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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은 줄 알았는데    
글쓴이 : 홍수야    25-03-15 16:37    조회 : 90
   수필7( 잊은 줄 알았는데).hwp (48.0K) [0] DATE : 2025-03-15 16:37:23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다. 평소에 입지 않던 치마까지 어설프게 챙겨 입고 나가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받아보니 친구가 급한 일이 생겼다며 다음에 만나자 했다. ‘연락을 할 거였으면 미리 해 줘야지.’ 나는 기운이 빠졌지만 애라 잘 되었다. 이렇게 남는 시간에 거실의 화초나 손질을 하자.’ 라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 아래서 몇 잎만 쓸쓸하게 매달려 있는 꽃나무들을 다듬었다. 그런데 화분마다 난데없이 꼬마 클로버만 수북하게 자라고 있는 게 아닌가! 신생아 볼처럼 보드라운 클로버를 없애려니 마음은 아프지만 예쁜 화단을 만들기 위해선 뽑을 수밖에 없었다. 화분을 정리하던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반 H 선생님께서 주신 콜레우스 꽃대의 시들시들했던 잎들이 요 며칠 사이에 하트모양의 붉은 꽃잎으로 되살아나 있었다. 그리고 수국나무의 갈색 이파리가 말라버렸다는 것을 말해주듯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기에 걱정만 하고 있던 중 생각지도 못한 연초록의 싹이 바닥을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지금 바깥의 기온은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가 계속되어 온 세상은 갈색으로 정지된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자연의 기운이 쉼 없이 작동되고 있음을 알게 되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신기했다. 이제 막 싹튼 잎들 앞에서 미래에 만발해 있을 꽃들을 상상하며 겸연쩍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훗날에 가끔씩 꽃잎 위에 H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보기도 하겠지. 세월은 흘렀지만 나에게도 잊은 줄 알았으나 잊히지 않은 기억들이 뭉실뭉실 떠오르는 것이 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에너지 넘치며 병원근무 할 때의 일이 꿰매놓은 구슬처럼 기억의 고리가 되어 따라 나온다.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 해남에서 왔다는 어부 아저씨가 배가 아픈지 얼굴이 아픈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구겨진 얼굴로 보호자도 없이 응급실에 들어왔다. 검사결과 <맹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환자는 수술하여 별일 없이 치료를 잘 받고 퇴원해갔다. 퇴원해 간지 아마 보름 정도 지났을까? 나는 평소처럼 밤 근무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라도 사투리로 말하는 어떤 아저씨가 해가 뜨기 전 아침에 마대자루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장사꾼의 행세로 왔기에 놀라며 위아래로 훑어보니 검은 점이 코 옆에 있던 맹장수술을 받고 간 그 환자였다. 마대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잡아서 바로 갖고 온 것이니 싱싱할 겁니다.”라며 투박하게 말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안에는 고등어가 잔뜩 들어 있어 속으로는 별사람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 힘이 세 보이는 고등어는 몸부림을 쳐도 소용없는 신세가 되었으나 탈출하기 위해 포대자루에 머리를 박으며 꾸물대고 있었다. 아마 추운 겨울이라 북태평양에서 다른 어종들과 군집을 이루어 따뜻한 남해 바다로 내려오다가 어부한테 잡힌 것이 아닌가 싶다. 어부들 말에 의하면 수직으로는 총알, 수평으로는 고속철도가 통과하는 만큼 빠르다고 했건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기도 하듯이 고등어도 갑작스런 운명에 무릎을 꿇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그걸 나누어 갖고 가서 자취집 주인아주머니께 드렸다. 주인아주머니는 그날 저녁 반찬으로 졸이고 구워대어 바람 따라 떠다니는 고등어냄새가 동네를 뒤덮었다. 왁자지껄하게 딱지치기를 하던 아이들은 본인들 집에서 요리하고 있는 줄 착각하여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주위를 살피는 미어캣처럼 보였다.

 그 후에 결혼을 하고도 맞벌이로 병원에서 쭉 근무를 했다 하루는 오후 근무 중 의사의 오더를 받기 위해 꼼짝 못하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의자에 한번 앉게 되면 엉덩이를 본드로 붙인 것처럼 일체가 되는 순간이다. 컴퓨터에 눈을 고정하고 오더를 분리해서 받아야 한다. 즉시 환자에게 들어가야 할 처치와 약, 그리고 날마다 되풀이되는 것 등, 혹시 에러가 있을까봐 무의식적으로 깜빡거리는 눈꺼풀도 주의를 해야 한다. 사소한 것도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어서다.

 그런데 환자에게 주사를 놓기 위해 간호사실을 나가던 액팅 간호사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복도에 놓여있는 전자레인지에서 불길이 새어 나오고 있다면서 말이다. 환자에게나 또는 전반적인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제일 선두에 서서 처리해야 할 사람이 그 시간 근무를 하는 차지 간호사이다. 튕겨 나가는 고무줄처럼 뛰어나가 코드를 뽑고 불타고 있던 전자레인지 문을 열어 누군가가 던져준 젖은 수건으로 불을 껐다. “전자레인지를 작동해놓고 간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으니 한 간병사가 반찬그릇에 비닐을 씌워 그걸 작동시켜놓고 깜빡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불은 더 번지지 않았고 무사히 껐지만 불에 타고 있던 비닐이 내 팔에 튀어서 찰싹 달라붙어 화상을 입었다. 나는 통증이 밀려 왔으나 간병사에게 경위서를 받기로 하고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내 가슴 속은 화가 솟구쳐 시커먼 먹구름이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오더가 쏟아져 밀리고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일을 끝내고 보니 화는 가라앉았으나 내 팔의 물집은 부풀어 올라 마치 주황색 풍선처럼 되어있었다. 막상 간병사를 불러놓고 보니 얼굴은 무표정이고 손목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허리도 펼 시간 없이 일한다고 생각하니 짠한 마음이 들어 교육만 한 번 더 하고 넘어갔다. 가장 먼저 발견한 간호사도 즉시 불을 꺼야지, 어쩌자고 소리만 질러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산재 처리는 하지 않았다, 상처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진료 부원장님이 직접 책임지고 치료해 주셨지만 오른쪽 팔에는 지금도 V자 흉터가 승리를 의미하듯 희미하게 남아 있다. 직원들은 화재 예방 교육을 정기적으로 받지만 크고 작은 실수들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 후 병동에서 환자들의 평온한 모습을 볼 때에 나 혼자만 다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지금도 가끔 티브이에서 병원의 화재 사건을 접할 때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양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이런 일들을 겪은 후 <책임>에 대하여 종종 생각하게 된다. 신규 때는 맡겨진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친절 간호사 또는 모범간호사가 되기도 하지만 직위가 올라갈수록 무한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또한 흐르는 세월 따라 인정도 많이 변해 가는 걸 실감하며 살고 있다말라버린 꽃나무에서 움트는 새싹을 보고 놀라게 되듯이 잊고 살던 내 지난 일들이 어느 순간 가슴을 데워주는 따뜻한 추억이 되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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