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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월 대보름    
글쓴이 : 권순예    26-03-24 10:06    조회 : 80

 나는 찐 밤은 먹지 않는다. 정월 대 보름날 이른 아침, 아버지는 해가 뜨기 전 부럼을 깨물어야 한다며 밤이 담긴 그릇과 미지근하게 데운 막걸리 귀밝이술 주전자를 들고 들어오셨다. 주전자를 흔들어 대접에 술을 따르신 뒤 한 모금 먼저 드시고, 언니부터 차례로 귀밝이술을 권하셨다. 그러고는 밤을 까서 하나씩 먹여주셨다. 우리는 화롯가에 둘러앉아 아버지가 까주는 밤을 받아먹었다. 아버지의 손길이 더 분주해졌고, 와그작와그작 부럼 깨무는 소리가 방 안 가득 퍼졌다.

 엄마는 아침밥을 지으시며, 볏짚 한 단을 깨끗이 추려 시루 믿(시루 구멍을 막는 도구)을 만들고 장독 위에 추린 볏짚을 펴놓고 떡 시루를 올려놓으셨다.

 어른들과 아이들은 윷놀이와 널뛰기를 하며 마을의 안녕과 한해의 풍년을 빌며 집마다 다녔다. 잡귀를 쫓고 평안을 기원하는 풍물놀이 소리가 동네에 끊이지 않았다.

 나는 사촌 오빠가 연을 만드는 옆에 앉아 거들었다. 연을 만드는 재료는 망가진 비닐 우산대와 창호지, 밥풀, , 칼이면 충분했다. 창호지를 직사각형으로 자른 데 (가로 40 센티 세로 60 센티) 가운데 구멍을 낸다. 오빠는 대나무 살을 얕게 쪼개어 거친 부분을 칼로 다듬어 주면, 나는 매끈해진 대나무 살에 밥풀을 발라 창호지에 붙였다. 그렇게 대나무 살 다섯 개를 붙이고 나면, 연 윗부분을 실로 팽팽하게 당겨 약간 아치형이 되도록 잡아주었다. 이어 실을 네 모서리에 연결해 중심을 맞추고, 좌우 길이가 같은 꼬리를 붙였다. 가운데 꼬리는 길게 달아주면 제법 멋진 방패연이 완성되었다.

 들떠 연을 들고, 나가면 달력으로 만든 연. 마분지로 만들 연, 창호지로 만든 연들이 훨훨 날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빙글빙글 돌다가 땅에 처박히는 연도 있었다. 실이 끊어져 멀리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 연도 있었고, 높은 미루나무 가지에 걸려 꼬리만 바람에 흔들리는 연도 있었다. 아이들은 해가 지는 줄로 모르고 놀았다. 연은 나쁜 액운을 쫓기 위해 날린다고 한다. 사촌 오빠와 내가 만든 연은 나의 꿈과 행복을 싣고 부엉산 넘어 아주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저녁이 가까워지면 부엉산 위로 둥근 보름달이 떠올라 마을을 대낮처럼 밝히고, 마을 앞 들녘에는 아이들의 쥐불놀이로 동네가 한층 더 시끌벅적해졌다. 아이들은 낮에 깡통에 구멍을 뚫고 긴 줄을 달아 불쏘시개를 넣어 준비해 두었다. 숯으로 깡통을 채워 어둠이 내려앉기만을 기다렸다가 불을 붙여 빙빙 돌리면 크고 작은 불꽃들이 밤하늘 아래서 마을을 수놓았다.

 지금은 아버지가 하얗게 깐 밤도, 엄마의 시루떡도, 오빠와 함께하던 연날리기도, 확확 달아오르는 불놀이도 모두 다 옛일이 되어버렸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정월 대보름이 되면 아직도 부엉산에 쟁반같이 둥근 달이 떠오르고, 그 아름다웠던 사람들과 팥시루떡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나는 팥시루떡을 가장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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