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스무 살은
전혜숙
눈부시게 아름답고 찬란할 것만 같은 그때, 나의 날들은 온통 회색이었다.
12년 개근상을 받을 만큼 부지런히 학교에 가던 내가 갑자기 갈 곳이 없어졌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죽은 듯 살다 황망히 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세상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잘만 돌아갔다.
나는 패잔병처럼 청주 공단 어느 곳에 숨어들었다.
첫 출근 날 공단 통근 버스를 기다리다 주위를 둘러보니 노랗게 물든 개나리꽃 천지였다.
눈이 시리도록 샛노란 개나리와 회색 인간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당시 외국계 회사인 AMK의 클린룸(청정실淸淨室)에서 방진복에 마스크를 쓰고 하루 종일 반도체 칩을 만들었다. 흡사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병정의 모습과도 같았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자신감이 없었던 나는 기센 언니들이 무서웠고, 내가 만든 제품이 불량이 나서 조장 언니에게 불려 갈까 봐 더 무서웠다.
차차 적응되니 저녁 어스름에 윤상의 ‘가려진 그늘’을 들으며 잔업을 할 때면 여고생처럼 감상적으로 되기도 했다. 여공의 삶은 적당히 나를 감추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때때로 노조 언니들이 거품을 물고 시위를 할 때도, 수위 아저씨들한테 멱살을 잡혀 회사 밖으로 내쳐질 때도 나는 부지런히 회사에 갔다. 그들의 정의로움이 경이롭기는 하였지만, 소시민적인 나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매일 충북대 앞 버스 안에서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지 않는 것이 더 절실했다.
내 나이 스무 살, 떨리는 가슴이었지만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학교에 가고 싶었다. 꿈 많은 나를 공단 깊은 곳 회색 담벼락 안에 가두어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용기와 절망 사이에서 수없이 담금질하는 내가 때때로 힘들었다.
가을이 본연의 색을 잃고 점점 무채색이 되어 갈 무렵, 반년 치 퇴직금 정산을 하러 공단 어디쯤 회색 담벼락 사이를 조심히 걸어갔다.
물론 회사는 불량률 제로 우수 사원인 나를 놓치기 싫어했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기에 호기롭게 회색 담에서 탈출했지만, 거세게 몰아치는 돌개바람에 이리저리 나뒹구는 낙엽을 보며 아득한 생각만 들었다. 내 인생도 저 낙엽들처럼 끝 간 데 없이 흩어져 버리는 건 아닌지, 정말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차디찬 바람이 옷섶을 파고들자, 더욱 정신이 혼미했다.
순간 가슴을 파고드는 늦가을의 차디찬 바람이 느슨했던 마음을 꽉 조여 주었다.
그래, 이젠 온전히 내 책임이다, 그냥 무심한 듯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리라.
내 나이 스무 살, 나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갔다.
*작가의 변
합평방을 처음 시작할 때는 정말 미친 듯이 글이 쓰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삶에 치여 첫 마음이 점차 퇴색 되어 가더군요.
'이번엔 꼭 글을 올려야지' 다짐하면서 얼마간은 2시간이나 일찍 출근하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예기치 않은 일들이 생겨 정신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전에 써 놓은 글이 있어서 급히 손을 보아 올려봅니다. 원래는 산문시였는데 분량을 좀 더 늘렸습니다.
처절한 스무살을 보냈던 적이 있었어요. 어려움을 겪으니 내가 가야 할 길이 더욱 명확해 지더라고요.
잘 모르는 인생이지만 다양한 경험들이 모아져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구슬이 영롱한 빛을 내는 것 같네요.
글쓰기에 대한 애정이 다시금 생기도록 노력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