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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맞은 것처럼"    
글쓴이 : 강덕수    25-03-29 17:02    조회 : 657
   강덕수_총 맞은 것처럼.hwp (68.0K) [0] DATE : 2025-03-29 17:02:19

총 맞은 것처럼

강덕수

빠른 비트의 노래가 마음을 흔든다. ‘우리 왜 헤어져... 구멍 난 가슴에 우리 추억이 흘러 넘쳐...’ ‘죽을 만큼 아프기만 해 총맞은 것처럼.’

나의 소년기는 이렇게 끝났다.

사춘기가 늦게 온 건지, 그 애를 만나 시작된 건지 그건 나도 모른다. 아무튼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걸린 병에서 고3이 지나도록 벗어나지 못했다. 참으로 괴로웠다. 괴로움을 벗어나는 유일한 시간은 그 애를 만나는 순간뿐이었다.

 

범생이들만 들어가는 서클이 있었다. YMCA 내에서 활동하는 고등학교 연합서클이었다. 서울 시내 30여 개 남녀학교가 회원 학교로 가입되어 있었다. 남녀유별이 아직 관습처럼 남아 통학길도 좌우로 나뉘어 걷던 때였다. 그런 시절에 남학생과 여학생들의 만남이 공인된 YMCA는 고등학생들에게 천국이었다. 학교마다 열 명 정도의 회원을 뽑아 매주 사회적인 주제를 정해 토론을 하였다. 학기 중에는 전체 회원들이 12일 야유회도 갔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선 선배들이 학교의 학생회 간부, 반장들만 회원으로 뽑아 YMCA 소속 서클에 대해선 아무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지 않았다.

서클마다 본부에서 정해주는 대학생 지도자가 있었다. 그땐 이 지도자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선생님들은 대개 특기가 하나씩은 있었던 듯싶다. 우리 서클 지도자 선생님은 펜싱을 한다고 했다. 선수였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우리들은 지도자 선생님 앞에만 서면 다소곳해졌다.

 

연합서클을 홍보하는 신문을 발간하려고 편집부를 만든다고 했다. 학교에서도 문예반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도 망설이지 않고 편집부에 들어갔다. 대여섯 명의 1, 2 학년 남녀학생들이 모였다. 몇 차례 모였지만, 실제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1학년이었던 내게 유일한 소득이 있었다면 처음으로 여학생들의 관심을 받아본 거였다. 처음엔 2학년 여학생이 관심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은 나에게 누나처럼 대했다. 시골서 올라온 지 4년이 되었어도 아직 촌티를 벗지 못하여 그런 게 거북했다.

관심을 끈 아이는 따로 있었다. 그 애는 동급생이었다.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 날 그 애가 등산을 가자고 했다. 등산이란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등산? 어떻게?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데.”

그 아이는 걱정 말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그때 나는 삼청동 하숙집에 살고 있었다. 그 아이가 일러준 대로 삼청동에서 버스를 타고 수유리 종점까지 갔다. 약속 시간보다 30분이 늦었다. 아이는 배낭을 두 개 준비해 왔다. 그 애는 전날 그 부근에 사는 친구 집에서 묵었다.

수유동 입구에 있던 산장을 지나 백운대를 넘었다. 그리고 정릉 쪽으로 내려왔다. 산에 눈이 쌓여 있어 미끄러웠다. 운동화를 신고 넘기에는 위험하기도 하고 힘도 들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 애는 산에 오르는 게 익숙해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순 없죠.”

그 애의 말은 질책이 아니었다. 찬바람에 언 몸을 녹여주는 뜨거운 기운이었다. 성탄절에 눈이 와서 그런지 등산객은 별로 없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동행을 해 주며 도움을 주었다. 정상에 올라 아이가 가져온 떡국과 아저씨의 라면으로 점심을 먹었다. 거기에 돼지고기를 안주로 포도주를 마셨다. 추운 데에는 포도주가 제격이라며 권하였다. 처음 마셔본 포도주였다.

그날 이후 나는 사춘기라는 본궤도에 올라탔다. 대학 입시를 눈앞에 둔 고3생이 삶의 의미를 캐묻는 문제에 빠져들어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내주는 문제들은 철제 우리에 갇힌 동물들에게 던져주는 먹이만 같았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주는 대로 받아먹듯 그대로 외우기만 하면 돼.”

이걸 받아먹으면 짐승들이 살찌듯이 너희들도 대학에 갈 수 있어.”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무슨 질문을 한다거나 이의를 달면 돌아오는 건 핀잔 아니면 거친 말이었다. 그 시대는 아직 그랬다. 그게 싫었다.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고, 그것으로 학생들의 미래를 점친다는 게 끔찍했다. 막연히나마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고 있었다.

 

반 친구 하나가 우울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때는 그걸 신경쇠약이라 했다. 반장으로서 그 아이를 병문안 갔다가 병이 옮은 듯싶었다.

 

그래도 우울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성탄절에 등산을 같이 갔던 그 애 덕분이었다. 흔들릴 때마다 그 애는 중심을 잡아 주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그 애는 대학에 들어갔다. 나는 재수의 길을 걸었다. 재수한다고 절에 들어가듯 부모님이 계신 시골로 낙향했다. 그곳에서 5개월 여를 보내고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서울에 올라와 재수 학원에 등록하였다. 다시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였다. 대학 입시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 만남도 자제하기로 하였다.

겨울을 보내고 대학 입시가 끝난 뒤 그 애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꿈만 같았다. ‘이제 대학생! 우리는 자유로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약속 장소에 남자와 같이 나왔다. 결혼할 사람이라 했다. 그 애는 1년 사이 어른이 되어 있었다. 다시 만난다는 것에 마음이 들떠 나온 나에게 너무나 갑작스러운 장면이었다. 충격이었다. 망치로 맞은 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칼로 예리하게 난도질당한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숨이 막혀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온 기억밖에 없다. 대학 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남자와 같이 나온 건 연출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와 결혼을 생각할 아이가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1년 동안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아무에게서도 이해나 동정을 바라지 않았다. 학과 동급생들은 말도 없고 웃지도 않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겨울에 왔다가 겨울에 떠난 아이, 그 애는 나에게서 웃음을 빼앗아 갔다. 그날 이후 나는 비로소 소년의 티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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