 울려 퍼졌다. 역전승의 짜릿함은 내 자신감을 크게 북돋워 주었다.

  시상식은 중앙 단상에서 진행되었고, 교장 선생님께 필통과 공책 열권을 부상으로 받았다. 이 필통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내 가방 속에서 삼 년간 함께했다. 공책은 동생에게 선물로 주었다.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추억을 나눌 때면, 육 학년 가을운동회 이어달리기는 종종 화제가 된다. 가을운동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두웠지만, 걸어가면서 아버지께서 기분이 좋으셨던지 한 말씀을 하셨다. “장하다!” 그 말은 오늘을 살아가는 데 소중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

  

   비봉산과 어우러진 산수화 같은 공립 초등학교 교정과 육 년 동안 정든 동무들, 그리고 부모님을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드렸던 그 운동장을 찾아가 다시 힘껏 달려보고 싶다. 교실 문을 열면 동무들과의 여러 추억이 되살아날 듯하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깔깔거리던 해맑은 까까머리 동무들, 부모 사랑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그 시절이 떠오르면, 하늘은 그리움에 물들어 푸르름이 짙어지고, 가을바람에 만국기가 흩날리며 추억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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