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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라 찾기    
글쓴이 : 민인순    17-03-09 09:51    조회 : 12,633
   노라 찾기.hwp (33.5K) [2] DATE : 2017-03-09 09:51:11

노라 찾기

                                                                                                                                                  민 인 순

 

  H.입센이 지은 인형의 집은 우리 집 책장에도 꽂혀 있다. 이 책은 도서관이나 서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책이다. 내가 가진 것은 마른 가랑잎처럼 퇴색한 겉모습을 하고 있어 볼품마저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에게 좋은 자리를 내주었다.

  수 년 전에 친정집 수리를 할 때였다. 어머니가 다락을 정리하시면서 버리기에는 아깝고 보관하기엔 귀찮은 물건을 모아서 주인에게 돌려주셨다. 이 책은 셋째 삼촌이 여자 친구에게 받은 선물인 것이 분명한 증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나와의 인연을 더 깊게 생각하셔서 큰딸이라 쓴 상자에 담아서 내게 보내셨다. 나는 가끔 그 책 앞에서 숨이 막히고 가슴이 뛰기도 한다. 20세기 초 페미니즘의 미래를 이야기한 명작이어서가 아니다. 사소한 손수건 한 장이 누군가에게 평생의 위로가 되는 것과 같다.

  내가 인형의 집을 처음 손에 쥔 때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하는 술래잡기나 사방치기 대신 다락에서 혼자 놀고 싶었다. 다락은 안방 아랫목 미닫이를 열고 올라갈 수 있었다. 서까래가 말라 죽은 황소의 갈비뼈처럼 드러나 있어서 대낮에도 무서웠지만 알전등을 켜고 나면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는 오붓한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다락에는 서울서 공부하는 삼촌들이 한 학년 진급을 하거나 졸업을 할 때마다 내려 보낸 물건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삼촌들이 보던 책과 쓰던 공책, 몽땅한 크레용과 연필, 작은 유리병에 든 잉크와 템버린, 색종이와 노란 고무줄이었다. 나는 삼촌의 흔적들을 차지하고는 종합선물셋트를 받은 듯이 좋아했다. 어린 동생들을 따돌리고 다락에 올라가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특혜였는데 나는 그 달콤함을 충분히 누리느라 꽤 많은 시간을 다락에서 보냈다. 할머니가 군불을 때고 방에 들어오실 때까지 놀다가 그럴싸한 책 한 권을 들고 다락에서 내려오면 어느새 해가 넘어갔다.

  어느 날, 책장마다 점점이 박혀있는 글자들이 궁금해졌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들의 차지였으므로 할머니께 읽어달라고 하였다. 기꺼이 책을 읽어주실 거라는 기대는 흙벽 틈 사이로 빠져나가버렸다. 할머니는 글자를 알려주는 대신 책은 소중한 것이니 딱지를 접거나 휴지로 쓰지 말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도 하셨는데 그 말씀은 힘없이 조용히 하셨다. 글을 배우지 못한 서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너는 나처럼 서러워서는 안 된다는 듯이.

  다락에서 혼자 노는 재미가 시들해질 쯤에 할머니는 옆집 언니를 불러서 같이 놀도록 하셨다. 그 때 다락의 보물들이 후하게 방출 되면서 자연스럽게 학교 놀이를 하게 되었다. 언니가 선생님 역할이어서 나는 학생이 되었다. 나보다 세 살이 많은 언니는 담임선생님 흉내를 내면서 나를 가르쳤는데 자기가 알고 있는 단어들을 읽어주고 따라 읽으라고 했다. 받아쓰기를 하고 숙제 검사도 했다. 놀이 중간에는 점심시간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 시간을 위해 엿이나 누룽지 같은 간식을 마련해 주셨다. 그 놀이가 익숙해지자 나는 노라와 같은 쉬운 글자를 더듬더듬 읽을 수 있었다. 저녁밥을 먹고 난 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계신 자리에서 노라두 글자를 읽고 박수를 받기도 했다.

  내가 인류의 문명에 동참하기 위한 문자 배우기 첫걸음으로 노라를 익힌 것은 다락에서 내려 올 때 내 손에 잡힌 것이 입센의 희곡집인 인형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방으로 내려 온 그 책은 옆집 언니와 학교놀이를 할 때 언니가 진짜 선생님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폈다가 덮었다가 한 책이기도 했으니까.

  이렇게 시작한 인형의 집과의 인연은 결혼식 날로 이어진다. 내가 아버지의 손에서 남편의 손을 잡고 주례 앞에 섰을 때였다. 주례를 맡으신 교수님은 동그랗게 말아서 파란 끈으로 묶은 원고지 뭉치를 펼치셨다.

 

오늘 황홀한 그대들 손 이끌어

푸른 초원으로 나왔나니

풀잎마다 이슬 젖은 들판

알뜰히 그대들의 대지를 일굴지어다.

 

오랜 목마름으로

오랜 그리움으로

찾아 온 초원이거니

뜰엔 한 그루 나무를 심고

늘 푸르게 가꿀 일이다.” <후략>

 

하시며 시론 강의를 하실 때처럼 멋지게 축시를 낭송하시면서 주례사를 시작하셨다. 나는 예상하지 못한 사랑에 감격해서 그 순간 시간이 거꾸로 흘러 강의실에 있는 착각을 했다. 따뜻한 봄날 동산 기슭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목소리가 촛불 사이로 들려올 때 꿈속에서처럼 나른했었으니까.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살지 말고······.”

로 축사가 이어졌는데 그 다음 말씀은 다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처음 그 한마디가 뚜렷하게 가슴에 남아서 내 삶의 등대가 되었다.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는 세 아이의 엄마이고 한 남자의 헌신적인 아내이다. 귀여운 다람쥐처럼, 노래 부르는 종달새처럼, 날아다니는 요정처럼 살았다. 하지만 결혼 초에 남편을 위한다고 한 거짓 행동이 문제로 불거진다. 남편의 단호한 태도에 실망을 한 노라는 자신이 놀이방의 인형과 같았다는 것을 깨닫고 집을 나간다······.

  한번은 남편과 노라를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남편은 장난처럼 그러나 진심인 듯이 노라는 자신의 삶을 찾는다고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가는 속수무책의 여자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쓸데없이 전염이 될까봐 근심이 된다며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지만 나는 아직까지 노라를 잘 모른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읽은 글자가 노라라고 어머니도 할머니도 인정하셨지만, 그것으로 노라를 알 수는 없었다. 글을 배우고 결혼을 하고 어머니가 된 지금까지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고 나도 그 시간 속에 있었다. 많은 일들을 겪는 동안에 나는 배부른 가운데 허기를 느꼈고 무언가 알 수 없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그 때마다 노라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아쉬워했다. 어릴 적부터 쫒던 무지개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딴 데 정신을 빼앗겼을 때도 잠깐씩 나를 바로 세우고 노라는 어디 있을까 궁금했다. ‘노라의 모습이 희미해 질 때에 나는 노라를 찾기 위해 더 크게 소리쳤고 더 높이 보려고 아등바등 기를 썼나 보다. 그 덕분에 나는 나를 돌아보고 보듬으며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닦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성은 사회가 요구하는 희생적인 삶을 살기보다는 자신에 대해 충실할 의무를 지닌 인격체 다.”라는 책 표지에 적힌 한 줄이 오늘 더욱 크게 보인다. 나는 오늘도 노라를 찾고 있다.

누가 노라를 아시나요?”

 

 

 

                                                                                                                            - 20171-

 


한종인   17-03-26 08:23
    
다락 속에 숨어있던 추억들이 되살아 나게 합니다.
그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소중한 기억들이
큰 딸에 의해 하나 하나 바깥에 드러나리라 봅니다.
민샘의 글에서 만난 '노라', 저도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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