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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름의 보랏빛    
글쓴이 : 신은영    26-07-05 10:20    조회 : 19

그 여름의 보랏빛

신은영

 

좋아하는 걸 골라봐, 뭐든.”

교회의 고등부 담당 선생님이 졸업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선물 가게에 갔다. 자그마한 가게는 앙증맞고 귀여운 소품으로 가득했다. 한 바퀴 둘러보던 내 눈은 진열장 안의 보라색 꽃핀에 멎었다. 진보라색 꽃이 달린 핀 두 개였다. 어른이 되는 문턱에서, 머리에 꽂기에는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 보라 꽃핀을 보자 가슴 한편이 저릿해졌다. 서랍 속에 고이 모셔놓고 가끔 들여다보며 아련히 가슴이 저며오는 저릿함을 느끼곤 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건 모전여전이다. 생전의 엄마는 보라색을 유난히 좋아했다. 남보라, 연보라, 자주색 옷을 가리지 않고 즐겨 입으셨다. 나는 특히 짙은 보라색을 좋아한다. 그 빛에는 알 수 없는 우수가 깃들어 있어, 오래 바라보다 보면 문득 울컥하는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보라색을 좋아하니 자연스레 보라색 꽃에도 마음이 끌린다. 연보라, 진보라, 청보라 모두 예쁘지만, 그중에서도 도라지꽃을 가장 좋아한다. 앙다물고 있던 꽃봉오리가 별 모양으로 터질 때면, 길가에 다소곳이 피어있는 도라지꽃 앞에서 몸을 낮추고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도라지꽃이 큰 위로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했는데, 결혼한 해 IMF 외환위기로 남편이 운영하던 무역회사가 도산했다. 우여곡절 끝에 평택의 시댁으로 합가했다. 교육기관을 차려 새출발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평택 시내보다 대우가 좋은 면 단위의 교육기관에 취직했다. 고덕면으로 들어가는 버스는 30분마다 한 대씩 드물게 다녔다.

새벽부터 일어나 가족들을 위한 식탁을 차렸다. 시어머니와 함께 준비했지만, 버스 시간에 맞춰 나가느라 늘 빈속으로 다녔다. 문밖으로 나서는 나의 뒤엔 시부모님과 남편, 시누이가 두리반에 둘러앉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했다. 출근하면 셔틀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교사들이 돌아가며 한 구간씩 통학 지도를 맡아야 했기에 출근길이 여의치 않아도 피할 수 없었다. 내가 맡은 구간은 저수지를 돌아 시골길을 굽이굽이 지나며 아이들을 데려오는 코스였다. 수업 시작 전에 차에 오르면 지치고 피곤했지만, 저수지와 야트막한 동산이나 밭을 볼 수 있어 이 시간을 점차 좋아하게 됐다.

3월에서 6월까지는 저수지에 일렁이는 물결과 연녹색으로 변해가는 동산을 무심히 감상하거나, 밭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지나다녔다. 7월로 접어들며 어느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멀리 보라색 물결이 어른거렸다. 몽우리가 맺히기 시작한 도라지밭이었다. 차가 가까워질수록 흰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진 풍경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원장님, 잠깐 멈춰서 도라지꽃을 보고 가면 안 될까요?”

운전석에 앉은 그의 뒤통수에 황당함이 스쳤다.

여기서 1분이라도 지체하면, 아이들 차 타는 순서가 다 늦어져서.”

나는 연인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는 애틋한 마음으로 고개를 빼고 도라지밭을 바라보며 지나갔다. 그 후로 모퉁이를 돌 때마다 도라지꽃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아질 거야, 조금만 더 견디렴. 좋은 날이 올 거야.’ 그렇게 말을 건네는 듯한 도라지꽃을 보며 그 여름을 버텼다.

큰 새언니의 안부 전화에 요즘 도라지꽃 덕분에 통학 지도가 즐거워요. 저수지의 반짝이는 윤슬과 도라지꽃이 있어 하루를 행복하게 시작해요라고 말했다. 나중에 들은 새언니의 말로는 그 시간이 되면, ‘지금쯤 저수지를 돌고 도라지꽃을 보며 지나가고 있겠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떠올려지는 내 모습이 그리도 안쓰럽게 느껴졌다고 했다. 시어머니와 예기치 못한 불화로 불편한 가을을 보낸 뒤, 남편이 안양의 한 회사에 괜찮은 조건으로 취직했다. 큰 새언니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평택을 떠날 수 있었다. 그 후로 저수지의 물결과 멀리서부터 환하게 날 반기던 도라지꽃의 보랏빛은 아련한 잔상으로 남았다.

 

모든 감각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겠지만, 내 경우엔 시각적 자극이 주는 영향이 가장 크다. 그래서인지 바라보는 많은 것에서 치유를 받는다. 틈나는 대로 여행을 다니며 바다를 보고, 베란다 정원에 욕심껏 꽃들을 들여놓고, 길가에 핀 자그마한 꽃에도 종종 시선을 빼앗긴다. 유채꽃이 가득한 곳보다 수레국화가 핀 들판에서 마음이 정화되고, 우연히 도라지꽃을 만나면 내 영혼은 사로잡히고 만다. 진보라색을 좋아하는 나의 마음에 이유를 댈 수는 없다. 가슴 한편이 아련해지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그냥 좋다. 보랏빛을 좋아하다 보니 때로는 외롭고 쓸쓸한 기분과 연결 지어, 의도대로 살아지지 않는 세상에 번번이 지는 듯한 기분을 탓하기도 한다. 보라색의 신비로운 이미지와 삶의 고난을 연결 지으려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곧 그것이 성급한 해석임을 깨닫는다. 예전의 구차한 기억이 가시지 않는다고 보랏빛이 불러일으키는 감성에 현실의 무게를 걸어 놓는 건 온당하지 않다. 보라색의 이미지가 생각이 깊어지고 감정의 층위가 더 드러나게 하는 듯도 하니.

앞으로도 나는 그 여름에 느꼈던 슬픔까지는 아녀도, 삶의 모퉁이에서 예기치 않은 상처를 받을지 모른다. 하지만 길가에서 만나지는 수레국화, 무꽃, 현호색, 도라지꽃들에 위로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낼 힘을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보랏빛은 내 시선을 내면으로 이끌고, 감정의 깊이와 여운을 음미하게 하는 든든한 정서적 안전장치가 되어준다. 베란다 정원에 피어 봄의 정취를 즐겼던 나비 수국, 삭소롬, 로벨리아보라색을 띤 작은 꽃들이 지고 있다. 뜨거운 여름볕을 견뎌낼 보라색 꽃이 있으려나. 부지런히 찾아내어 곁으로 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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