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란
나의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는 산책이지만 요즘은 혹한의 날씨 탓인지 산책이 그닥 즐겁지 않다. 두툼한 패딩을 껴입고 단단히 마음을 다잡아도 밖으로 나서기가 쉽지 않다. 이런 날은 하루쯤 쉬어도 좋으련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을 해야하는 아빠의 고집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섰다. 항상 내 편인 엄마가 "저 고집 때문에 내가 못살아, 못살아!”라며 타박을 해도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늘 같은 시간에 나타나던 단풍이가 안 보였다. 얼마 전부터 만날 때마다 부쩍 앓는 소리를 해대던 터라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데 모녀 사이인‘룰루’,‘랄라’가 다가왔다. 우아한 외모와 달리 저 둘의 성질머리는 동네에서 유명짜하다. 하필 이 시간에 저들이 나왔담? 가능하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때마침 자기 아빠와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도비'가 해맑게 나에게 인사를 건네 와 저들을 모른 척할 수 있었다.
“Hi, Sancho! How have you been?”
“야, 넌 이민살이가 몇 년째인데 아직도 한국말을 못 하냐?”
녀석은 자기 아빠와 함께 영국에서 왔다. 그래서 도비는 항상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껄여댄다. ‘도비’는 영국 소설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요정 이름이란다. 내 이름 ‘산초’는 스페인 소설 ‘돈키호테’속 인물이라고 한다. 소설에서는 '산초판자'라는데, 그 뜻이‘배불뚝이 산초’라고 한다. 엄마는 내가 이런 몸매가 될 줄 미리 알았던 걸까?
도비 아빠와 우리 아빠가 반가이 인사를 나누던 중 갑자기 눈발이 휘몰아쳐 우리는 귀가를 서둘렀다. 아파트 현관문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는데 ‘나비’가 아파트 지하 주차장 입구에 버티고 앉아 있다. 나비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사는 길고양이다. 동네 아줌마들이 ‘나비’라는 이름도 붙여주고, 아파트 화단에 집도 만들어 주고, 먹이도 챙겨 주곤 하지만 늘 꼬질꼬질하고 얼굴이고 몸뚱이고 여기저기 상채기 투성이다. 거리에서 누구라도 마주치면 등을 한껏 부풀려 상대에게 겁을 준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위험해 보이는 녀석이다. 변변한 거처 없고 끼니도 거르기 일쑤이지만 나비는 가고 싶은 데로 나다니며 그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는다. 내게는 집과 사료를 주는 가족이 있지만 나는 목 줄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다. 고단하지만 자유로워 보이는 나비의 삶이 가끔은 궁금하다.
집으로 돌아와 늦은 아침 식사 후 출근 준비를 하는 아빠를 나는 빤히 바라본다. 그러면 아빠는 내 눈빛에 항복하고 육포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준다. 입에 육포를 문 채 외출하는 아빠를 현관까지 쪼르르 따라가 배웅한다. 매번 겪는 일인데도 아빠는 오늘따라 발걸음을 쉽사리 떼지 못하고 몇 번이고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며칠 묽은 변을 보았다고 걱정이 한 가득이다. 무슨 일이 있는지 요즘 아빠는 잠자리에서 뒤척이고 별것 아닌 일에 울적해한다.
식구가 외출하고 나니 나 홀로 집에 남았다. 내 푹신한 방석에 누워 한숨 자야겠다.
이제사 밝히는 바이지만 내가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이들은 사실 계모와 계부이다. 생후 3개월쯤 되어서 나는 이 집으로 입양되었는데 나를 데리고 온 사람은 누나였다. 당시 계모, 계부는 반대가 심했다 한다. 그 반대를 무릅쓰고 누나는 막무가내로 나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9년 전 어느 여름날, 고양시의 OO 유기견 센터에서는 일산 미관 광장에 여러 마리의 강아지들을 데리고 나와 유기견 입양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누나는 친구들과 함께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많던 친구들 중 왜 하필 나였을까? 우리 사이에 무엇이 통했던 것일까? 누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어찌 되었을까?
그날 이후 나는 이 집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식구들이 나를 안고 바라보면, 일단 나는 눈매를 동그랗게 뜨고, 눈가를 아래로 쳐지게 해서 최대한 애처롭게 보이도록 했다. 그러면 대부분은 "에구구~~ 내 새끼!"라며 궁둥이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이때를 놓칠새라 난 그들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내 간교에 홀딱 넘어간 식구들은 마음을 열기 시작하더니 목욕을 시켜 주고, 미용을 해주고, 맛난 간식을 정성 들여 챙겨 주었다. 그러더니 나를 혼자 두고 여행도 못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식구들 말에 의하면 내가 누나 손에 이끌려 왔을 땐 앙상한 뼈가 가죽을 뚫고 나올 지경이었는데 불과 한 달 만에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한다.
이렇게 편안한 나날을 보내지만 가끔은 악몽을 꾸다 화들짝 놀라 깨기도 한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한없이 가족을 기다리다 우악스런 손에 잡혀 옴싹달싹 못하게 되는 꿈....그럴 때면 벌떡 일어나 방방마다 돌아다니며 가족들을 확인하곤 한다.
한숨 자고 나니 해가 떨어져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이제 슬슬 가족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가족들의 하루는 나와 달리 바쁘게 흘러간다. 때로 내 팔자가 상팔자라며 나를 놀려대지만 나라고 뭐 그렇게 편안하기만 하겠는가? 나도 식구들이 모르는 애로 사항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오가는 식구들을 배웅하고, 마중하고, 간식 하나 얻자고 온갖 애교를 다 떨어야 한다. 가끔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 오는 형아, 누나의 뽀뽀도 견뎌야 한다. 나를 붙들고 격하게 뽀뽀를 해댈 때마다 한 웅큼씩 뽑혀 나가는 털뭉치를 망연히 바라봐야 한다. 한밤중에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면 우리 식구를 지키기 위해 내가 나서야 한다.
어느새 내 나이 아홉 살, 인간으로 치면 쉰 살이 넘었다. 전에 없이 털도 빠지고, 기력도 떨어지고, 관절에 문제가 생겨 계단 오르내리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도 식구들은 언제까지고 내가 귀엽고 기운이 뻗치기를 바란다. 요즘 누나는 낯선 형아를 자꾸 집에 데리고 오는데, 그 형아는 나에게 장난감이며 간식들을 들이밀며 점수 따기에 여념이 없다. 그 마음이 언제까지 갈까 의심스럽기도 하고, 누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맞수가 될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하다. 그래도 나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내일도 오늘처럼 가족들과 함께 건강하고 발랄할 거니까!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