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낸다고?
이성근
그녀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업데이트되었다. 그녀의 근황이 참으로 궁금했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올라온 사진들. 휴대폰을 쥔 내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진을 하나씩 터치하며 넘겨본다. 가을이 물든 공원의 풍경 사진이 여러 컷, 벤치 위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도 보였다. 사진을 또 넘긴다. 강아지 ‘시추’를 안고 찍은 사진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사진 속 인물은 분명 그녀가 아니었다. 개를 좋아하지 않았던 그녀의 카톡엔 낯선 향기가 가득했다.
"아줌마! 조금만 서둘러주세요. 얼른 오세요.”
휴대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아들이었다.
"주차만 하면 얼른 올라갈게, 다 왔어.”
공간이 부족한 요양병원 주차장을 몇 바퀴 돌다가 겨우 한자리를 찾아 차를 댔다. 선뜻 차에서 내리기가 힘들었다. 서둘러야 하는 상황과는 달리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어제 전화를 했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나는 니 친구여서 참 행복했다. 받은 사랑 다 갚지도 못하고 먼저 가야 하나 봐.”
"무슨 소리야. 얼른 건강해져서 우리 예전처럼 함께 해야지.”
"나도 그러면 좋겠는데… 의사선생님이 이제 가까운 사람들이랑 인사하래… 사랑해. 먼저 가서 기다릴게. 우리
가 혹 만날 수 있다면 거기서 또… .”
수화기 저편의 그녀 목소리가 점점 뭉개지더니 급기야 전화는 뚝 끊겼다. 그녀의 뜨거운 울음이 내 가슴으로 건너왔다.
그녀와 나는 초등학교 학부모회에서 만났다. 두 집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나서 성인이 되도록 꾸준히 근황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요리를 잘하는 그녀는 특별한 음식을 하면 바로 우리 집으로 들고뛰어왔다.
“나는 맛있는 거 먹을 때나 좋은 곳에 가면 꼭 니 생각이 나더라.”
감성코드가 맞았던 우리는 영화관에서도 함께 울고 웃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 날은 일본 영화 '러브레터'를 보았다.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한 여인이 광활한 눈밭에서 “오겡키데스카?” 라며 울부짖었다. 그 장면을 보던 그녀가 말했다.
“내가 먼저 하늘로 가면 어떻게든 잘 살고 있다고 연락을 할게. 슬퍼하지 마.”
그녀의 이야기에 나는 장난스럽게 반응했다.
“참나, 그게 가능한 일이야? 자기는 착해서 천사가 되려나 보다. 오구오구 그래서 나를 만 나러 올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셔. 우리는 늘 함께라는 거 잊지 마”
혈육도 아니고, 성인이 되어 만난 친구가 특별한 사람으로 내 삶의 곳곳에 스며들었다. 급기야 양쪽 집 남편들은 그렇게 좋으면 가서 살라고 우리에게 핀잔을 주었다.
“칫, 어디 가서 살라는 거지?”
나이 들면 우리만의 아지트도 만들어 보자며 의기투합했다.
어느 날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 병원 다녀왔어.”
“어디 아파?”
“배가 자꾸 불러와서 소화가 안 되나 싶었는데 배에 복수가 찼대. 난소암이래.”
“……”
그로부터 3년이 넘도록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암세포는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제는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치료는 없다고,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기라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암 병동 앞에서 우리는 끌어안고 아이들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뼈만 남은 그녀의 몸에서 고통과 회환의 시간들이 들끓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은 몸을 이끌고 그녀의 병실로 들어섰다. 주차장에서 꾸물대느라 그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마지막 호흡이 힘들었던지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과 대면했다. 손을 잡아보니 아직도 따뜻했다. 앙상한 손가락 사이로 평화로운 기운이 흘러갔다.
그녀가 떠난 후 3년이 무미건조하게 흘렀다. 어떻게든 잘 산다는 소식을 전해준다더니 꿈길로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젠 어디서고 들을 수 없는 그녀의 근황. 오늘 아침 117년 만에 쏟아진 엄청난 첫눈을 보니 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이 겹쳐졌다. 문득 그녀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와타시와 겡키데스(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나는 오늘에야 그녀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내 친구 목록에서 삭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