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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잎에 입 맞추며    
글쓴이 : 민인순    17-04-24 09:21    조회 : 6,616
   꽃잎에 입 맞추며.hwp (17.5K) [2] DATE : 2017-04-24 09:21:56

꽃잎에 입 맞추며

민 인 순

 

 

따뜻한 봄 햇살이 눈꺼풀을 내리쓸었다. 그 봄볕은 섬유 조직 사이로 스며들면서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깜박 졸게 될 그 때, 봄날의 나른함을 순식간에 거두는 소리였다.

진달래 피고 새가 울며는 / 두고두고 그리운 사람~~~~~”

신호 대기 중인 버스 옆에 승용차 한 대가 멈췄다. 차 유리문을 반 쯤 열고 한 남자가 노래를 불러 제꼈다. 차가 들썩일 정도로 엉덩이를 씰룩이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훈희의 '꽃길을 따라 불렀다. 마침 교통 신호가 바뀐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마터면 나도 따라서 노래 부를 뻔했다. 그 남자는 내가 탄 버스를 앞질러 출발했다.

꽃잎에 입 맞추며 사랑을 주고받았지~~~”

하고 노래 소리만 남기고 그 남자는 가버렸다. 나는 꽃구경이 하고 싶었다. 낯선 그 남자의 노래는 마법이 되어 나를 진달래 피고 새가 울던 그곳으로 보내주었다.

어린 시절 나는 길에서 자랐다. 길은 놀이터였고 학교였다. 걸으면서 다리통이 굵어졌고 키가 자랐다. 걸을 때마다 생각도 많아졌다. 초등학교 6, 중학교 3, 고등학교 3년을 합해서 12년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2킬로미터 쯤 되는 거리였다. 빨리 걸으면 20, 천천히 걸어도 30분 정도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비가 오고 바람 불고 눈이 날리는 날도 있었다. 그날그날 날씨에 따라 걷기가 힘들기도 했지만 착실하게 걸어서 다녔다. 산모퉁이를 돌고 또 산모퉁이를 돌아서 말 무덤 고개를 넘으면 큰길이 나왔다. 큰길에 이르면 옆 동네에서 오는 친구들과 만나게 되고 그렇게 조금 더 넓은 길로 들어서면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사는 우리 반 아이들과도 합친다. 어떤 시인은 마을은 포도송이처럼 이어져 있고 집은 포도알처럼 달려있다고 했다. 나는 시를 읽으면서 그 시인이 우리 동네에 왔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포도알 같은 집 한 채에 내가 살고 또 다른 한 채에는 사내아이 친구가 살았다. 친구네 뒤란에는 하얀 조팝꽃이 많이 피었다. 장독을 품고 있는 하얀 꽃이 우리 집에 많았던 아기씨꽃의 빨간 색과 잘 어울렸다. 나는 그의 집 하얀 조팝꽃이 그냥 좋았고 그는 우리 집 아기씨꽃이 예쁘다고 했다. 꽃을 보고 싶었을까. 학교 가고 오는 길에 서로 서로 그 집 앞을 기웃거렸다. 훗날 조팝꽃과 아기씨꽃이 한 집에서 피게 될 줄은 그땐 미처 몰랐다.

내 어머니가 아침밥을 짓는 시간이 그 친구의 어머니가 아침밥 짓는 시간과 매양 같았는지 우리는 학교 가는 길에 꼭 만났다. 어쩌다 가끔 시간이 어긋날 때도 있긴 했다. 그럴 때는 내가 빨리 걷고 친구가 느리게 걸었나 보다. 어디쯤에서는 꼭 만났었으니까. 우리는 아무렇게나 핀 것 같지만 완벽하게 질서를 지켜 피고 있는 들꽃을 보며 깔깔거렸다. 사람이 배고플 때 꼬르륵하는 배꼽시계같은 것이 꽃들에게도 있어서 봄에 피는 꽃은 봄에만 핀다고 아는 척도 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해마다 피는 꽃을 보면서 어른이 되었다. 산다는 것은 과거를 뿌리로 하고 그 뿌리가 올린 에너지로 현재의 꽃을 피우고 미래의 열매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길 위에 새긴 발자국 수만큼 이야기를 간직하고 그 이야기를 되새김질 하면서 오늘을 사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봄날이었다. 우리는 학교 수업을 끝내고 큰 길에서 조금 좁은 길로 들어서고 더 좁은 길을 걸어 산모퉁이를 돌아섰다. 그 애와는 오랜 날을 함께 걸은 습성으로 말이 없어도 통했다. 눈길이 가는 곳이 가고 싶은 곳이었다. 또 같이 가보겠냐는 물음이 되었다. 나와 그 애는 진달래에 반해서 산등성이로 발길을 돌렸다. 분홍색 길을 따라 걸었다. 봄날 오후 햇살이 따뜻하게 등을 밀어주었다.

나는 새침하게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흥얼거렸고 그런 시를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가 크면 영변에 있다는 산, 진달래가 많아서 유명하다는 약산에 가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얘기했었다. 통일이 되어 그곳에 가면 우리 동네에 피는 진달래꽃보다 얼마나 더 예쁜지 비교해 보자는 희망도 있었다. 조금 앞서가던 그 애가 말했다.

도마뱀 꼬리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행운이 따라다닌다더라.”

도마뱀 꼬리를 구하면 시험도 잘 보게 되고 영변의 약산 진달래도 보게 될 것 같았다. 우리는 도마뱀을 만나서 꼬리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조잘대며 산마루에 올라갔다. 도마뱀 꼬리를 하나는 말고 꼭 두 개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마뱀은 일생에 한 번 꼬리를 자른다면서 그 소중한 순간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바랐다.

산등성이에는 봄 나무들이 뾰족한 새순을 달고 있었다. 드문드문 널려있는 넓둥그런 바위는 하루 종일 햇볕을 받아 따뜻했다. 우리는 바위에 앉았다 엎드렸다 하면서 도마뱀을 기다렸다. 웃고 떠들면 도마뱀이 나타나지 않을까 봐서 슬쩍슬쩍 하늘만 보았다.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날아다니며 장난을 치는 새소리도 들었다. 무지개 빛깔 색지를 묶어서 시집이라고 쓰고 시집~ 시집~’하면서 입을 막고 웃기도 했다. ‘산유화같은 시들을 옮겨 적어보고 흉내 내어 시를 지어도 보면서 놀았다.

그러는 사이 아주 잠깐이었던 것 같은데 해는 노을이 되어 사라지고 색색의 꽃과 나무들이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에서 이슬 맞고 내려오는 사람은 간첩이다. 신발에 흙이 덕지덕지 묻었거나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진 옷을 입었다면 신고 대상이다. 학교나 113으로 신고해라.”

선생님이 종례 시간에 하시던 말씀이 떠올라서 무척 무서웠다. 군인들이 우리를 간첩이라고 생각하고 총을 쏠까봐 무서웠고 산에 살고 있다는 간첩을 만날까봐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허겁지겁 산을 내려오다가 진달래 꽃가지에 걸려 넘어지길 여러 번이었다. 그 때 그 애가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진달래 피고 새가 울며는 / 두고두고 그리운 사람 / 잊지 못해서 찾아오는 길 / 그리워서 찾아오는 길 / 꽃잎에 입 맞추며~~~ ”

꽃잎에 입 맞추며를 부를 때는 콕 찍어 누르며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불렀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손을 꼭 잡고서. ‘꽃잎에 입 맞추며대목이 오래오래 남았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두고두고 그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결혼해서 한 집에 산 것을 보면!

다음날 종례 시간이었다. 담임선생님은 학교 공부가 끝났으니 바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다른 날과 다르게 싱글싱글 웃으며 말씀하셨다. 유별나게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진달래꽃은 산꼭대기에 있다고 더 예쁜 것이 아니다. 오면가면 봐라. , 도마뱀한테 물리면 죽는다.”

 

 

20174


음영숙   17-04-30 22:10
    
한장의 수체화를 보는 것 같군요.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 올 것 같은 아름다운 글이네요.
선생님 글 읽다가 나도 어릴쩍에 살던 곳에 다녀왔어요.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민인순   17-05-17 11:58
    
음영숙 선생님~~^^
제 글을 읽어 주시고 댓글을 남겨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한종인   17-06-02 22:55
    
등단작이 된 '꽃잎에 입 맞추며'
하나가 인연, 사랑에 더해 꽃다발을 안게 되었네요.
볏단 쌓듯 좋은 글 소복하게 쌓으실 줄 믿습니다.
쌀포대처럼 민샘의 책이 나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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