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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시대    
글쓴이 : 이성근    25-02-23 14:27    조회 : 87
   영웅시대.hwp (29.5K) [0] DATE : 2025-02-23 14:58:50

영웅시대

 

이성근

 

  하늘색 물결 속에서 우리 두 사람의 흰색 옷이 유독 눈에 띄었다. 각자의 손에서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응원봉도 우리에겐 없었다. 요즘의 팬덤 문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했던 걸 깨달았지만, 가수의 노래에 집중하며 콘서트를 즐기기로 했다.

  "영웅시대가 아닝교? 이거라도 들고 흔들어보이소.”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할머니가 우리에게 응원 현수막을 건네주었다. 임영웅의 팬클럽 영웅시대는 가수의 이름을 환호하며 고척 스카이돔을 가득 메웠다. 후배 어머니가 오기로 했던 콘서트에 대신 참석한 우리 부부는 내내 이방인처럼 분위기에 스며들지 못했다.

 

  "니는 어째 덕질이랑은 거리가 멀다냐? 참말로 열정이 부족혀.”

  트로트 가수의 열성 팬이 된 친구는 내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못마땅해했다. 돌이켜보면, 특정 인물이나 대상에 꾸준히 애정을 쏟았던 기억이 거의 없다. 아마도 그것은 내 마음에 처음 자리 잡은 인물의 영향력이 너무도 컸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 중반,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우리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옆 반 담임선생님이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아이돌이 없었지만, 그 선생님은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제 막 교대를 졸업한 선생님은 우리보다 겨우 10년 연상이었다. 그 젊은 나이만으로도 충분히 주목받았다. 미소년처럼 앳된 얼굴에 미소가 더해지면 눈이 부셨다.

  방과 후, 6학년 여학생들은 선생님이 하숙하는 집으로 몰려갔다. 선생님은 우리 학년 친구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 친구와 친하지 않았던 아이들마저 그 집을 드나들며 선생님과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 했다. 그 친구는 어른스럽게 선생님의 반찬을 준비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 나 그거 한 번만 젓어보면 안 되겄냐?”

  "느그가 하면 손맛이 지대로 난다냐?”

  그 친구는 마치 멸치를 볶고 있는 그 순간이 자기만의 특권인 듯, 우리의 열망을 모른 척했다. 심지어 선생님께 전할 편지도 그녀의 심의를 거쳐야 전달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훗날 동창회에서 그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그때 우리 쌤 인기 참말로 많았당께. 나한테 전해달라는 여자쌤들 연애편지는 내가 밥함 서 아궁이에 다 집어넣어 뿌렀어.”

  "겁 없는 가시내 보소, 진짜 간땡이가 크다잉.”

  친구들은 그 대범함에 고개를 저었지만, 그 시절 우리들의 스타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그녀의 노력을 인정하며 함께 웃었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나를 따라다니며 합창하듯 놀리던 아이들 때문에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어설프게 서울말을 흉내 내던 짓궂은 남자아이들. 하굣길에 무리를 지어 나를 따라다니던 그 아이들이 보이면 어디선가 선생님이 나타나곤 했다.

  "느그들, 거그 뒤에 있는 놈들, 좋으면 좋다고 해라. 내가 누군지 다 봤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은 우르르 흩어져 나를 앞질러 달려갔다. 갑작스러운 전학으로 적응 못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휴일이나 방학이면 선생님과 함께 산과 강으로 나들이를 가는 무리에 나도 끼어 있었다. 우리들은 선생님과 자연을 만끽했고, 그 시간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선생님의 삶은 여러 장면으로 내 마음속에 켜켜이 쌓였다. 어느 날은 특수학급 담임이 된 선생님의 모습을 마주했다. 조금 어눌한 아이들 사이에서, 그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이 나를 안타깝게 했다. 선생님을 둘러싼 그 환경이 너무 싫었지만, 동시에 혼란스러운 감정이 밀려왔다. 선생님이 너무도 커 보였고, 그에 대한 존경심에 눈물이 흘렀다.

  그날의 눈물은 나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도 선생님처럼 학교에서 장애학생들과 함께 울고 웃는 특수교사가 되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나는 선생님께 세상사를 종알종알 일렀다. 오랜만에 전화 드리면 누군가 아프고, 누구는 힘들다고 하니 그곳을 꼭 찾아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결과 보고를 부탁하시곤 했다. 그 덕분에 나의 시선은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점점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얼마 전, 어수선한 시국이 걱정되어 연락을 드리자 간단한 메시지가 돌아왔다.

  “묵묵하게 견디고 건강하게만 지내시게

 

  공연이 끝났지만 팬들은 가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남편도 그 분위기에 녹아들어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거듭되는 앙코르곡을 끝낸 후, 뒷자리 할머니께 현수막을 돌려드렸다.

  "워땠어요? 우리 영웅이 진짜로 죽이지요? 영웅시대가 벌써 20만이 넘었다 아닝교. 내는 우리 영웅이 땜시 밤에

   잠도 잘 자고, 행복하요. 아이고, 얼마나 예쁘노, 노래도 잘하고. 하이고, 우리 영웅이.”

  "네네, 정말 대단하네요. 앞으로도 좋아하는 노래 많이 듣고 건강하세요.”

  지팡이에 의지해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내 영웅을 자랑하고 싶었다.

  ‘저도 50년이 넘도록 영웅시대를 누리고 있답니다. 제 영웅도 대단한 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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