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강덕수
“기다림”이라는 말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감정의 뉘앙스가 들어 있다. 누구를 기다리든, 무엇을 기다리든 ‘기다림’ 속에는 미래를 향한 희망이 있다. 그래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현재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 기다릴 것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39년을 병마와 싸우며 산다는 게 어떠할까? 어떠시냐고 여쭙지 않았다. 여쭐 생각도 들지 않았다. 30년 넘는 긴 세월을 옆에서 지켜본 장모님은 늘 평화로웠다.
가끔 작은 소동을 재밋거리처럼 만드시곤 했다. 장모님이 주섬주섬 보따리를 챙겨 들고 나가신다. 왼다리를 절기는 해도 지팡이 없이 걸으실 때였다.
“어딜 가세요?”
“고향 갈란다.”
“거가 어딘데요?”
“덩주!”(정주)
“아니, 점심 드시고 가셔야죠.”
“일없다. 날래 가야 돼.”
방에 있던 손녀들이랑 모두 우르르 달려 나와 장모님의 혼을 뺀다. 그러는 사이 장모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파에 가 ‘아이쿠!’ 하시며 앉으신다. 치매라기보다 섬망증이 온 거였다.
조금 심한 경우라면 침대에 누우신 채로 호통을 치신다.
“가방 가져오라!”
여고 시절 겨울에 압록강에서 스케이트를 잘 타셨다는 얘길 가끔 하셨다. 그때 10번도 넘게 1등 상금을 탔었다고. 그 상금이 든 가방을 가져오라는 얘기였다. 즉시 작은 가방, 그것도 주름진 검정색 가방에 만 원짜리 몇 개를 넣어 드린다. 잠이 드시면 가방은 제자리로 가고, 돈도 사라진다.
그보다 심한 일은 없었다. 몸이 불편하셔도 아무 불평 없이 지내시는 걸 보며 안타깝다기보다 경이로웠다. 대부분 시간을 TV 앞에서 졸고 있거나, 주기도문을 외거나, 성경을 펴 놓으신 채 꾸벅꾸벅 조신다. 밥때가 되면 무얼 해 드리든지 잘 드신다.
빌라에 살 때 날이 좋으면 1층으로 내려가 화단 앞으로 모셔 드린다. 휠체어에 앉은 채 꽃들과 대화를 나누듯이 중얼거리신다. 주위를 쳐다보며 꽃이 예쁘지 않으냐고 묻기도 하신다.
어느 날 군자란이 빨갛게 피었다. 꽃을 보는 눈빛과 표정에서 장모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 이걸 기다리셨나?”
화창한 날 성당까지 휠체어로 모셨다. 주임신부님의 호의로 성당 맨 앞자리로 모시고 나갔다. 신부님으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시며 장모님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수백 명의 신자들이 보고 있다는 걸 아시면서도 쏟아지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그렇게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장모님은 전쟁 통에 혈혈단신 이북에서 내려오셨다. 그 뒤로 한 번도 고향을 가 보지 못하셨다. 고향을 떠날 때 부모님과 형제들에게는 곧 돌아오마고 인사드렸을 거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향, 부모님, 형제들 소식을 전하는 편지 한 장 없었다. 얼마나 그리웠을까? 감히 여쭙지도 못했다.
장모님에게는 신줏단지처럼 끼고 도신 큰 가방이 있었다. 그 안에는 고향 가면 나누어주려고 모아둔 선물이 쟁여 있었다. 명동 백화점에서나 샀을 만한 명품 옷이며 비로도 같은 옷감들이었다.
장모님은 몸이 불편하였지만, 마음은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 39년을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셨다. 깊은 그리움을 긴 ‘기다림’으로 바꾸었다. 언제 올 지 모르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왜 오지 않느냐!’고 채근하지도 않았다. 오지 않는 그날이 바로 장모님을 지탱해 주는 희망이었다.
주말여행을 떠나는 장인어른에게는 한마디만 하셨다.
“벨트 꼭 매시우!”
출근하려는 사위에겐,
“운전 조심허게!”
쉬는 날 장모님 앞에 마주 앉아 있으면 ‘하심(下心)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껴졌다. 요즘 세상이 시끄럽다. 이럴 때 장모님의 선한 눈빛이 생각난다. ‘기다림’의 깊은 뜻을 알게 해 주신 그 눈빛이 마냥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