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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은 사람들 발뒤끔치에.3    
글쓴이 : 김혜숙    25-11-11 18:29    조회 : 1,378

                              복은 사람들 발뒤꿈치에

 

                                                                                                                   김혜숙(미아반)

 

   청와대를 개방했다. 수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는 뉴스가 별로 와닿지는 않았었다.

다시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6월 말까지 국민 개방을 마치고 대통령 관저로 재정비할 거라고 9시뉴스 앵커가 말한다. 그렇다면 청와대라는 공간은 초대받지 않는 한 가볼 기회가 없는 건가. 부랴부랴 앵커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딸내미를 부추겨 사전 예약을 해두었다.

3주 만에 지인들 서너 명과 예약된 당일 청와대 정문 춘추관 앞에 도착했다. 입장 시간 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줄이 제법 길었다. 길게 늘어선 관람객 표정은 설레어 보이나 저마다의 방식의 스트레칭을 하는 몸짓을 봐서 지루함이 역력하다. 머쓱하기도 하고 줄서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식량 배급을 기다리는 모습이 떠올라 내가 왜 여길 온 거지?” 살짝 후회하고 있는 동안에 9시 정각에 춘추관 정문이 활짝 열렸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두 줄로 나누어 바코드를 찍으며 직원 안내에 따라 입장이 시작되었다.

개방 초기보다는 보안 문제를 중시하여 제한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대통령이 머물렀던 관저를 상상해보니 상당히 단조로웠다. 기대보다 볼거리가 적었다. 먹잘 것 없이 차려진 밥상에 초대받은 듯한, 뭔가 모르게 서운한 느낌이었다. 대통령 직무실은 더군다나 집기들이 빠져서인지 더 휑하게 보였다. 청와대 뜰은 잘 다듬어진 재벌 집 정원 같은 분위기였다. 여전히 인파는 계속 이어서 들어온다. 관저를 관람하기보다는 사방에 북적이며 사진 찍는 사람들 때문에 이리 저리 몸을 피해주는 일이 더 바빴다.

청와대 정원을 둘러보면서 수년전 아버지께서 창경원(지금의 창경궁)에 근무할 때가 떠올랐다.

1970년대 초였다. 아버지께서 문화재관리국(현재 문화재청 인듯)에 근무 할 시절이었다. 직원들끼리 조가 짜여져 1개월씩 돌아가며 네 개의 궁을 관리하였다. 때마침 4월 벚꽃이 필 무렵 창경원에 아버지의 근무 차례가 되었다. 그 당시는 창경원에는 사자, 호랑이, 원숭이 등등 많은 동물들이 있어 주로 낮에 동물원을 관람하고 4월에 벚꽃이 피면서 낮과 밤으로 나뉘어 이때부터 놀이 관람이 시작된다.

요즘에 사람들은 매년 봄이 오면 벚꽃 군락지나 매화꽃을 보기 위해 특정 지역을 찾아 여행 삼아 떠나서 즐기지만 70년대 봄은 오로지 창경원 벗꽂 놀이가 유일하였다.

낮은 물론이거니와 밤 벗꽂 놀이를 보기 위해서 전국에서 밤낮으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시내 중심부까지 발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1960년 후반 70년대 초 우리나라 교육 붐이 일어나면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시골에서 농사짓던 부모는 오로지 배워야 산다는 일념으로 자식에 대한 교육열을 발휘한다. 애지중지 자식처럼 키우던 소를 팔거나 논밭을 팔아 돈을 만들어 도시로 유학 보내서 공부시키고 성공해서 자리 잡은 자식들로서는 적으나마 벚꽃 만발한 이맘때 한 번쯤은 부모에게 효도할 최상의 기회였을 것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벚꽃놀이는 입장권을 끊어야만 입장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장시간 줄을 서도 표를 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단속을 피해 가며 암표 장사가 극성이었다. 기간이 정해져 있는 행사이다 보니 벚꽃이 피어 절정에 이르는 열흘 동안에는 가족 동반 관람객들은 길을 잃고 흩어져 찾아 헤매는 일도 허다했고 어린이 미아 방송은 종일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실향민이라서 일가친척이 없었다. 그래서 번화한 외가에 이모, 외삼촌, 조카까지 늘상 우리 집에 손님 발길이 끊임없이 오가는 것을 좋아하셨다. 농사철이 끝나는 겨울이 오면 외할머니는 당연히 우리집에서 겨우내 자리를 잡고 사셨다. 외가 친척들이 한 팀이 떠나면 다른 친척들이 오고 가는 치다꺼리를 하며 어머니는 한 달에 쌀 한 가마니 양의 밥과 배추 100포기 김장을 겨울 동안 두 번 담그셨다. 김장 김치가 다 떨어지고서야 겨울방학과 농한기도 끝나 손님도 그만 오겠지 싶을 때, 다시 4월 모내기 철이 돌아왔다. 그때가 창경원 벚꽃 놀이와 한창 맞물리는 시기다. 다시 손님 발걸음이 시작된다. 이때는 일가친척 뿐만 아니라 외가의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 왔다. 그들의 손에는 정의 표시인지 잡곡이며 고춧가루 땅콩등 특산물 한 두 줌씩 들고 교대로 온다. 외삼촌은 입장권 구하기도 힘들었지만 창경원 입장도 쉽지 않았다. 때문에 표를 들고서도 장시간 줄을 서야만 들어갈 수 있었던 궁을 처남의 말 한마디에 입장권 살 필요 없이 차례를 기다리는 번거로움도 없이 자유롭게 입장이 가능했으니 주위 사람들(에게 우쓱했다.) 우러러보았다.

일주일 내내 하루에 여섯 일곱 명 이상 저녁에 오는 사람들은 잠을 자고, 오전 벚꽂을 본 다음 떠나고 나면 곧바로 다른 손님이 외삼촌을 따라 도착한다. 이들은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서 밤 벚꽂놀이를 즐기고 새벽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서 터미널로 향했다. 이렇게 창경원 벚꽃 놀이 행사가 끝나야 우리 집에 손님 발길도 끊어졌다. 덕분에 우리 집은 날마다 식당이고 날마다 여관 같았다. 우리는 그날 오는 손님 수에 따라서 잠자리도 없이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끼어서 쪽잠을 잤다. 먹는 일 조차도 그들이 수저를 내려놓고 벚꽃 관광을 나선 후에야 우리의 요기도 끝났다. 나는 일주일 열흘이 한달 이상의 오랜 시간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두 분 부모님 얼굴에는 힘들다거나 불편한 기색은 찾아 볼수 없었다. 불편하기는커녕 해맑은 얼굴로 어머니는 안에서 열심히 먹거리, 잠자리를 챙기면 아버지는 신이 나서 그들을 벚꽃 놀이 행사장으로 안내했다. 오히려 내가 싫은 내색에 불평을 늘어 놓을라치면 어머니 빙그레 웃으시며 한마디 하신다.

이 얼마나 좋으니 능력 없으면 이 짓도 못한단다. 가져도 맘에 없으면 못하고 마음은 있어도 몸이 따라 주지 않으면 못하느니라 세상에는 공짜없다. 사람들 발뒤꿈치에 복을 달고 오는 거야. 다 그들의 복으로 즐기고 가는거지,

어린 시절 내가 불편한 생각만으로 막연하게 벚꽃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어느 순간. 두 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선행을 베푼 것이 아니었기에 존경심, 그리움, 아쉬움 같은 것들이 마음속에 자리한다. 지금은 집안을 상징하는 가문의 꽃 같아서 벚꽃이 피는 봄이 오면 그때를 추억하며 벚꽃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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