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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텀블러 닦았는데 아무도 안 알아주네    
글쓴이 : 박나영    26-10-05 09:14    조회 : 80
누구나 잘하는 일이 있고, 서투른 일이 있다. 그런데 집안일에는 그게 허락되지 않는다.
모든 주부가 집안일을 잘할 수는 없는 건데, 세상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모범생만 인정하는 비정한 세상.
언젠가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결혼 전에 자기 책상 위에 허물 벗듯 쌓여 있던 옷들을 보고 알아봤어야 했는데.”
후회해도 늦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예쁜 건 좋아하는데, 깔끔하게 사는 건 너무 어렵다.
집에는 해야 할 청소가 왜 이렇게 많은지.
그리고 더 돌겠는 건 치우는 속도보다 더 빨리 어질러진다는 거다. 안 하면 티 나고, 해도 티 안 나는 일. 집안일은 억울한 일투성이다.
설거지를 끝내면 누가 마신 컵 하나가 추가되고, 빨래를 개면 딸이 씻고 나와 수건을 쌓아놓고, 바닥을 닦으면 어느샌가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다.
그래서 싫은 거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거냐고!

요즘 주부들, 다 바쁘다.
일하고, 아이 보고, 집안일까지. 남편의 가사 분담이 늘었다지만, 그 ‘부담’은 여전히 여성 몫. 뉴스에서 봤다. 한국 여성들 하루 평균 집안일, 2시간 30분, 남성은 20분.
그나마 그 20분은 꼭 여성이 같이 있을 때다.
‘도와주는 것’과 ‘책임지는 것’은 분명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노동까지 합치면, 집안일은 단순한 노동 그 이상이다.

내가 집안일에 서툰 이유는 또 있다.
‘보상’이 없기 때문이다.
ADHD는 즉각적인 보상에 민감하다고 한다.
“이거 하면 초콜릿 줄게” 같은 달콤한 뭐라도 있어야 동기 부여가 된다.
가끔은 이런 말이 간절하다.
“우와, 텀블러를 닦으셨군요!”
그 한마디면 기운이 날 것도 같다. 그런데…. 그런 말은 아무도 안 해준다.
사람마다 ‘해야지’와 ‘하기 싫어’를 연결하는 회로가 다른데 이 회로가 느리면, 머리는 알고 있어도 몸이 안 움직인다고 한다. 나는 그게 아주 느린 쪽. “해야지” 하면서도 손이 안 가는 건,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라. 전기 신호 같은 게 약하다는 거다.

세상 자상하고 이해심 많은 우리 남편도 가끔은 지친다.
“여보, 새 수건 없어?”
하며 빨래 바구니 속 젖은 수건을 집어 들때나,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 냉장고 열자마자 썩은 냄새가 나니까... 나도 좀 힘들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남편이 진심을 툭 던질 때면, 나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된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남편이 ‘땡’을 해줄 때까지 숨죽여 기다린다
전기 신호가 느려서 그랬든 어쨌든, 대부분의 가사를 책임지고 있는 건 나다. 신호가 약하다고 핑계만 대고 있을 수는 없다. 자책할 시간에 고장 난 신호를 끊어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를 스스로 토닥여서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음식물쓰레기 처리는 나에게 미루고 싶은 기말고사다. ‘나중에 나중에’ 하는 사이 배수구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만취한 아저씨처럼 개수대에 벌건 토사물을 게워 낸다.
“으으으으윽!”
예고된 사고에 나는 또 인상을 찌푸리며 배수구를 헤집는다.
“싫어. 진짜 싫어.”
그래도 해야지. 해야 하니까.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못 하겠지만, 내가 아니면 안 되니까. 좋아하는 일만 할 순 없으니까.
감당 못 할 일을 망쳐놓고 도망치면 그만이었던 '혼자'가 아니니까.
눈을 꼭 감고 배수구를 뚫고 넘친 음식물을 쓸어 담는다. 여느 주부들에겐 별일 아닌 일상이 나에겐 목숨 걸고 완수해야 할 ‘미션 임파서블’이다. 세상은 나에게 아슬아슬한 액션 영화. 약으로 에너지를 보충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이토록 위태롭다.

“선생님, 요즘은 우울하진 않아요. 그런데 여전히 집안일은 싫고, 정신을 놓고 살아요.”
“그럼, ADHD 약을 추가해 보는 건 어떨까요?”
나는 수년째 조울증 약인 아빌리파이, 라모스탈과 함께 아토목신을 복용하고 있다. 이 중 아토목신이 ADHD에 작용하는 약이다. 그동안 40mg을 꾸준히 먹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그걸 60mg으로 증량해 보자고 했다.

우리 딸은 올해로 3학년이 된다.
하지만 아이 방엔 여전히 100만원 어치는 족히 될만한 티니핑(파산핑이라 불렸던)과 각종 블록, 인형, 숫자놀이 등 나이에 맞지 않는 장난감들이 커버린 주인을 야속해 하며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이참에 다 갖다 버려야겠어!”
몇 년을 미뤄온 일을 할 기운이 어디서 생겨난 걸까! 아토목신은 내게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콘푸로스트였다.
장난감 상자를 쏟아부어 종류별로 분류하고, 사진을 찍었다. 물론 ‘캐롯마켓’에 팔기 위해서다. 이걸 다 팔면 돈 십만 원 나오겠는데? 주머니가 두둑해 질 생각에 손길이 더 바빠진다. ‘더 팔 건 없나?’ 이것도, 저것도 다 팔아버려!
종일 아이 방에서 물품을 정리하느라 하루가 다 갔다. 밥은 당연히 배달이다.
“엄마, 이건 버리지 말자. 응?”
“아냐, 이걸 다 어떻게 가지고 있어? 다 치울 거야.”
“으아아아앙!”
나이만 먹었지 마음은 여전히 5살인 우리 딸이 운다.
기운 난 호랑이가 된 엄마는 아이 울음 따윈 노관심. 다 버려. 다 팔아 버려. 다 해치워버릴거야. 어흥!
도파민이 쭉쭉. 기운이 뻗어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일주일 만에 장난감 방은 자취를 감췄다. 수납장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가구와 텔레비전, 소파가 들어와 작은 가족룸이 되었다. 그리고 내 통장엔 20만 원이라는 거금이 생겼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라이코스~!
“거봐, 나는 게으른 게 아니었잖아?
약빨을 제대로 받은 나는 이번엔 주방 곳곳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배달시켜먹은 봉투가 뭉게구름 처럼 가득 차 속을 알 수 없던 개수대 하부 장, 그릇들이 좁아터지게 밀치고 있던 상부 장까지 닥치는 대로 털어냈다. 버리고, 또 버렸다.
“엄마가 버리기 대마왕이 됐어.”
“다 쌓아 놓고 사는 거보다는 좋잖아. 이 물건들이 우리 집을 장악하고 있었어. 이걸 버리는 거 만큼 우리 집이 넓어지는 거야. 좋지?”
“엄마가 T가 됐어! F엄마로 돌아 와줘!!!”
나는 ENFP. 대책 없고 무계획적이고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던 내가 착착 정리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니 딸아이가 놀라 정색한다. 하지만 미안, 엄마는 지금 멈출 수가 없어!!!
그렇게 따라와 봐 라이코스를 외치며 광속으로 달리던 내가 어느 날 아침, 몸이 일으켜 지지 않았다.
“어흐으으으…. 좀만 더 누워있자.”
하루종일 그 말만 반복하는 동안 밤이 되고, 다시 아침이 되고, 며칠이 지났다.
아토목신이 준 호랑이 기운은 무한 동력이 아니었다. 그건 내일 모레 쓸 에너지까지 영혼에서 미리 끌어다 쓰는 '에너지 대출'였던 거다. 일주일 동안 집안의 유물들을 유배 보내며 라이코스처럼 질주한 대가는 처참했다. 사채 이자가 붙듯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병원에 가야겠어.”

“과 행동이 나타나신 것 같군요. 조절이 힘드신 거 같으니 약을 조금 줄여야겠습니다.”
하아…. 분명 좋았는데, 내 체력이 약빨을 못 받쳐준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이 어깨를 다독였다.
“여보, 무리하는 거 같더라. 괜찮으니까 쉬엄쉬엄 천천히 하자. 우리 집 지금도 예뻐. 괜찮아.”
“그래도….”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그냥 잘 해내고 싶었다. 집을 싹 바꾸고 나면, 아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더 멋진 내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이제 괜찮다고, 정말 잘 살고 있다고.
“나 정말 잘하고 싶었단 말이야.”
“잘하고 있어. 괜찮아.”
남편 품에 안겨 서러워 울면서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 걸까. 약기운을 빌려서라도 잡고 싶었던 '정상적인 삶'이 다시 멀어져서일까, 아니면 다시 못난 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워서일까.

“왜 그렇게 스스로를 미워하세요?”
상담실에서의 질문이 떠올랐다.
집안이 엉망이고 아무도 나를 칭찬해 주지 않으면, 다 내가 못나서 그런 것 같았다. 늘 엉망인, 언제나 뒤죽박죽인 나를 보며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남들만큼’은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남들만큼’이라는 기준은 대체 누가 만든 걸까. 나는 어쩌면 도저히 올라가지 못할 높은 사다리를 세워놓고, 못 올라가는 나를 매일 채찍질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증명하고 싶어서 혼자 아등바등했던 거다.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 집안일은 ‘나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다. 집 상태가 내 인생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 수준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 제각각이니까. 남보다 좀 못하면 어떤가. 어쩌면 누군가는 나를 보며 ‘저 정도만 하고 살아도 좋겠다’며 부러워할지도 모를 일인데.
“이만큼 하고 사는게 어디야?”
뻔뻔해지자. 두 팔을 벌리고 엑스자로 내 어깨를 감싸 본다.
“괜찮아. 괜찮아. 잘하고 있어. 좀 부족해도 다 괜찮아.”
내 손이 내 어깨를 토닥이는 순간,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돈다. 다시 텀블러를 닦을 기운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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