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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온 음료 한 병    
글쓴이 : 서동관    26-10-07 17:43    조회 : 105

이온 음료 한 병

서동관


당진에서 볼일을 마치고 자동차를 타고 서산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날씨가 맑아 여행 가기에는 딱 좋겠다 싶었다. 서산 나들목 1km 정도를 남겨 둔 지점을 지나고 있을 무렵 저만치 자전거를 타고 가는 라이더가 보였다. 순간 이런 날씨에 자전거 여행이라니 너무도 부럽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도 한동안 미친 듯이 자전거 여행을 다닌 적이 있었고, 자전거 전국일주를 세 번이나 하며 자전거 여행 누적 거리가 25,000km나 되는 라이더였다. 8년 전 무릎 연골을 다치면서 자전거 타는 것을 중단한 이후로 한 번도 자전거 여행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앞에 보이던 자전거 라이더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자전거 여행으로 쌓인 경험에 의한 촉이 본능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줄여 라이더를 천천히 지나치며 빠르게 훑어보았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자전거의 앞뒤 바퀴였다. 펑크로 인해 자전거를 끌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앞뒤 바퀴를 빠르게 훑어보았으나 바람이 잘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문제는 없어 보였다. 다음으로 체인이 끊어졌는지 확인했다. 체인도 가끔 발생하는 문제이다. 예전에 대전에서 체인이 끊어져서 끌고 가는 라이더에게 현장에서 바로 체인을 이어준 경험도 있었다. 다행히 체인은 정상적으로 걸려 있었다. 이번에는 뒷바퀴에 있는 변속 장치인 드레일러를 확인했다. 드레일러도 어쩌다 문제가 생기는 곳인데, 이상은 없어 보였다. 전체적으로 자전거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짐을 살펴보았는데, 자전거 짐받이에 페니어 가방이 양쪽으로 얹혀 있었다. 헬멧 대신 챙이 넓은 등산 모자를 쓰고 있어 영락없는 장거리 여행자의 차림새였다. 라이더는 자전거를 끌며 갓길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었고, 나는 라이더의 자전거 상태를 빠르게 확인하며 지나쳤다.


그를 지나쳐서 200미터쯤 가자 우측에 차를 댈 수 있는 공터가 나왔고, '저기에 차를 대고 라이더를 만나볼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예전에는 곧잘 그랬다. 길에서 라이더를 만나면 차를 세우고 생수 한 병을 건네며 '숨 좀 고르고 가세요.' 하고 말을 붙이곤 했다. 그렇게 잠시 쉬게 하며 그들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내가 경험한 정보도 나누곤 했다.

그런 일이 빈번했기에 일부러 생수와 초코파이를 차 안에 따로 준비해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터가 너무 빨리 나타난 탓에 고민할 틈도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만약 라이더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은 후에 공터가 나타났더라면 차를 바로 세웠을 것이다. 결국 그 짧은 순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지나치면서, 뜻하지 않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늘 그래 왔듯 다음 공터에서 저 라이더를 기다려 볼까? 아니야, 이미 지나쳤는데 굳이 기다릴 필요가 있겠어?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그러는 사이 차는 서산 나들목을 지나 달리고 있었지만, 고민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라이더인데 만나보고 갈까?' 마음이 라이더를 만나고자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차를 세울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차는 점점 시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를 세울 만한 곳이 없네. 어쩌지? 여기까지 걸어서 오려면 30~40분은 걸릴 텐데. 차라리 내가 차를 돌려야 하나? 그런데 차를 일부러 돌려서 만나기엔 지금 기분이 좀…'

고민이 길어지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를 발견하기 직전까지 나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침에 어머니를 이모 댁에 모셔드리다가 심한 말다툼을 했다. 아침의 그 일로 마음이 아직 편치 않아, 낯선 사람과 여행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고민하는 시간만큼 시내는 더 가까워지고 차를 돌리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자전거에서 내려 걷는 경우는 대개 둘 중 하나다. 자전거에 문제가 있거나, 신체 어느 부위에 통증이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쩌면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차 안의 온도계를 보니 기온이 거의 30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5월도 가기 전에 벌써부터 고온이라니. 달리는 차창을 내리고 손을 밖으로 뻗어 보았다. 바람 속의 뜨끈한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 더위 속에서 계속 걷다가는 지칠 게 뻔했고, 몸이 아픈 상태라면 더욱 악화될 것이었다.

‘차를 돌려야겠다.’

이 결정을 내렸을 때는 라이더를 지나친 후 8km쯤 지난 시점이었고, 서산 시내를 거의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차를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중에 편의점이 보여서 차를 세우고 시원한 이온 음료 한 병을 샀다. 물보다는 빠르게 수분을 흡수할 수 있는 이온 음료가 그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오던 길로 달리면서 라이더를 놓치지 않으려고 건너편을 주시하며 달렸다. 하지만 중앙분리대가 계속 이어져서 건너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멀리 두면 중앙분리대에 시야가 가려져서 바로 옆에 시선을 두고 달려야 했다. 앞과 옆을 동시에 살피는 위험한 운전이었다. 그래서 2차선에서 속도를 줄여 달렸고, 한결 옆을 살피는 데 여유가 생겼다. 얼마를 가자 길 건너편에 갑자기 무언가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라이더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왠지 지나친 것 같았다.

'여기서 차를 돌려야 하나? 혹시 라이더가 아니라면 또 3km를 달려서 유턴을 해야 하는데…' 국도는 신호등이 없는 대신, 마을 진입로 아래에 유턴을 할 수 있는 굴다리가 있다. 만약 라이더가 아니라면 다음 굴다리까지 가야 하므로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 나는 확신이 없었기에 처음 라이더를 만났던 자리를 지나치고 나서 다시 서산 방향으로 유턴했다.

아까 그를 지나친 지점으로부터 500미터 정도 더 가자, 나들목 고가 그늘에 누워서 쉬고 있는 그가 보였다. 그를 지나친 지 25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차를 세웠더니, 차의 기척을 느낀 그는 상체를 일으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온 음료 한 병을 들고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자전거 여행 중이세요?"

그는 약간 경계하는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까 지나가면서 걷는 모습을 보고 걱정되어 차를 돌려서 왔다고 하자, 경계심을 풀고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했다. 그는 춘천에서 여행을 시작해 오늘이 4일째이며, 전국을 한 바퀴 도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나도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세 번 정도 다녀왔고, 첫 여행 때 많은 도움을 받았던 기억 때문에 길에서 라이더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전거를 끌고 걷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페달을 밟을 때 뒷꿈치에 통증이 느껴져서 걷고 있다고 했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는지 물으니, 서산 시내 찜질방이 오늘의 목적지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차 안에서 볼펜과 메모지를 찾았으나 마땅한 종이가 없어, 얼마 전 받은 부동산 명함 뒷면에 내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서 건넸다.

"서산에 도착하시면 찜질방에서 씻고 저녁에 꼭 연락을 주세요.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는 내 말에 미안하면서도 고마워하는 표정으로 저녁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나의 첫 자전거 전국 일주는 2007년 5월 30일에 시작되었다. 오늘이 2026년 5월 30일이니 그날로부터 정확히 19년이 흐른 셈이다. 세월은 흘러갔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생생하다. 부천에서 출발해 임진각을 지나 춘천, 양구, 고성, 강릉, 동해, 울릉도, 독도를 거쳐 삼척과 영덕을 지나 안동으로 향했다. 달리는 내내 맞바람을 맞으며 도착한 곳은 청송의 진보면이었다. 기운을 소진해 힘없이 그늘에 앉아 교통 지도를 보며 남은 거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그때 만났던 사람이 바로 안동의 라이더, 김시정 님이었다.

김시정 님은 맞바람에 지친 나에게 시원한 이온 음료 한 병을 건네며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나는 지나온 여행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오늘의 종착지가 안동이라는 내 말에 김시정 님은 자기 집이 안동이라며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덕분에 그날 저녁 안동 간고등어로 푸짐한 한 상을 먹을 수 있었다. 그 따뜻한 경험 이후로 나는 길에서 만나는 여행 라이더와 내 것을 나누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한 사람이 베푼 환대와 배려가 나의 여행 철학이자 삶의 태도가 된 것이다.


오늘 낮에 만난 그 라이더에게서 연락이 올지는 알 수가 없다. 19년 전 낯선 이가 내게 건넸던 이온 음료 한 병과 따뜻한 밥 한 끼가 19년의 세월을 건너 또 다른 낯선 이에게 닿는다면 오늘 저녁은 참으로 행복한 밥 한 끼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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