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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행    
글쓴이 : 박지희    26-05-11 20:00    조회 : 2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행

박지희

 

 

형광등 불빛이 질끈 감은 눈 사이를 파고들었다. 손가락 끝이 두피를 지날 때마다 어지러운 잡념이 샴푸 거품 속으로 사라진다. 내 머리를 만지는 손가락의 주인도 누군가의 청량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걸까.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드는 요란하고 뜨거운 바람이 어릴 적 기억을 깨웠다.

 

파마약 냄새가 마당을 흔들면 백색의 파마지가 발버둥 치며 날아다녔다. 파란색 소쿠리엔 롯드와 노란 고무줄, 그리고 파지가 들어있다. 엄마 손은 내 머리를 연습 삼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주문에 맞추어 장난감 같은 롯드를 빠르게 실어 날랐다. 조용한 밤이 되면 엄마는 이 빠진 갈색 밥상을 펴고 미용 이론 공부를 했다. 책 속엔 화학기호 같은 낯선 언어들이 가득했다. 안방 아랫목엔 엄마의 결의와 고단함이 상승할 준비가 한창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모두 엄마의 비행 연습에 기꺼이 활주로가 되어주었다. 마당엔 파마하러 온 아이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어느 날 물레방아집 언니가 내 어깨를 일부러 밀쳤다. 나는 힘이 부족해 당하고만 있었고, 보다 못한 엄마가 한마디 했다. 그 언니를 혼낸 것도 아니고 단지 밀지 말라고 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물레방아집 아줌마가 찾아왔다. 평소와는 달리 악천후처럼 화가 나 있었다. 그 여자는 엄마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얼음처럼 굳은 채 서 있었다. 대문을 나서며 그녀는 마지막 화살을 쏘았다. “담배나 피우는 주제에”.

 

엄마는 뒷간에서 숨죽여 울었다. 우리 엄마는 담배를 피운다고 철없이 나불거린 일이 화살이 되어 엄마를 찔렀다. 나도 울었다. 그때 나는 차마 할 수 없었던 세 번째 첩 인주제에라는 말을 평생 두고두고 되뇌었다. 물레방아집 아저씨는 부인이 자주 바뀌었는데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자기 애들까지 데려와 살았다. 그 엄마와 딸의 성질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친하게 지내던 친척마저 돈문제로 집에 찾아왔다. 아빠와의 다툼도 잦아졌다. 마당에서 개구리를 잡으러 돌아다니는 검은 뱀처럼 온갖 방해꾼들이 엄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래도 엄마는 기를 쓰고 비행준비를 했다그러다 온 집안에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엄마 친구로부터 엄마의 미용사 시험 합격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후 모래내 시장에 초이미용실이 생겼다. 엄마는 보란 듯이 비행에 성공했다. 누구보다 더 예뻐지고 더 열심히 일했다. 아빠의 사업실패에도 우리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엄마의 비행 덕분이었다.


미용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엄마의 뒤로 시장에 나온 할머니들이 집게가 꽂힌 넥셔터를 두른 채 나란히 앉아 있었다. 미용실에는 낡은 소쿠리가 아닌 수납력 좋은 트롤이 있었고, 디지털열기구와 신식 파마의자가 줄지어졌지만 파마약 냄새만은 여전했다세상의 모든 부드러워 보이는 것들은 사실 무언가에 처절하게 붙들려 본 기억이 있는 법이다. 빳빳한 머리카락이 롯드에 휘감겨 부드러운 컬을 얻기까지는 뜨거운 열기와 독한 약을 견뎌야 한다. 인생의 탄력 역시 묵묵히 지탱해 주던 존재들의 헌신에서 시작되는 것이리라.


미용실 가득 퍼지는 파마약 냄새를 맡을 때면, 나는 오래전 허름한 마당에서 내 머리를 말아 올리며 이륙준비를 하던 엄마의 부지런한 손을 떠올린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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