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문 수
친구 J가 운명했다.
‘대문 밖이 저승’이라지만 엊그제 전화 통화를 하고 온천엘 가자했는데, 이제 달려가 주검을 봐야하니. 어제 저녁 잘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는데 오늘 새벽 ‘단 불에 나비 죽듯’ 저승사람이 되고 말았다고... 죽는 일이 이리도 쉬운 일이었나? 그토록 자기 건강을 위해 노력해왔는데 새벽 어둠도 뚫지 못하고 삶을 놓아버렸구나.
50년 지기도 아랑곳없이 떨쳐 버린 매정한 사람, 무례 고약한 사람! 말 한마디도 없이 떠나가다니...
몇 달 전에 친구 T도 역시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다. 해외여행을 떠나다가 빙판길 위에서 뒤로 넘어져 입원 후 이틀 만에 죽어 가족과 친지들을 참담하게 했다. 아픈 가슴 아직 식지 않았는데 또 친구를 잃었다.
엊그제 송년모임에 나가보니 세상을 뒤로한 동창들이 몇 명 더 있었다. 아마 죽음이 친구들 주변에서 광란의 축제를 여는가 보다.
죽음!
생의 마감! 깜짝 놀라 돌아본다.
내게도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을까? 언젠가 죽기야 하겠지만 이제까지 남의 집 슬픈 행사로만 여겨왔는데, 아직 멀고 먼 저 달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해 왔는데...
악몽 속에서 그림자 밟듯 흐릿하게 마음 한구석에 새겨져왔던 죽음.
이젠 아주 가까이 도사리고 있음이 친구들의 죽음을 통해 직감하게 된다. 저 멀리 미지의 시베리아 북극성 밑에서 얌전하게 졸고 있는 죽음이 지금도 기척 없이 졸고만 있는지, 아니면 험상궂은 얼굴로 달려오고 있는지, 달려와 창문 너머로 노려보고 있지는 않은지? 홀연히 아무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이기에 어둠 속에서 미친 듯이 춤추며 날아드는 갖가지 상념들이 제멋대로다. 새벽녘 아름다운 여명이 스산한 기운으로 편치 않다.
생자필멸!
사람은 태어나자 죽음이 시작되는 이치이지만, 살아있는 한 보람된 일을 향해 희망차게 사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이 아니었던가. 이제 밑바닥이 보이는 찌꺼기만 가지고 여생을 구가(謳歌) 해야 하니... 황혼에 먹구름 드리우는지 모르고 나이 70을 넘기고도 죽음을 멀리 바라만 보고 묵상(?想)없이 살아왔으니 분명 무디고 안일한 삶이었다.
위령성월(慰靈聖月)을 맞아 부모님 산소에 다녀왔다. 인사를 드리면서 부모님 뵐 날이 머지않았음을 말씀드렸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기뻐하시지 않는 듯 멀리서 큰 손사래로 답하셨다. 내 가슴 속에 살아 계셔서 항상 나를 지켜 주시는 두 분이 오라고 할 때 기꺼이 가고자 한다.
죽음을 생각하니 아내와 아이들이 먼저 떠오른다.
가족들과의 영원한 이별!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까. 죽음 그 자체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하는 고통이 더욱 두렵다. 다시는 볼 수 없는, 한없는 그리움만으로 남아야하는 혼자만의 저승이 바로 죽음이어야 한다니...
죽음은 단절이다. 망각의 늪으로 꺼져 모든 연(緣)을 지우는 것이 아닌가.
죽음은 절망이다. 모든 희망을 접고 허망을 끝없이 바라보는 것이리라.
죽음은 또한 비움이다. 있음의 관계를 모두 끊고 무아(無我)로 돌아가는 것이 세속인의 죽음이다. 자신의 실명 앞에 세상의 모든 인연들이 흔적 없이 심연 속으로 사라져 물거품이 된다. 그러므로 어떤 인연으로 함께했던지 죽음 앞엔 모두가 숙연하게 명복을 빌기 마련이다.
어쨌든 유한한 인생. 죽음이 인생 필연의 예고된 운명인 이상, 주체적 삶을 이끌어 온 사람의 마지막 숙명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그가 살아온 인생 역정의 모습을 엿볼 수도 있다.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 속에서 참는 것이 더 고상한가?
아니면 고난의 바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어 반대함으로써 이를 근절 시 키는 것이? 죽는 것은, 잠자는 것 그뿐이다...”
이 같이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의로운 죽음에 고민하는 모습을 그렸다. 한편, 천상병 시인은 세상에서 즐겁게 소풍하다가 귀천하는 담대(膽大)한 죽음도 있다. 이렇듯 나약한 인간이기에 마음의 갈등이 죽음의 두려움 앞에 여러 모습으로 엇갈리게 된다.
삶에 만약 죽음이 없다면 그 의미를 잃고 무력하게 펼쳐질 것이다. 죽음이 삶을 보듬어 주기 때문에 그 삶은 보람으로 채울 수 있고 그 진가도 높아만 가고 아름다움을 지니리라.
죽음학자인 퀴불러 러스는 보통사람이 죽음을 앞에 두고 5단계로 반응한다는 임상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첫 번째 반응은 죽음을 부정하는 거부의 단계로 시작하여 죽음에 분노하는 단계, 죽음에 타협하는 단계, 죽음을 바라보는 우울의 단계를 거쳐 비로소 어찌할 수 없이 마지막으로 수용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처절한 마음의 움직임이다. 오욕칠정을 포기하는 죽음이 누구나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같아서는 때가 되면 모든 아쉬움과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유유낙낙(唯唯諾諾)하게 죽음을 맞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범부가 그리 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성숙한 품위 있는 죽음, 아름다운 이별은 어떻게 맞을 수 있을까?
어떤 생의 마감이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추한 죽음이 아니라 이에 당당하게 호응하는 죽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이 의도된 시작이 아니 듯 죽음도 때가 오면 담담하게 맞이하는 것이 바른 이치라 생각된다. 빈손으로 왔으니 미련을 버리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삶을 허락한 절대자(神)에 대한 바른 자세이기도 하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 갈 것을 생각하여라.”(창세기3,19)라는 성경 말씀대로 인간의 본향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이리니.
그러나 죽음을 자각하면 할수록 삶이 더욱 소중하여지니 이 아름다운 삶을 어떻게 놓을까. 이 행복의 여로(旅路)를 어찌 마감한단 말이요.
우선 죽는 날까지 인간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도리를 지켜나가고자 한다. 죽음은 삶의 포기가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믿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나의 삶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더욱 절절하게 갖게 될 것이다. 나의 삶을 키워 오늘의 성장을 있게 한 모든 것에 대한 이해와 고마운 정황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있었던 오해를 풀고 용서를 청하며 나도 용서할 것이다. 절대자 하느님은 인간이 죄를 뉘우치면 어떤 죄과도 용서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승에서의 죽을 준비를 아무리 잘 하더라도 편안한 마지막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 이 세상에 태어나서 힘들게 좋은 일 많이 했으니 이젠 저 세상에 가서 편히 좀 쉬자’라고 거리낌 없이 죽음을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죽음을 당당하게 기쁨으로 맞을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닐까. 이는 세상에서 천국을 산 사람이다. 사랑 가득한 천국을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일생을 살면서 맺은 모든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으로 채우는 삶. 사랑을 살리라.
그리하여 평화를 안고 죽으리라.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