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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마티즈    
글쓴이 : 최경묵    26-07-18 07:44    조회 : 13
빨간 마티즈
 
최경묵

  지금 사는 이곳에 온 지도 스무 해가 훌쩍 넘었다. 남한강 줄기가 보이는 양평의 어느 시골 마을이고, 우리 가족처럼 도시에서 온 이주민들이 많은 편이다. 전원주택의 꿈을 현실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긴 터널 같은 IMF를 막 빠져나오던 때이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여러 사정이 겹쳐 살던 곳을 떠나 왔다. 전원에 집을 짓고 살려는 계획보다는 변화에 대한 대책이 필요한 시기였다. 11월의 끝자락이었다. 사방은 산으로 둘러싸였고, 단풍은 이미 물들어 있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지만, 초등학생 남매인 두 아이에게는 시골살이가 낯설었을 것이다.
  두 아이는 마을회관 앞에서 통학버스를 타고 등교하곤 했다. 그곳까지는 십 분쯤 걸어야 했다. 그 당시에 나는 집에서 편집 디자인 외주 일을 했다. 그전에 다니던 회사와 인연이 닿아 가끔 일할 수 있었다. 한 달쯤 되었을 때 동네 사람 한두 명이 시제를 지냈다며, 시루떡 접시를 들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나도 답례로 읍내 떡집에서 떡을 사다가 가까운 집 위주로 몇 집에 나눠주었다. 그 후로 마을회관 앞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여자분이 나를 초대했다. 그곳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식당 홀에서 일을 하던 한 여자가 수줍은 듯 해사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했다. 꾸밈없는 그녀의 표정에 왠지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 마을 사람들의 연령대에 비하면 그녀는 비교적 젊어 보였다.
  얼마 전에 그 마을에 두 집이 상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노인과 젊은 남자였다. 식당에서 내게 환하게 웃고 있던 그녀의 남편이 젊은 쪽이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마을의 산 안쪽에 있던 리조트가 그의 직장이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오토바이가 도랑에 빠지면서 사고를 당했다.
  그때 그녀는 나보다 네 살 위였고, 마흔이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우리 두 아이보다 한두 살 많은 초등생 두 딸과 아들이 하나 있었다. 우리 아이들과 나이가 비슷해서 그녀의 집에 가서 놀곤 했다. 그녀와 나는 차나 음식을 사이에 두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고, 아이끼리도 한참을 놀았다. 돌아갈 때가 되어 차에 오르면 내가 사양할 틈도 없이 담금주나 캔맥주를 남편 갖다 주라며 내 차의 조수석에 슬쩍 놓아주곤 했다. 우리가 살던 집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그녀의 집 반대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야 했다.
  그녀가 한번은 그랬다. 남편이 사망했을 때 세 아이와 함께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라는 생각에 붙들려,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었다고. 남편의 장례식을 치른 뒤, 그녀는 그 길로 남편이 다니던 직장을 찾아갔다. 당시 남편을 잘 알고 지내던 관리담당자를 찾아갔다. 예전 같았으면 그녀가 처한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정직원으로 채용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가장이 바뀐 상황이었으니까. IMF를 거쳐 간 다음에는 달라졌다. 구조조정, 감원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때였다. 결국, 일은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리조트와 계약한 용역업체의 소속으로 파견된 계약직 근로자 자격이었다. 평소에는 맡은 일을 열심히 해내다가도 월급날이 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급여차이를 실감하며 어깨의 힘이 저절로 쑥 빠진다고 했다. 
  그녀의 일은 리조트 내의 객실청소였다. 투숙객이 빠져나간 뒤에 묵기 전과 똑같이 말끔한 상태로 되돌려 놓는 일이었다. 일이 끝날 무렵이면 온몸이 흠뻑 젖어 땀범벅이 된다고 했다. 남편을 잃은 슬픔 뒤에 밀려온 집안의 해묵은 갈등까지도 그녀가 온전히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그녀와의 대화가 한참 무르익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떠나면서 대신 나를 보내준 것 같다고 했다. 의외의 고백을 들었을 때 나는 잠시 멋쩍어지기도 했다. 그 마을이 그녀에게도 고향은 아니었다. 고향에는 연고도 없어서 갈 일이 없다고 했다. 멀리 지방에 사는 여동생과는 가끔 전화 통화만 한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말버릇처럼 고맙다고 했지만, 정작 도움을 많이 받은 쪽은 나였다. 무엇보다 텃밭 가꾸기에 서툴던 내게 시기마다 심는 작물 종류와 재배 방법들을 놓치지 않고 챙겨 주었다. 작물 가꾸기용 책자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보다 그녀의 설명이 훨씬 실질적이고 유용했다. 한번은 내가 강낭콩을 심었는데, 기다란 껍질 안에서 꺼낸 큼직한 얼룩무늬 강낭콩이 내가 생각하기에도 대견했다. 콩을 까서 모았더니 양이 꽤 많았다. 그것을 봉지에 담아 그녀에게 갖다주었다. 내심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그녀는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아니 그것보다 더 좋아했다.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 후로도 그 이야기를 가끔 꺼내곤 했다.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마을 뒷산에 함께 올라 돋아나는 달래나 둥굴레 뿌리를 캐기도 했다. 산나물 채취하는 것에 내가 그녀보다 더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방 속의 나물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그녀가 자기가 모은 것을 내 가방에 전부 쏟아 넣어 주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그만 웃어버렸다. 산에서 나물 채취에 그렇게 몰두하게 될 줄은 나 자신도 몰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밭작물이나 화초를 기를 때 수확하는 것보다 기르는 과정이 더 재밌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난 뒤, 그녀에게 뜻밖의 일이 찾아왔다. 남편이 남긴 땅 몇 군데 중에서 도로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맹지가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 길이 들어섰다. 그 땅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고, 차액을 남겨 팔았나 보았다. 그것을 계기로 그녀는 집을 새로 짓게 되었다. 게다가 소형차를 사겠다며 나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얼마 뒤에 빨간색 마티즈를 들였다.  그녀가 남편을 잃고 나서, 자칫 삶의 의욕을 잃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보다는 세 아이와 힘을 내어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모습이었다.

  지금은 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 남편의 일 때문에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삼 년 가까이 지내다가 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다른 곳으로 이사 가서 없었다.
  한여름 잎이 무성해질 때, 덩굴손을 뻗어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식물을 보면 그녀가 떠오르곤 한다. 가느다란 더듬이가 닿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붙잡고 휘감아 타고 올라서서 반드시 태양을 마주하고야 마는 것처럼. 
  어찌 되었든, 나는 그녀가 붙잡고 올라갈 수 있도록 잠시 그 곁에 머물렀던 무엇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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