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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호박    
글쓴이 : 박지희    26-03-24 10:47    조회 : 66

늙은 호박 

                                                                             박지희          

인심 좋은 이웃이 늙은 호박을 주었다. 늙은 호박은 며칠 째 주방에서 충돌의 흔적을 품은 달처럼 떠있다. 빨리 착륙선을 보내지 않으면 지구와의 거리만큼 영영 멀어질 것 같다. 첫 칼은 한 번 박힌 것이 나이 들어 쌓인 상처와 패턴에 걸려 칼을 빼느라 애를 먹었다. 칼이 내어준 길을 양손으로 벌리자 주황 섬유가 쫘악 갈라지며 저음의 탄식을 뱉었다. 젊음을 잃는 대신 숙성을 택한 늙은 호박은 세월을 견디고 난 후에야 노란 속내를 드러낸다.     


할머니의 호박죽이 제일 그립다고 남동생이 말했다. 부모님이 일을 나가면 꼬르륵대는 뱃속의 공기처럼 할머니는 마당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늙은 호박의 껍질을 벗기고 푹 삶았다. 동생과 나는 부뚜막에서 달큰한 냄새를 맡으며 기다렸다. 변변치 않은 시골살림에 할머니가 불 앞에서 끓여낸 호박죽에는 갈라진 손에서 뿌려진 쌀가루가 부유하고 있었다. 그 달고 깊은 맛이 그립지만 나는 그때의 그 맛을 낼 자신이 없다.


어느 날은 아궁이에 호박죽을 끓이려고 불 넣던 할머니가 부지깽이인 줄 알고 잡은 것이 뱀꼬리였다. 혼비백산한 채로 넘어졌지만 뱀에 물리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남매 주려고 우거진 산속에서 산딸기를 따다가 뱀에 물렸다. 고통스럽게 팔을 잡고서도 한 손으로는 산딸기가 담긴 바구니를 나는 넙죽 받아먹었다. 팍팍한 살림에 아픔도 사치였던 할머니의 주름진 몸은 식솔을 먹여 살리느라 언제나 쉬는 법이 없었다.      

잔칫집에서 품앗이하던 할머니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할머니가 내게 몰래 준 것은 콩사탕 한 봉지였다. 나는 철없이 콩사탕을 까먹으면서 집으로 돌아가 할머니를 기다렸다. 어쩌다 할머니가 늦게 오는 날은 저 멀리 삼거리에서부터 용달차 짐칸에 탄 할머니가 보였다. 하루 종일  일하고 새참으로 받은 보름달빵을 내게 주려고 서둘러 대문을 들어서는 할머니의 모습이 선하다. 할머니는 한 번이라도 완전한 달을 먹어본 적이 있을까. 삐걱이는 마루에 한쪽에 서러움을 품은 늙은 호박옆에서 나는 할머니의 달을 먹었다.       

언젠가 할머니는 가끔 옛 민요를 부르면서 젊은 나이에 요절한 둘째 아들을 그리워했다. 둘째 큰아버지는 할머니 말대로 네 형제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훤칠했다. 할머니가 부르는 옛 가락에 할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원래 그런 음악처럼 하나가 되어 마당 한 구석으로 빠져나가다 멈추곤 했다. 그리곤 나에게 할머니의 지난 시절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는 열여덟 살에 시집을 갔다.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얼굴도 몰랐던 할아버지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가 돌 무렵.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피해서 도망가려고 했었다고 한다. 배 타고 멀리 가든, 저수지에 빠져 죽 든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술과 여자를 끼고 할머니를 때리며 가정은 나몰라라 하는 난봉꾼이었던 것이다. 굳게 마음먹고 짐을 싸서 나오는데 그때 막내아들이 울었다. 막내를 달래고 떠나려는데 두툼한 손발이 얼마나 복스럽고 귀엽던지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작은 손이 할머니를 붙잡았다. 


그 후 일본 순사들을 피해 정착 한 곳이 내가 자란 시골집이었다. 할머니는 낯선 곳에서 터를 다지고 직접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지런히 먹이고 입혔다.

할머니를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지금에서야 할머니의 울퉁불퉁한 세월을 가늠해 본다. 자식에 손주까지 돌보느라 할머니는 푸른 젊음을 잃었다. 자유를 잃는 대신 고생길을 자처한 할머니의 굴곡진 삶이 숙성된 시간은 값을 매길 수 없다. 그때 그 호박죽을 맛볼 수 없듯이 오직 할머니만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하얀 씨앗이 엉겨있는 국수 모양의 섬유질을 긁어냈다. 단맛과 밀도를 품은 과육이 품위 있다. 호박껍질을 칼로 벗겨내고 손질하다 보니 손에 힘을 준 탓에 그새 물집이 잡혔다. 호박을 찐 후 믹서기에 곱게 갈았다. 그것을 다시 끓이다가 물과 찹쌀가루로 농도를 맞추고 설탕과 소금을 넣는다. 조리법은 간단하지만 손질과 뒤처리는 간단하지 않다. 너무 오랜 시간을 건너 달의 뒷면을 보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여기저기 튄 호박 껍질과 굴러다니는 씨앗, 끓은 죽이 튀어 어지럽힌 잔해들을 처리하는 과정도 이겨내야 한다. 


호박죽 한 그릇을 식탁에 올렸다. 투박한 겉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을 끝까지 내어주는 부드럽고 고운 음식이 되었다. 오랜 기다림을 견딘 호박은 맛이 깊다. 내 인생은 끓는점이 높아 언제 끓을지 알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가마솥에서 달의 궤도를 정성스레 그리고 있던 할머니의 모습을. 바지런히 움직이던 할머니의 하루하루를. 그 하루가 모여 만들어진 노란 속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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