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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바랜 스카프    
글쓴이 : 차세란    25-03-17 00:05    조회 : 89

빛바랜 스카프

차 세란

 

오랫동안 미루고 있던 옷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옷장 구석에 잊고 있던 빛바랜 스카프가 눈에 띄었다. 무늬도 알아볼 수 없고, 해진 원단은 손만 대도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쓸만했는데, 언제 이렇게 되었나?

낡은 스카프를 보고 있자니, 문득 오래전 가을의 동아리 모임이 떠올랐다. 

* * *

와! 정말 오랜만이다. 너무 반갑다.

잘 지냈어, 선배? 이렇게 다들 얼굴 보니 참 좋다.

넌 그대로다.

하하! 선배 말솜씨가 늘었네. 빈말도 다 하고. 빈말인 줄 알지만 기분은 괜찮네.

그날은 아마도 대학 시절 동아리 회원 중 누군가의 결혼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졸업 후 오랜만에 만난 동아리 회원들과 왁자지껄 한바탕 신이 났었다. 한창 모임이 무르익어갈 무렵 말수도 적고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고구마'로 불리던 선배가 웬일로 살갑게 안부를 물어 왔다. 우리는 종로의 한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오랜만의 회포를 풀었다.

선배는 아직 결혼 안 했어? H그룹 계열사 다닌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결혼은 무슨? 아직 더 벌어야지. 동생들 공부도 시켜야 하고....

선배 요즘도 책 많이 읽어?

아니, 직장생활 하다 보니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가, 책을 읽어도 눈에 잘 안 들어와. 소설책 옆에 끼고 다니던 시절이 좋았지.

우리 동아리는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 문학을 읽는 독서 모임이었다. 모파상의 목걸이』『비계 덩어리,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있거라,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 황석영의무기의 그늘, 박완서의 나목,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등속. 스물을 갓 넘긴 젊은이들이 그 작품들을 얼마나 이해 했을까마는 회원들은 열심히 책을 읽었다. 스무 명 남짓한 회원들은 한 달에 두 번, 읽어온 책에 대한 소감을 나누고 간단한 뒤풀이 후 헤어졌다.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생일인 회원들에게 떠들썩한 축하 파티를 해 주기도 했다.

고구마는 나보다 한 학번 위였지만, 나이는 두 살이 많았다. 서로 눈인사만 주고받던 사이였는데, MT를 가서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1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을 무렵 남이섬으로 MT를 간다며 신입생은 무조건 참석하라는 공지가 떴다. 각자 할당받은 준비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집을 나서 어렵사리 MT 장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한숨을 돌린 후, 간단히 점심을 먹은 회원들은 놀잇거리를 찾아 나섰다. 몇몇은 족구를, 몇몇은 배드민턴을 치기로 하고 팀을 나누었는데 어디에도 합류하지 못한 몇 명 가운데 나와 고구마가 있었다. 우리는 한쪽 구석에 뻘줌하게 앉아 있었는데, 누군가 자전거를 빌려 타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썩 내키지 않았으나 계속 앉아 있다가는 온갖 잔심부름을 하게 생겨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자 시원한 강바람에 얼굴에 맺힌 땀방울들이 날리는 기분이 상쾌했다. 메타세콰이어 숲길의 만개한 장미꽃들 사이를 신나게 달리다가 어디서인가 상큼한 스킨 냄새가 풍겨와 고개를 돌려보니 고구마가 옆에서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었다. 강가에 다다라 우리는 자전거를 세워놓고 나란히 앉았다.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자신의 집은 성북구 어디이고, 형제는 넷인데 본인은 장남이며 동생들과는 나이 차가 꽤 난다는 것이다.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해야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는 등의 특별할 것 없는 얘기를 했다. 고구마가 그렇게 말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고구마가 납작하고 모난 돌로 강물에 수제비도 뜨고, 서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어스름이 번지고 있었다. 자전거 반납 시간이 훌쩍 지나 버린 것이다. 우린 허둥지둥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시간을 넘겼지만 비수기인데다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겠냐며 추가 요금은 안 받겠다는 훈훈한 사장님의 고마운 배려를 뒤로 하고 무사히 숙소로 귀환했다.

고구마 선배와의 추억이라면 그게 다였다. 그해 겨울 그는 입대를 했고, 내가 졸업 할 때까지 그를 모임에서 볼 수 없었다.

신나게 떠들던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고, 시간이 꽤 흘렀을 때 나와 고구마는 호프집에서 나와 종각역까지 함께 걸었다. 찌푸둥하던 밤하늘에서는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지하철 역사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의 발걸음이 차츰 느려지더니 머쓱하게 말문을 열었다.

네 생일이 이맘때 아니었나?

아니 선배가 그걸 어떻게?

하하하! 그러게, 죽을 때가 됐나, 별것이 다 기억나네.

으이구, 그걸 농담이라고 해?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머뭇거리며 가방에서 쇼핑백을 꺼냈다.

혹시나 해서 준비했는데, 이렇게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게 뭐야? 스카프네!

여자 물건을 사 봤어야지. 백화점 직원한테 부탁해서 골랐는데, 맘에 썩 안 들더라도 하고 다녀.

이걸 나보고 받으라고? 아이고, 됐네요! 이걸 왜 나한테?

너 안 받으면 반품해야돼. 이걸 내가 누구한테 주겠냐?

아니, 미안해서 이걸 어떻게 받아....

뒤풀이에서 마신 몇 잔의 술 때문이었을까? 나의 귓볼이 발그레해졌다.

만나서 반가웠다. 다음 모임 때 꼭 나와. 그동안 잘 지내고!

그래. 선배도 건강하고. 선물 고마워.

때마침 도착한 전동차에 나는 몸을 싣고 물끄러미 서 있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음을 약속했던 그는 더 이상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간간이 누군가를 통해 들려온 그의 소식으로는 해외 어딘가 지사로 발령을 받아 떠났다 했고, 그 후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끝내, 나는 그에게 답례를 하지 못하였다.

                            * * *

 

빛바랜 스카프와 더 이상 입지 않는 옷들을 챙겨 헌 옷 상자에 버리고자 아파트 현관문을 나섰다.

하루 종일 낮게 내려앉았던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첫눈이 내릴 것만 같았다.

어느새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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