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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떡    
글쓴이 : 권순예    26-04-06 21:22    조회 : 29

 

권순예

 

 가을일이 끝나면 초가지붕에 이엉을 엮어 단장하고 장독대 흙담도 고쳐 바르고, 용마루를 곱게 치장했다. 마지막으로 김장을 하면 한 해 농사가 마무리되었다. 엄마는 1 년에 두 번, 가을떡과 대보름 떡을 만드셨다.

 엄마는 항상 떡을 만들기 전에 두부를 만들고, 따뜻한 두부를 만든 물에 머리를 감고 정갈한 하얀 광목 치마저고리로 몸단장을 하신 후에야 비로소 시루 앞에 앉으셨다.

 추수가 끝나면 팥시루떡을 만들기 위해 전날 밤부터 쌀을 담갔다. 이른 아침 건져낸 쌀을 온종일 절구질해 가루를 내고, 고운 체에 쳐서 부드러운 떡가루를 만드셨다. 팥을 삶고 검정깨를 볶아 고물을 준비하는 손길에는 정성이 가득했다. 특히 무떡은 멥쌀가루에 무채를 섞어 손으로 일일이 비빈 뒤 다시 체에 쳐야 했기에, 어머니의 수고가 한 번 더 들어가는 귀한 떡이었다.

 시루 바닥에 통팥을 깔고 찹쌀가루와 팥고물, 다시 깨고물을 차례로 올린다. 그 맨 위층에 무채 섞은 가루를 얹어 쪄내면, 시루 하나에서 세 가지 맛의 떡이 요술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는 팥떡을 좋아하지만,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고소한 검정깨떡도 좋아했다.

 정월 대보름이 다가오면 엄마는 3일 전부터 바쁘게 돌아다니셨다. 어느덧 장독대 엎어있던 큰 시루와 작은 시루가 자기 일을 하려는 듯 안방 윗목을 떡하니 자리 차지했다. 큰 시루 옆에는 쌀가루, 팥고물, 깨고물, 무채가 놓여있었다. 작은 시루에는 흰쌀 가루만 쪄서 만드는 백설기 떡으로 신께 바친다.

 떡이 완성되면 바로 먹는 게 아니다. 집 신들에게 먼저 드리고 먹어야 한다는 엄마의 신조로 심부름을 해야 했다. 언니와 나는 엄마가 담아주는 떡 접시를 들고 부엌 부뚜막으로 장독대로 다니며 올려놓고, 외양간, 뒷간은 떡 접시를 들고 그 앞에서 100까지 수를 세던 그 시절, 누가 더 빨리 세나 벌이던 은근한 속도전은 이제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집안 신들에게 대접을 마친 뒤에는 이웃들과 떡을 나누러 다녔다. 빈 접시로 보낸 적 없는 이웃들은 감떡이나 호박떡을 답례로 얹어주었고, 바구니에는 서로의 정이 묵직하게 쌓였다. 어른들이 집을 비운 날이면 친구들과 모여 각자 얻어온 떡으로 '떡 파티'를 열기도 했다. 대보름은 그렇게 찰밥과 나물, 시루떡을 나누며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던 따뜻한 정이 오고 가는 날이었다. 저녁이 되면 엄마는 장독대에 모셔두었던 백설기 시루떡을 앞에 서서 부엉산 위에 뜬 달을 향해 기도하셨다.

 지금도 떡만 보면 엄동설한의 추위 속에서 손에 양말을 끼고 쇠 절구로 떡방아를 찧던 엄마의 모습이 생각난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간편하게 떡을 사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시루 사이로 피어오르던 그 투박하고도 따뜻한 사랑까지 살 수는 없다. 어머니의 떡은 배를 채우는 음식을 넘어, 자식의 앞날을 축복하는 가장 낮은 곳에서의 기도였으며 이웃과 마음의 담장을 허무는 다정한 악수였다.

 요즈음 따라 보슬보슬한 고물 위로 번지던 어머니의 하얀 치맛자락이 그립다. 당신의 거친 손끝에서 태어난 그 투박한 떡 한 조각이, 화려한 음식들로도 채워지지 않는 내 마음의 허기를 오늘 유난히 서럽게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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