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칠 바우의 추억
이형표
매년 장마철인 칠월 이맘때쯤이면 ‘칠칠 바우’는 괴성을 내곤 했다. 억수 같은 빗줄기가 한차례 지나고 나면, ‘칠칠 바우’는 ‘치르륵 치르륵’하고 신음 소리를 내다 못해, 결국에는 ‘칠칠 칠칠’, 칠칠맞은 소리를 내면서 바위 위로 흰 물줄기를 쏟아냈다. ‘칠칠 바우’는 산속에 병장처럼 두른 암벽의 이름이다. 사실, 바윗덩어리가 겉면이 매끈하게 보여도 굴곡이 있기 마련이어서 억수장마가 바위를 타고 흘러내릴 땐 으레 칠칠 거리며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어린 시절 그 바위는 내가 사는 동네의 아름다운 ‘칠칠 바우’로 불리었다.
‘칠칠 바우’는 충청도의 제천 송학산 칠 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칠칠 바우’는 산속 깊이 뿌리박혀 있는 널따란 화강암 암벽으로 동네의 고유 명칭이었다. ‘송학산’의 명칭도 예전에 ‘소나무’와 ‘학(鶴)’이 많이 서식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학은 잘 보이지 않고 소나무는 아주 무성한 편이다. 송학산 밑에 자리 잡은 내 집 뒤에서 바라보면 넓고도 어슷하게 장벽을 두른 검은색 바위가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칠칠 바우’를 지나 산 정상 못 미쳐 옛 절터인 소악 사지 옆 용마루 바윗돌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소악사 3층 석탑이 우아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불타 없어진 천년의 세월 동안 공터였던 그 절터를 대신하여, 1945년 산 정상 부근에 강천사라는 아담한 사찰이 새롭게 창건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나는 중 고등학생 시절 힘들게 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돕고자 여름방학이면 으레 동네 친구들과 지게를 지고 들로 산으로 소 꼴을 베러 다녔다. 주로 집 뒤에 있는 송학산으로 소 꼴을 베러 갔다. 자주 가는 ‘칠칠 바우’ 밑은 소가 먹기에도 싱싱한 쇠뜨기나 칡넝쿨 같은 산 풀이 무성하여 소 꼴을 베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때는 점심으로 부엌 앞에 있는 펌프로 퍼 올린 찬물에 보리밥 한 바가지를 말아 된장에 풋고추를 푹푹 찍어 먹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점심을 때운 나는 동네 친구들 몇몇과 함께 송학산 바로 아래, 지금은 사라진 삼태네 초가집으로 지게를 지고 몰려가곤 했다.
그 집은 쌍둥이 딸만 셋을 낳은 집이라 하여 동네에서 ‘삼태네’로 불렸다. 삼태네 집에 모인 친구들은 한창 뜨거운 한낮에는 날씨가 너무 더워 바로 산으로 갈 수가 없었다. 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친구네 집에 모여 노닥거리다가 더위가 어느 정도 잦아들면 그제야 각자 바소구리가 달린 지게를 지고 산으로 향했다. 우리는 친구네 앞마당에 주렁주렁 달린 잘 익은 개복숭아를 따 먹으면서, 마당 한 켠에 있는 느티나무 그늘 밑 평상에 앉아 시시덕거리며 더위를 식혔다.
그때의 개복숭아는 왜 그리 맛이 있었는지, 두 손으로 딱 쪼개면 쫘~악하고 벌어진 개복숭아의 벌건 속살이 그리 탐스러울 수가 없었다. 복숭아씨에 박혔다가 떨어져 나온 골이 진 황금빛 속살은 마치 저녁 노을 같이 노랗게 익은 것이 아주 먹음직스러웠다. 살짝 물컹해진 속살에서는 신듯하면서 달짝지근한 과즙이 한 움큼씩 터져 나왔다. 그때의 그 맛이란, 지금도 생각만 하면 그 시절의 개복숭이 먹고 싶어 입안에서 타액의 전쟁이 일어나곤 한다.
그러다 배가 부르면 꼴꾼들은 제법 널찍한 마당 한복판에서 우리끼리 이름을 붙인 일명 ‘낫 놀이’를 즐겼다. 위험천만한 장난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참말이지 스릴이 있었다. 각자 집에서 시퍼렇게 날을 세워 온 낫을 들고 묘기를 부리는 것이다. 낫을 높이 던져서 떨어질 때, 낫의 손잡이를 제대로 잡아채는 기술 아닌 기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들 쉽게 엄두를 못 내는 일이라 낫을 던져놓고 피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낫은 마당에 곤두박질을 쳐 친구네 마당은 구멍이 폭폭 파였다. 돌에 부딪힌 낫은 이가 빠지기도 하고 구부러지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나는 용기를 내어 낫을 던져놓고 멋있게 받아보리라 작심을 했다. 하늘 높이 던져진 낫은 푸른 창공에서 세바퀴 제비를 제멋대로 돌더니 전속력으로 낙하를 했다. 나는 무섭게 떨어지는 낫을 매의 눈처럼 응시하면서 순간적으로 손잡이를 낚아채긴 했는데, 그만 손잡이가 새끼손가락에 걸리면서 둥그런 날이 내 손등을 강타하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손등에서 불이 번쩍, 뼈다귀를 후려치는 것이다. 손등에 하얀 힘줄 같은 것이 눈에 번뜩였다. 손등에 살이 쩍 갈라지고 하얀 뼈가 보이는가 싶더니 벌건 핏방울이 몽글몽글 솟구쳤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오금이 섬뜩하게 저려오는 내 소년 시절의 끔찍한 여름날이었다.
그렇게 용빼고 놀다가 올라가는 산길은 후끈후끈 숨을 멎게 할 정도로 무더웠다. 가난하고 후줄근한 옷차림은 금세 땀으로 흠뻑 젖어 들었지만, 산속 깊이 위치한 ‘칠칠 바우’ 밑은 오히려 선듯한 바람이 등짝을 오싹하게 했다. ‘칠칠 바우’ 밑에 도착한 꼴꾼들은 지게를 벗어놓고 부지런히 소 꼴을 베어댄다. 암벽 밑에는 소가 잘 먹는 쇠뜨기나 칡넝쿨, 싸리잎 같은 무성하고 싱싱한 풀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꼴꾼들은 각자 부지런히 풀을 한 바소구리씩 꾹꾹 눌러 가득 채운 뒤에는 지친 허기를 달래려 바위 밑 움푹한 가시덤불 속으로 모여들었다.
바위 밑의 무성한 풀숲에는 지천으로 널린 어른 엄지손톱만 한 산딸기가 붉은 입술을 내밀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달콤한 과즙이 뭉텅뭉텅 쏟아져 나오는 산딸기를 꼴꾼들은 배가 부르도록 따 먹었다. 어느 날, 나는 딸기 따 먹는데 정신이 팔려 발밑으로 독사가 지나가는 줄도 몰랐다, 나중에 친구로부터 그 사실을 듣고 기겁을 한 적이 있었다. 군입거리가 따로 없던 어린 시절, 송학산 언저리에는 산딸기나 버찌, 깨금(개암), 돌배 같은 토종 과일들이 많았다. 우리는 입술과 손가락이 온통 발갛게 물이 들도록 산딸기를 따 먹었다. 그러곤 커다란 소나무 밑 바위 위에서 땀을 식히며 쉬다가 잠깐씩 잠이 들곤 했다.
그럴 때면 가끔은 느닷없이 매지구름이 일면서 삽시간에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기도 했다. 그때의 시원한 소나기는 한 번 내렸다 하면 열대지방의 ‘스콜’처럼 주룩주룩 아주 맹물 바가지를 냅다 퍼붓는 듯했다. 그렇게 소나기가 한바탕 내리는 날은 천둥 번개도 잘 치지 않았다. 산골짜기에 퍼붓는 소나기는 주렁주렁 줄 방울처럼 쏟아졌다. 잎이 무성한 솔잎에는 빗줄기가 방울방울 맺혔다 떨어졌다. 창대 같은 빗줄기는 호박잎 같은 칡잎에도 철퍼덕철퍼덕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그때마다 그걸 이기지 못하는 넓적한 칡잎들은 쓰레하게 연신 고개를 젖혔다 올리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비를 피하느라 어웅한 돌 틈에 몸을 숨긴 채 그 광경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낄낄거리며 재미있어했다.
어느 날, 나는 추레한 나의 단벌 하늘색 삼선 츄리닝 상의를 아예 벗어버린 채 맨몸으로 그 빗줄기를 맞기도 했다. 정수리 속으로 콕콕 들이박히듯 내리꽂는 빗줄기가 내겐 그렇게 시원하고 통쾌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닥칠 세상의 고통을 미리 체험하기라도 하듯 온통 가슴으로 몽땅 받아들였다. ‘칠칠 바우’는 내게 그렇게 아련한 추억이 깃든 내 어린 날의 꽃동산이었다.
고2 가을 무렵인 것 같다. ‘칠칠 바우’의 석질이 매우 우수한 화강암이란 소문이 외지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인가부터 동네의 마당발 김 씨 아저씨가 뻔질나게 백여 호 동네를 집집이 제집 드나들 듯하더니, 그다음 이듬해 봄부터인가 그 검은 위용을 뽐내던 ‘칠칠 바우’ 일대는 개발이 시작되었다. 70년대 초부터 불기 시작한 ‘조국 근대화’ 바람이 충청도 시골 ‘칠칠 바우’까지 불어 닥친 것이다. 근대화란 미명은 그렇게 아름다운 ‘칠칠 바우’를 수출 입국의 사명을 다하는 화강암 채석장으로 바꿔버렸다. 팡팡 터지는 발파음과 함께 콤푸레사의 요란한 굉음이 멎으면, ‘칠칠 바우’는 하얀 속살을 드러낸 채 영락없이 사각형으로 반듯반듯하게 잘리어 나갔다. 컨테이너만 한 크기의 네모난 바위 조각은 일본에 원석으로 실려 갔다. 비가 올 때마다 치르륵 치르륵 소리를 내던 ‘칠칠 바우’의 심장은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파헤쳐졌다.
조용했던 동네에서는 매연 냄새와 더불어 먼지 풀풀 날리며 마을 신작로를 내달리는 덤프트럭의 위험까지 고스란히 안고 살았다. 급기야 군청에 민원이 제기되면서 ‘칠칠 바우’의 채석허가 취소를 탄원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사이 ‘칠칠 바우’는 이리저리 파헤쳐져 볼품없이 되어갔다. 명산의 정기를 건드린 탓인지, 그동안 채석장에서 일하던 마을 사람 십여 명이 그곳에서 일하다가 떨어져 죽거나 다쳤다. 산림이 훼손되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급기야 주민들의 거듭되는 항의와 중앙 요로에 제기된 민원으로 인해 ‘칠칠 바우’의 채석행위는 그 뒤 십여 년 만에 중단이 되었다. 그 위용을 자랑하던 ‘칠칠 바우’가 일부나마 ‘돌값’에 처분되어 팔려나간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세월이 흘러 그동안 훼손되었던 ‘칠칠 바우’는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 화강암 채석으로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 보기 흉했던 암벽은 채석이 중단되면서 임시방편으로 찢긴 바위에 검은 타르 칠을 하고, 석축을 쌓아 낙석 방지를 하여 나름대로 응급조치를 하였다. 그렇게 송학산의 옛 명성은 많이 훼손되었으나, 산의 놀라운 자연 치유력과 ‘입산 금지’ 구호 덕에 그동안 풀과 나무들은 그야말로 왕성하게 자랐다. 암벽 주변의 숲은 오히려 더 칠칠하고 무성하여 옛 상처를 오련하나마 가려 주었다.
얼마 전부터 산 정상에 있는 강천사에서는 주지 스님이 마을 주민들과 협력하여 매년 가을 ‘산사 음악회’를 열고 있다. 자치단체를 비롯하여 지역 유지들은 영산(靈山)인 송학산 살리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다. 이제 예전의 산딸기를 풍성하게 따먹으면서 소 꼴을 베던 어린 시절 ‘꼴꾼’의 모습이 서린 애틋한 ‘칠칠 바우’의 정취를 되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안개 그윽하게 드리운 옛 ‘칠칠 바우’의 결곡한 자태를 회상하면서, 이제 나 자신 지나간 추억과 더불어 서서히 나이를 먹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