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 전에
김양아
해마다 새해가 되면 새 다이어리를 준비하고 새 결심이라는 걸 하게 된다. 한 달에 두 권 책 읽기, 가까운 둘레길 걷기... 무리없이 지킬 수 있을 만큼 정해서 그해를 마무리하며 돌아볼 때 후회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아니 솔직히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날그날 잘 살아내자는 하루살이 인생관으로 바뀐 것이다. 대신 한 가지는 지켜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것이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동안 소홀했던 정해진 약속 지키기, 사실 난 게으른 성향에다 또 체력도 모자라 툭하면 아파서 드러눕는 편이다. 그리고 여럿이 어울리는 것 보다는 마음 맞는 사람과 단촐하게 만나는 게 더 편했다. 그래서 모임 같은 것에 별로 충실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지금까지 이어온 인연을 잘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에 한 번 하는 모임이 있다.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이끌려 들어가게 된 대학 써클이다. 1,2학년 때 열심히 활동하다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여러가지로 분주해져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함께 어울려 다녔던 선후배 몇 명은 연락이 끊기지 않고 꾸준히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거의 교직생활을 하고 있어서 겨울방학이 있는 1월에 만남을 가져왔다. 제작년엔 평일에 일하느라고, 작년엔 신혼여행 다녀온 딸네 맞이할 준비 때문에 녹초가 되어서 못 나갔다. 올해도 연달아 나갈 일로 지친데다 몸살기까지 겹쳐 쉬고 싶었지만 쌍화탕을 챙겨 먹고 집을 나섰다.
희끗해진 머리와 웃으면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얼굴들이지만 풋풋했던 예전의 느낌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바로 며칠 전에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속내를 털어놓으며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몇 년 째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자녀들과 치매와 병환으로 요양원에 모시게 된 연로하신 부모님, 거기에다 새로운 취미에 도전해보며 배우는 즐거움과 나이 들어갈수록 어디든 끼어들기도 쉽지않다는 이야기 등 저녁까지 이어진 수다는 그칠 줄을 몰랐다. 예전 같으면 잡다한 이야기 중간쯤 빠져 나왔겠지만 모처럼 귀 기울이며 마음을 열고 동참했다. 오랜 시간 더불어 늙어가는 벗이 있음은 고마운 일이다. 그나마 서로 기억해주는 이들이 곁에 있을 때 시간도 마음도 넉넉하게 나누어야 할 것 같다.
돌아보면 허튼 약속도 많이 하면서 지냈다. 친구 딸 결혼식장에서 오랫동안 못 만났던 동창을 만났을 때 " 반갑다. 잘 지냈어? 언제 밥 한 번 먹자 " 하고 헤어진 뒤 흐지부지된 경우도 더러 있었다. 때가 되면 가끔씩 카톡으로 안부 물어오는 친구와 몇 년째 글 인사만 나누고 있다. 올해는 꼭 한 번 보자고 먼저 청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도 절실했다.
"무기력증이야." 라고 나를 계속 지켜봐온 친구가 얼마 전에 조심스레 짚어주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하고 싶은 일도 사라졌고 의욕적으로 매달리는 일도 없어졌다. 유난히 빈자리가 커다랗게 생겼던 지난 해, 큰 딸이 결혼을 하면서 제 방을 비우더니 친구처럼 자주 붙어 다니던 작은 딸마저 교환학생으로 훌쩍 날아가 버렸다. 결정적인 것은 근처에서 쭉 사셨던 엄마가 예고도 없이 하늘나라로 이사를 가버린 것이다. 엄마와 나와 딸, 삼대가 서로 마주 보며 지냈는데 이젠 꼭지점 하나가 별이 되어 멀어진 이등변 삼각형이 되었다. 방심했던 삶 속으로 예고 없이 끼어들어 한순간에 일상을 무너뜨린 피할 수 없는 힘 갑자기 툭 끊어진 길 앞에서 아득할 뿐이었다. 연달아 떼어내는 상실감으로 덧칠했던 무채색의 날들, 그 습기찬 무거움을 내려놓는 지점을 찾고 있었다.
C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기까지 꽤 망설였다. 색색의 털실로 짜여진 수필이라는 뜨게질을 저만치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왠지 그 실끝을 잡고 풀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단단해진 실뭉치가 얽혀 풀리지 않을 것 같았고 이런저런 변명들이 발목을 감았다. 하지만 내 안에서 오래 달그락거리던 무언가 자꾸 등을 떠밀었다. 숭숭 구멍이 뚫리고 비어있을 때 오히려 무한대로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계 바깥에서 늘 서성이기만 했던 문학, 더 늦기 전에 그 길이 열어 보이는 미지의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싶다.
아무도 국화를 보고 늦깍이 꽃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의 속도와 시간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고 내공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직 우리 차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철에 피는 꽃을 보라. 개나리는 봄에 피고 국화는 가을에 피지 않는가? 어디선가 마?주쳤던 글 한 조각 마음 귀퉁이에 걸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