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통더위를 보내면서
김남신
연일 폭염특보다 폭염경보다 하면서 100년 만의 더위라는 둥, 1994년보다도 더 덥다는 둥 자꾸 22년 전 여름으로 나를 데려가고 있다. 그해 여름 개인적인 느낌으론 제일 더웠던 여름이었고 살면서 가장 힘든 더위였다. 부산에서 주택 2층에 살던 때였고 에어컨도 없이 오로지 선풍기에만 의존해 살던 때라, 저녁에 들어오면 후끈후끈한 열기가 말 그대로 찜통이었다. 도저히 그대로 잘 수가 없어 옥상에 올라가 물을 뿌리든지, 아니면 아예 옥상에 텐트를 치고 네 식구가 캠핑 온 것마냥 자기도 해봤지만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그땐 나도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애들 학원비라도 보태려고 학습지 회사에 갔었는데 다니다 보니 92년도에 지부장 발령을 받아 북구 덕천동으로 가게 되었다. 남구에서 북구까지 출퇴근 하는 게 너무 힘들었지만 남편 직장도 남구에 있고 애들 학교문제도 있어서 힘들어도 혼자 감당하기로 했었다. 문제는 출근시간보다 퇴근시간에 차가 더 밀려 귀가시간이 자꾸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남편이 일찍 퇴근해서 애들 챙기고 저녁까지 해결하고 있었다. 남편은 무척 힘들지만 즐겁게 도와주었으며, 식구 모두가 정말 열심히 살았었다.
그 사무실 앞이 93년 3월 28일에 구포역 열차사고가 난 곳이었다. 다행히 일요일이라서 사고 당시엔 없었지만 사무실 한 쪽은 전체가 유리창으로 되어있어 내 자리에 앉아서도 밖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사고 다음 날 김영삼 대통령께서 현장에 오셔서 너무 황당하고 침통한 마음으로 돌아보시던 모습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너무나 가슴 아프고 엄청난 사고였으니까. 그 사고 이후에 퇴근시간 정체를 피하려고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다 현장에 귀신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르면 정신없이 도망쳐 오다가, 만덕터널에서 30분 이상을 꼼짝없이 차가 막혀 잡혀 있곤 했었다.
한 쪽이 온통 유리창인 그 사무실이 서향인지라 오후엔 너무 더워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무더운 여름에 지부 관리 구역 조정이 있어 더 힘들게 만들었다.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어 총괄 부사장님께 전화를 했다.
“부사장님! 지금 뭐 하시자는 겁니까? 이 더운 때 조정을 해야 하냐고요 에어컨 팡팡 나오는 사무실에만 계시니 더운 날씨에 직접 고객 집에 관리하러 다니는 고충을 아세요? 이 사무실에 한번 와보세요 직접 와 보시라고요.” 정말 당돌하기 짝이 없었지만 개인의 이기심이 아니라 내 지부 식구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이 더 컸기 때문에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었다. 외곽에 나와 있는 지부 사무실은 다 선풍기에 견디고 있었지만 부산 본부 지부들, 또 사무국은 건물 자체에 에어컨시설이 되어있었다.
다음날 부사장님과 사무국 소장님이 창고에 있던 선풍기와 수박을 사 들고 우리 사무실을 방문 하셨다. 한낮에 오셨으니 사무실 상항을 얘기할 필요도 없었다. 선풍기에선 더운 바람만 계속 나오니 그때 부사장님이 민망해 하시며 “내가 올 여름에 이렇게 더울 줄 알았나? 정말 날씨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화명 신도시가 생기니 미리 좀 대비하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지역조정은 무산 되었다. 그 찜통더위가 끝나고 전국에 지역지부에 본사 차원에서 에어컨을 다 들여 주었다. 이게 바로 사후약방문인가. 94년 가을에 에어컨이 엄청 많이 팔렸단다. 그렇게 덥고 교통도 안 좋고 가끔 앞에 사고 현장에서는 귀신이 나타난다는 곳이었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내 사업장이었다. 근 10년 회사를 그만 둘 때까지 더 좋은 새 건물로 옮기라는 것도 마다하고 그 자리를 고집하고 있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때처럼 열심히 살아 본 적이 없었다.
그해 가을에 계속 좋은 일만 있었다. 우수지부, 모범지부, 상복이 터졌다. 운전면허증도 따 내차로 출퇴근 하게 되니 차가 밀려도 한결 나았다. 역시 힘든 고비를 넘기고 나면 보상이 주어지는구나 생각했다. 그 이듬해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애들도 공부 잘하고 잘 커 주었다.
2016년 올 여름에도 정말 더웠다. 몸으로 느끼는 더위는 94년 여름보다 덜 더웠는지 모르지만 마음은 훨씬 막막하다. 3년 전 서울로 이사 올 때까진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잘 지내리라 믿었다.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돌아오자 얼마 안 되어 아들들이 대학에 들어가 하나씩 집을 떠나버린 아쉬움에 함께 살면서 다정한 부모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도 자꾸 빨리 결혼하라는 둥 잔소리를 늘어놓게 된다. 아들들 방 문 은 이 찜통더위에도 꼭 닫혀있다. 대화를 피하며 뭐든지 알아서 한다고 한다. 자립심이 강하게 자라다보니 부모 간섭이 부담스러운가보다. 남편이 더 못 견디는 거 같다. 그 마음이 이해는 되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정말 가슴이 답답하다. 날씨까지 한몫 거드는 거 같다.
“한결같음이 지루하다고 말하는 건 얼마나 주제넘은 허영이고 이기적인 사치인가요”란 이해인님의 ‘소나무 연가’ 한 구절을 떠올리며 위로를 삼아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여름학기부터 수필반에 등록하여 다니게 된 일이다.
또 한 번 열정을 쏟고 싶은 마음에서였지만 아직은 시작인지라 너무 어렵고 두렵기만 하다.
하지만 나에겐 에어컨보다 더 시원한 바람을 가져다 준 건 확실하다.
존경스러운 교수님, 따뜻한 문우님들과의 만남은 더 할 수 없는 행운인거 같다.
또 이십년 후쯤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여름이 될지 모르겠다.
2016년 찜통더위를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